특집 고전하지 않고 고전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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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02-21 10:51 조회 4,431회 댓글 0건본문
자기 삶의 주인 되기:
고전 읽을 권리
류대성 작가, 북칼럼니스트
“나는 어디에서든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그마한 책과 함께하는 좁은 구 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라는 토마스 아 켐피스(독 일의 성직자)의 고백에 공감하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있을까? 이제는 토마스 아 켐피 스가 느끼는 행복에 동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정보를 얻고 유튜브로 지식을 쌓는 세대에게 고전은 ‘라떼는 말야∼’로 시작하는 꼰대의 잔소리 로 들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적 절한 정보를 걸러내고 분류하고 편집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 고전은 바로 그런 능력을 키워 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비판적 안목을 갖춘 창의적인 혁신가에 게는 오히려 고전이 필요하다. 현실은 고전의 재해석이며, 인간의 삶은 여전히 고전적 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오명
행복이란 무엇인가? 종교와 철학이 가리키는 행복은 오히려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인 다. 서은국은 『행복의 기원』에서 인간의 행복을 ‘생존과 번식’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조언한다.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우리가 행복 하게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 복한 삶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돈을 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적 존재로서 ‘나’의 의미를 돌아보기도 한 다.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 역사를 이해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고민하며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과 미래를 생각하는 일도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준다. 이런 고민을 해 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체로 친구와 고민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정보를 뒤적인다. 그러나 뾰족한 대책이나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가끔 산책하는 대학 캠퍼스 도서관 앞에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 이 서 있다. 그 동상 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만 매일매일 일상 에서 부딪히는 실존적 고민이다. 정답은 없지만 풀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숙제다. 문 학은 물론 사회,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고전은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오명을 얻은 지 오래다. 책을 읽지 않는 현실을 개탄할 일이 아니다. 어렵고 딱딱한 책이라서 읽지 않는 게 아니라 대부분 사 람들이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반복되는 일상에 쫓기면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 지 못하고, 개인에게 벌어진 일을 사회 현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감기에 걸 리면 당장 기침을 멎게 하거나 콧물이 흐르지 않는 약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근 본적인 원인을 찾아 체질을 개선하고 생활의 균형을 조절하는 게 아니라 대증요법에 치중한다.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 욕망을 간질이는 백화점, 가보고 싶고 먹고 싶 게 만드는 인스타그램 등에 매몰되면 삶에 문제가 생긴다.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위로를 건네 고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고 민할 시간은 마련해 준다. 무한한 욕망의 블랙홀에 빠지는 대신 개인적 고민의 근본적 인 원인을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하게 한다. 때때로 고전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 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할 때도 있다.
학생들의 직업과 진로, 어른들의 부동산과 재테크, 노인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출 산, 육아, 교육, 진학, 결혼, 건강에 관한 개인적인 일부터 정치, 경제, 노동, 산업, 복지, 국방, 외교에 이르는 사회 문제 전반에 걸쳐 인류가 축적한 지혜와 노하우는 적지 않 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근시안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증요법에 만족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 이 바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여 홀가분해질 자유다. 그 자유는 나와 너, 개인과 사회 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태도를 말한다.
‘나’와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 고전
물질적 풍요만큼 정신적 건강과 삶의 여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자존감과 당당 함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향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단편적인 지식과 새로운 정보가 치열한 경쟁 사회를 견디는 도구라면 삶의 목표와 가치를 설정하는 고전 읽기와 깊은 사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힘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트 독해 능력뿐만 아니라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책을 읽으라는 뻔한 충고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 을 읽는 안목을 기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라는 의미다. 고전은 긴 호흡으로 인간과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삶의 도구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 감각’을 꼽았다. 떠오르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정치와 현실을 돌아보며 감상적, 비이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면면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자. 고전은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전을 깊고 넓게 읽는 방법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소설뿐 아니라 철학, 역사, 사회,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 야의 고전 중에서 전문 지식이 필요하거나 배경지식이 있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 많다. 그러니 난해한 고전을 억지로 읽을 수는 없다. 학생과 교사는 물론 일반 성인도 원전 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2차 저작물로 고전 읽기를 시작하는 방법이 좋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쉽고 재밌게 설명하는 가벼운 책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고전에 대한 해설 서도 좋고 고전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을 담은 책도 좋다. 때로는 발췌독도 가능하다. 학생들은 수행평가나 소논문, 리포트 작성을 위해 관련 내용을 다룬 부분만 찾아 읽 어도 좋다. 성인들은 업무와 관련된 내용, 관심 있는 부분만 골라 읽어도 좋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그리스와 로마로 여행을 떠나듯 지도를 펼쳐 놓고 당대의 문학, 역사 고전을 연달아 읽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혼자 읽기보다 함께 읽을 수 있으면 효과가 배 가 된다. 학교나 직장에서 독서 모임 등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은 고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더 넓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연중 시행되는 다양한 독서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고전 강의 를 들으며 읽어 봐도 좋다. 고전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중 필요와 상황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꾸 준히 책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레 인접한 고전을 접하게 된다. 호기심이 생겨 자발적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 혁신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고전을 섭렵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 시대,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해도 발상의 전환, 창의적 콘텐츠의 원천은 고전이다.”
으로 독서 분야를 확장하고 고전으로 한발 나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다. 확장 독서가 시작되면 서가에 꽂힌 책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신간과 고전이 서로 손을 맞잡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순히 옛날부터 전해 온 책이 고전이 아니다. 현재까 지 살아 숨 쉬며 우리들의 가슴과 머리를 두근거리게 하는 책이 이 시대의 고전이 아 닐까. 마지막으로 권하는 방법은 ‘다시 읽기’이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이라고 한다. 먼 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책을 쓴 작가를 읽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 을 읽어야 한다. 고전도 마찬가지다. 내용만 이해하는 독서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 다 시 읽는 고전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읽은 고전을 나이 들어 읽을 때 낯선 감정을 느끼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책이 변한 게 아 니라 독자가 변한 것이다. 다시 읽기는 자신의 지식, 경험, 생각, 감정이 변했다는 사실 을 확인하며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2차 저작물, 발췌독, 확장 독 서, 함께 읽기, 독서 모임, 다시 읽기 등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든 결국 고전 읽기는 타 인과 세상을 읽고, 자기 자신을 읽는 일이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가장 새롭다는 것
1964년에 줄리엣으로 열연한 올리비아 핫세를 기억하는 어르신과 1996년에 로미오 역학을 맡은 리즈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연극, 영화, 뮤지컬, 오페라로 제작된 고전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삼국지』, 『지킬 앤 하이드』, 『80일 간의 세계 일주』, 『셜록 홈즈』는 컴퓨터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스웨덴 고급 승용차 볼보 자동차의 헤드램프는 유럽 신화의 주인공 토르의 망치를 형상화했다. 커피 브랜 드 스타벅스의 로고에는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고전 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스토리텔링으로 재해석된다. 문화 산업에 미치는 고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작가들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 혁신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고전을 섭렵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 시 대,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해도 발상의 전환, 창의적 콘텐츠의 원천은 고전이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가장 새롭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조적 재 해석은 결말을 바꾼 동화처럼 단순한 작업부터 영화, 드라마, 음악, 웹툰에 이르기까 지 OSMU(one source multi use)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고전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언제든 원하는 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고전에서 영감을 얻으려면 자기만의 해석 능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지식과 정보를 축 적하기 위해 고전을 읽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현실에 적용 가능한 자기만의 콘텐츠로 재해석하는 연습이 바로 고전을 대하는 좋은 태도다. 점점 ‘속도’가 승부를 좌우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고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다면 오히려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려울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고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교과서는 인류가 누적한 지식의 요약본 으로 고전의 편집본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실린 고전은 철 지난 유행가, 지루한 옛이 야기가 아니라 지식의 최전선에서 갖추어야 할 아이템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고,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연습이 요구 된다. 비판적 관점으로 확산적 사고를 유발하는 질문과 토론, 현재의 관점으로 고전 을 재해석하는 수업, 현실적인 문제를 고전에 적용하는 연습을 통해 학교도서관과 학 교는 고전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전진 기지 역할을 해야 한다. 수업과 고전을 연계하고, 업무에서 고전을 활용하는 일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고전의 활용은 독서가 아니라 일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도서관은 지식의 전초 기지이며 생산된 지식의 소비 시장이다. 먼지 묻은 서가 사이 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야말로 느리지만 가장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다. 고전은 책꽂이에서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지식의 ‘생산적 소비자’ 역할을 한다. 또 한 인간과 자연이 지켜 온 자리를 돌아보고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풍향계 이다.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내일을 위해 고전이 만능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변화를 꿈꾸는 나,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고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도구다.
고전이라는 장벽, 가볍게 넘나들기
키두니스트 작가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여러분은 기나긴 나선 계단을 올라가 낡은 서고에 들어 선다. 흩날리는 먼지를 털어 내고, 낡아서 바스러질 듯한 종이를 들춘다.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그 속에서 선현들의 근엄한 서사를 읽어 낸다. 지적 허영심을 연료 삼 지 않으면 한 시간도 읽기 힘든 고루한 책을 말이다. 고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으 레 떠올리는 인상이다. 그러나 고전은 오래된 낡은 서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읽기 전엔 몰랐던 고전의 재미
고전은 아무래도 펼치기 어려운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교과서에 자주 언급되어서 고 전 읽기는 은근히 공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여기저기에서 정해 놓은 ‘권장 도서’ 목록에 자주 들어 있다 보니 괜스레 무겁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만의 편견은 아닌 듯하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의 작가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도 “고전은 누구나 읽고 싶어 하고 또 아무도 읽고 싶 어 하지 않는 책”이라고 했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전은 ‘읽기는 해야겠는데, 읽 기 싫은 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고전은 지루하고 따분한 책일까?
우리 집 거실 책장에는 오래도록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셜록 홈즈』 전집이 자 리하고 있었다. 본래 활자를 좋아하던 우리 가족은 종종 식사 자리에서 홈즈 이야기 로 웃음꽃을 피웠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홈즈 전집을 펼쳐 보지 않았다. 책을 좋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명한 책에 반감이 있기도 했고, 실제로 읽으면 썩 재밌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홈즈 시리즈에 도전한 것은 중학생 때였 다. 처음에는 한번 보기나 하자는 심산이었다. 주변에서 자주 거론되는 책이니 “나도 『셜록 홈즈』를 완역으로 읽어 봤다”라고 말해 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읽기 전의 떨떠름함과는 달리 멈출 줄을 몰랐다. 순식간에 ‘주홍색 연구 편’을 다 읽었고 ‘네 사람의 서명 편’을 읽기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온갖 단편집을 다 찾아 읽게 되었다. 한창 빠져들 때는 학교에서 단체로 벌을 설 때마저 몰래 책을 읽을 정도였다.
고전을 직접 접하니, 읽기 전에 예상한 것과 확연히 달랐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캐릭터들은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었고 여기에 더해 유쾌하고 풍부한 스토리를 지니 고 있었다. 더구나 그 배경이 되는 19세기 영국의 시대적 매력을 생생히 뽐내고 있었 다. 맛깔스러운 번역은 작품의 매력을 한층 더 북돋아 내가 소위 ‘셜로키언(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덤)’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고등학생 때 영어 번역 숙제를 할 때는 일부러 황금가지 버전 홈즈의 말투로 번역을 달았으며, 홈즈의 친구인 왓슨 박사가 수시로 병자에게 권하는 브랜디의 맛을 궁금해하곤 했다.
또래 아이들은 모르는 다양한 상식도 얻었다. 책에서 읽은 내용뿐 아니라 일련의 ‘덕질’을 통해 19세기 영국에서는 신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걸 알게 되었 고 당시에는 교육받은 여자가 으레 가정교사나 타자수로 생계를 꾸렸음을 알게 되었 다. 인도계 하인이 백인 주인을 ‘사힙’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당시에는 흑인 혼혈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엄청난 결심을 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흉흉한 사건의 이면에는 언제나 인간적인 드라마가 있음을 발견하고 삶이 그리 단순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어렵 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다양한 추리소설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항성 같은 책’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
‘독서’가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을 채우고자 적당히 쓰는 단어로 전락한 오늘날이지만, 진심으로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대개 활자가 주는 신뢰감과 자유 로움을 좋아하는 이들이다. 활자로 가득한 책은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을 허락한다. 제한된 그래픽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몽상 속에서 그 책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나 만화에는 없는 자유이며 또 다른 즐거움이다.
훌륭한 고전 작품은 마치 마법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온갖 콘텐츠가 2, 3년만 지나도 잊히는 마당에 몇 백 년을 살아남아 꾸준히 읽힌 작품들이 그저 학술적 가치 만 있을까? 혹은 창의적인 도식을 처음 정립했다는 가치만 있을까? 전자는 애초부터 철학적 담론을 위해 나온 작품일 경우라면 부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전으로 살아 남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세상에 나온 당시부터 독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인정받았 고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오 헨리의 단편들은 깊은 사유와 발랄한 휴머니즘으로 오 래도록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코난 도일의 소설들은 긴 세월 동안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다.
고전을 탐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앞선 독자들에 의해 검증된 작품이기 때 문에 재미를 보장할 수 있다. 작품이 쓰인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식을 자연스레 습득 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누군가는 고전은 케케묵은 클리셰지만, 최신 작품들은 클리 셰 비틀기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는 이유로 현대 작품을 더 고평가할지도 모르겠 다. 그러나 클리셰 뒤집기마저 새로운 클리셰가 되어 버린 이 시대에 더이상 창의성은 작품의 질을 크게 좌우하지 않는다. 고전은 탄탄하고 아름답게 짜인 문장으로 개연 성을 챙기고, 독자의 꿈속까지 찾아올 수 있는 매력 넘치는 개성적 인물들을 그려 낸 다. 많은 독자들이 2020년대에도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보며 시드니 칼 튼을 위해 가슴 아파하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보며 달타냥, 아토스, 포르 토스, 아라미스와 함께 유쾌하게 웃는다.
오늘날 고전으로 기억되는 책들은 이렇듯 보석 같은 덕목을 지님으로써 살아남았 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의 모든 책을 항성 같은 책, 행성 같은 책, 유성 같은 책으로 구 분했다. 고전은 바로 항성 같은 책이나 적어도 행성 같은 책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취향을 발견하는 고전 여행을 위한 레시피
첫째, 좌우지간 일단 펼쳐 보자
내가 『셜록 홈즈』를 처음 읽을 때처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입견에 휩싸여 겨우겨우 고전을 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책을 펼치면 그 다음은 자신의 의지와 상 관없이 독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책의 내용이 취향과 꽤 맞는다면 이러한 경험은 크나큰 즐거움으로 남는다. 만약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다른 고전을 찾아 읽으면 그 만이다. 취향과 잘 맞는 고전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케케묵은 고전에서 서사적 재미 를 느끼고 인물의 정서에 공감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작가가 살아간 시대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역사 속 상식을 얻어간다. 가장 좋은 점은 이 모든 것이 독서 여행이라는 거대한 여정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자
일단 펼쳐 든 책이 마음에 든 독자는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다.
『셜록 홈즈』를 읽고 마음에 들었다면 코난 도일의 다른 작품 『잃어버린 세계』와 『안개
의 땅』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리고 코난 도일에 대해 검색하고 그의 사진을 찾아본다.
그리하여 한 작가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면 그의 작품에 더 심취하게 되고 그 세계
를 깊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혹은 비슷한 장르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을 수
도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탐정, 뒤팽의 흔적을 찾고자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 시리즈를 찾아 읽는 것이 그 예이다. 혹은 홈즈와 달리 독자에게 더
많은 설명을 제공하는 추리물을 찾아서 엘러리 퀸 시리즈를 찾아 읽는 방법도 있다.
셋째, 시차를 두고 반복해서 읽자
책 속의 책을 따라가는 방법도 있다. 맨 처음 읽은 책 속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찾아 읽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는 주인공의 선배가 피츠제럴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걸 읽고서 독자는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그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를 찾아 읽을 수 있다. 만약 올더스 헉슬리 의 『멋진 신세계』를 읽는다면 야만인 존이 폐허 속에서 찾아낸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 고 『템페스트』의 구절을 인용하고 『오셀로』를 언급하는 걸 보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을 찾아 읽을 수도 있다. 혹은 맨 처음 읽은 책이 너무나 좋아서 그 책을 한 번 더 읽 을 수도 있다. 같은 작품을 시차를 두고 반복해서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넷째, 여행과 접목하자
요즘처럼 여행이 쉽지 않은 시대에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여행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이럴 때 관심 있는 나라와 그 나라의 작가들을 찾아보고 그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도 좋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미리 이해하고 실제로 여행을 할 때 작가 또는 작품과 인연 있는 장소를 찾아가 보는 것도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영국을 여행할 때 셜록 홈즈 박물관과 해리포터 스튜디오 를 찾아가 보았는데 내가 읽은 작품 속에 직접 들어가 보는 것처럼 멋진 체험이었다.
모든 장르가 깃든 이야기의 세계로
흔히 고전문학이라고 불리는 책에는 로맨스, SF, 판타지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 르가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언제든 가장 끌리는 장르에서 고전 독서를 시작 할 수 있다. 그리고 읽다 보면 자신이 어떤 문체, 어떤 서사를 좋아하는지 더욱 잘 알 게 되어 보다 구체적인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 낡은 활자 속을 여행하다가도 때로는 한 번쯤 고개를 들어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울고 웃었으며 고통 받기도, 혹은 사랑 하기도 했었음을 가슴에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 서점 혹은 도서관에 들 러서 가벼운 마음으로 세계문학전집 코너를 둘러보면 어떨까. 뜻밖의 책이 여러분을 고전의 세계로 향하는 첫걸음을 딛게 할 수 있으니까.
세계 명작,
젠더의 눈으로 새롭게 읽다
정수임 작가, 국어교사
어딘가 수상한 ‘그 시절’의 이야기
아이가 태어났다. 삶이 달라졌다. 삶이 달라지자 들리는 소리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흘려들었던 소리들이 귀에 쏙쏙 박히고 입에 찰싹 붙었다. 그렇게 내뱉은 나의 첫소리 는 ‘뽀롱뽀롱뽀롱’과 ‘크롱크롱’이었다. 아이가 크면서 뽀로로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출동! 원더 펫!”이라든가 “로보카 폴리! 우리의 친구!”, “번개맨!”을 외 쳤다. 내 주변의 비슷한 처지 중에는 “치링치링 치리링”과 같은 소리를 영접한 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이런 소리들과도 이별했으며 가끔 <캐리와 친구들>이나 <핑크퐁>을 볼 때면 ‘세상 달라졌다.’거나 ‘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며 추억을 곱씹어야 될 만큼 나 이가 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뽀로로, 폴리, 또봇과 지금도 애정하는 도라에몽에겐 고 마운 마음이 있다.
고마운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모두 좋았다는 건 아니다. 아 들만 둘 있는 나로서는 늘 세상을 구해야 하는 남자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위대해 보 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른은 나쁘고 아이들은 영웅이 되는 구조의 이야기들도 마 음에 들지 않았다. 힘겨운 세상은 일부 영웅이 아니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구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이야기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 다. 나의 세계는 나를 둘러싼 두 아들의 세상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남자 어린이 영웅과 함께 나오는 여자아이들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루피, 애니메이션 <또봇>의 딩요. 로보카 폴리의 엠버, 파워레인 저의 써니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는 왜 없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홍일점처럼 나오 는 여자 어린이들이 한결같이 똑똑하고 이야기 속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 를 해도 결국 남자아이들이 영웅이 되는 것에 관심을 준 적도 없었다. 또 컴퓨터나 장 비를 능숙하게 다루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마법 봉을 흔들어 변신하며 비정상적인 몸 매를 드러내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지도 못했다. 만약 딸이 있었다 하 더라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카드를 함께 사서 모으고 마트 게임기 앞에 같이 줄을 섰을 것 같다.
말해 보자, 불편했거나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
이쯤 되면 고전을 색다르게 읽는 법이 삼천포로 갔는가 싶겠지만 그렇지는 않으니 안 심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아이들의 넋을 빼어 텔레비전 앞에 앉혀 준 그 이야기들은 사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이야기와 차이가 없다. 왕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혹은 왕자가 세상을(공주를) 구하는 이야기, 또 마법의 힘이 필요한 여성들(『백설공주』, 『신데 렐라』, 『심청전』, 『콩쥐팥쥐』 등)의 이야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인물도, 시대도, 배경도 바 뀌었지만 여전히 성별과 역할의 문제에 질문을 품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이런 의 문이 괜한 시비와 예민함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너도 몰랐다며?’, ‘그래서 뭐 어쩌 라는 거야!’와 같은 질문인지 시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도 들리는 듯하다. 하지 만 뭘 어쩌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뭘 어떻게 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문제고, 혹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떠하겠냐고 넌지시 권해 볼 뿐이다. 아이의 일 분 후를 예측하기 어렵고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가만히 있게 만 드는 일은 더욱 어려운 것이 육아이다. 내용이 무엇이든 내 아이를 움직이지 않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 이야기, 구체적으로는 그 영상들은 어떤 육아템보다 더 필수적인 것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이가 점점 크고 나서, 가끔은 덩그러니 혼자 남아 아이가 틀어 놓은 텔레비전을 볼 때 비로소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을 뿐이 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밟힐 때가 종종 있다. 불편하다고 여기 지 못했거나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고전 속 여성들은 ‘떠나고 싶었을 때’ 떠났을까?
고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쉴드’를 가진 경우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특히 ‘대에서
선정한’, ‘청소년을 위한’, ‘어린이를 위한’과 같은 수식이 붙은 고전은 앞에서 언급한
어린이 프로그램의 ‘전체 관람가’와 같은 거라 할 만하다. 이 등급이야말로 고개를 갸
웃거리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투니버스, 애니 채널, KBS, EBS 채널을 켜게 만든다. 부
모나 교사가 망설이지 않고 자신조차 읽지 않은 책을 아이나 학생에게 건네줄 수 있
는 것은 그 책들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이 모두 좋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고전이라 불리는 이야기들은 많은 시간을 견뎌 왔고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
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고 심오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라든가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가치라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읽고 나서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전쟁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윈스턴이 폭력의 일 상화에 몸서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스마트폰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죽어!” 혹 은 “죽여!”를 외치는 슈팅 게임에 접속할 수 있고 상대를 죽이며 순위를 정하고 보상 을 받을 수 있다. 좌표를 찍고 날아가 미지의 상대에게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고 물 약으로 체력을 충전하는 ‘포트나이트’의 세계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젤다의 전설, 브롤스타즈, 클래스로얄 등등 정도는 달라도 상대를 죽여 야 내가 사는 게 게임이다. 1984년을 훌쩍 지나 태어난, 폭력과 전쟁이 일상의 놀이터 가 된 아이들에게 윈스턴이 느꼈을 공포나 절망을 전하려면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역시 당시에는 충격적이고 문제적인 작품이었을지 모르나 요즘은 남의 일에 관심 없고 관심 받는 것조차 버거운 개인적인 인물이 보통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다소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작품 속 ‘뫼르소’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다른 이들의 삶을 침해하지도 않지만 침해 받는 것 역시 거부하는 이들이 낯설지 않다면 고전의 가치와 의미 또한 시대에 따라 불변하 지 않는다고 말하긴 어렵다.
젠더의 관점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처 해 있는 상황과 처지가 다르다. 저마다의 경험도 다르다.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 고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크기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젠더 관점으로 보기는 대체로 당연하다 여겨지는 일들에 대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되는 탓에 쉽게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 진 웹스터가 1912 년에 발표한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소설에서 도움을 받는 어린 소녀와 이를 후원하 는 능력 있는 후원자가 남성(같은 방 친구인 줄리아의 삼촌, 저비스)인 것은 당연한 구조 일 수 있다. 그보다 앞선 1868년에 루이자 메이 올컷이 발표한 『작은 아씨들』 역시 ‘도 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가난한 자매들을 돌보는 능력 있는 남성 로이가 당연 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말이다. 여성이 돌봄의 대상이 되고 남성이 돌봄의 주체가 되는 구조의 이야기는 이것 말고도 많다. 『오만과 편견』, 『롤리타』, 『보바리 부인』, 『제인에 어』1), 『테스』, 『주홍글씨』 등 줄줄이 소환되는 고전 속에서 여성은 돌봄의 대상이다. 누군가가 돌봐 주어야 하는 존재들로 언급되고 결혼이나 남자의 재력에 눈이 멀어 있 거나 성적 대상이 된다. 물론 몇몇 작품들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던 이야기나 고전으로 ‘쉴드’를 친 이야기에서 성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차별과 편견의 폭이 좀처럼 줄지 않는 까닭은 ‘왜?’라는 질문의 부재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젠더의 관점으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보는 일이다.”
해 애쓰고 노력한다. 테스처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하거나 제인 에어처럼 현실 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애를 쓰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고 저항은 불순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 남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남성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모험을 떠나거나 꿈을 찾아 헤매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한다. 『모비딕』, 『노인과 바다』, 『데 미안』, 『돈키호테』, 『보물섬』, 『달과 6펜스』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의 보살핌 이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온다.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1) 1847년 샬롯 브론테가 커러 벨이라 는 남성 필명으로 발 표한 작품이다. 전형 적인 로맨스 소설이 지만 독립적인 여성 의 등장은 사회적 논쟁이 되었다.
그땐 그랬으나 지금은 다르게 읽어야 할 때
조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던 이야기나 고전으로 ‘쉴드’ 를 친 이야기에서 성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차별과 편견의 폭이 좀처럼 줄지 않는 까닭은 ‘왜?’라는 질문의 부재와 관련있다고 생 각한다. 젠더의 관점으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보는 일이다. 세상이 달라졌다면 고전이라 불리는 이야기는 이해가 어려운 게 정상이다(그러니까 책 을 읽고 이해가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말기를!). 어려운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곱씹다 보면 자연스럽게 젠더를 포함한 다양한 질문 이 생긴다. 바로 이런 질문을 품어 보는 일이 고전을 다르게 읽는 방법이라면 방법이 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에 답을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시대를 이해하고 달라져야 할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그땐 그랬으니, 그런 시대’였다는 설명 대신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관성에 따라 살아 온 삶이 문제를 발견 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계속 시도해 보면 점점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85년에 출판된, 우주를 모험하는 여성 서사
또 다른 방법은 당연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이다. 최근 나는 과학소설, 흔 히 SF라 불리는 장르문학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편이다. 그동안 몰랐는데 과학소 설이야말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이유로 현재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현실 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다양한 세상을 그려 보게 한다. 금기된 것들에 대한 상상이 허 락된 공간은 그동안 없었던 혹은 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2)의 소설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3)도 그렇 다. 이 소설의 주인공 코아티 캐스는 열다섯 살 생일에 우주선을 선물 받는다. 우주선 조정에 뛰어나고, 우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주인공은 작정하고 금지된 항로를 항해 길을 나선다. 오랜 준비 끝에 시작된 탐험이었다. 코타 1호라 스스로 이름 붙인 이 우 주선의 조종사 코아티는 미지의 노란 항성들을 짚으며 또 때마침 실종된 항해사 보니 와 코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으로 항로를 결정한다. 그리고 정말 보니와 코 의 흔적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민들레 씨앗처럼 통신통에 붙은 외계 소녀 실료빈을 만난다. 코아티의 뇌 속에 자리 잡은 실료빈과 코아티의 동거 아닌 동거는 우정에서 재난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적 재난 직전 이 두 여성의 결정은 우주와 우주 속 생명체들 모두 구하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고 재난을 다룬 영화들에서 멋지게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은 왜 그려지지 않는지 의문이 든 독 자들은 이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멋지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로, 정말로, 마침내, 나는 길을 나섰다.”
다음 문장은 코타 1호의 출발 직전 코아티의 생각인데 우주든 어디든 외부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떠나 길을 나서는 일부터 출발함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 이다. 또 소설의 제목인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이 어쩌면 거창하지 않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마지막, 멋진’ 이라는 말 때문에 특별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면 실망할지 도 모른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한 걸음이 세상을 구한 걸음이었다면 그것은 정말 멋 진 마지막 한 걸음이라 할 만하다.
2) ‘제임스 팁트리 주 니어’의 본명은 앨리 스 브래들리 셸던으 로 군대나 CIA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은 경험 탓에 ‘여성 SF작가’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싶지 않아 필명을 남 자처럼 보이게 만들 었다고 한다.
3) 1986년 로커스상 수상, 1986년 SF클 로클상 수상, 1988 년 일본 성운상 수장, 1986년 휴고상 노미 네이트, 1986년 네 뷸러상에 노미네이트 된 소설.
맛보기로 소개한 특집 외 다양한 이야기는 2021 <학교도서관저널> 12월호에 수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