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여행! 세상은 열린 도서관이 되다] 서후리 가는 길 - 오규원 시인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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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25 14:34 조회 7,031회 댓글 0건본문
안성호 소설가
서울에서 팔당역을 지나 양평 서후리로 가는 길. 이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북한강을 끼고 2차선 좁은 길을 달려야 하고, 워낙 갈림길이 많아서 한번 길을 놓치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특히 우중(雨中)에는 물안개에 길이 묻혀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 곳.
내가 이 길을 자주 왕래한 건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을 뵙기 위해서였다. 시인은 그때 폐기종(肺氣腫)이라는 병을 얻어 서후리에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서후리까지 가는 길은 볼거리가 많아서 길에서 자주 멈춰 쉬곤 했다. 팔당댐 길옆에 연인들이 써 놓은 낙서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실학박물관을 허적허적 걸어 다니기도 했으며, 다산 정약용유적지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또 길가에 공터가 제법 많아 차를 세워두고 책을 보곤 했다. 그때 즐겨 읽었던 책이 허균의 산문집 『누추한 내방』이었다.
왜 하필 『누추한 내방』일까, 전라북도 부안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허균과 양평이 무슨 관련이 있나 싶겠지만 이 책에는 강릉도 나오고, 한양도 나오고, 철원도 나오는 터라 굳이 장소를 따지지 않더라도 허허한 강물을 보며 읽기 좋았다. 특히 양평 352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다리 오른쪽에 두물머리가 나왔는데 강변에 축 늘어진 버들가지에 눈을 씻고 허균의 산문을 읽으면 만정이 다 돋았다.
『누추한 내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꼭지는 「책을 돌려주십시오」와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노라」이다. 한강 정구는 허균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책을 돌려달라는 허균의 말본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책을 돌려주십시오”라는 문자를 받는 일이 생겼다. 문학도였던 내가 오규원 시인이 살던 서후리 집에서 당신이 쓴 초판 시집 『분명한 사건』을 빌리고는 돌려 드리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난 사단이었다. 오규원 시인이 책을 돌려달라고 독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길이 먼 데다 험해서 낮에 월차를 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보름 정도 시간이 흘렀고, 당신의 초판 시집을 돌려달라는 문자를 조석으로 수십 번 더 받고서야 겨우 『분명한 사건』을 돌려드렸다. 시집을 돌려받은 노 시인의 눈가가 촉촉했다. 병색이 완연한 당신에게 그 시집은 지고 갈 수는 없지만 잃어버릴 수 없는, 묘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양평 서후리로 가지 않았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도저히 얼굴을 뵐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규원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이태 만에 서후리를 다시 찾아갔다. 오규원 시인이 여러 날 몸소 사다가 심은 나무들은 죄다 죽고 키 큰 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는 더 자주 그곳으로 갔다. 352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여전히 강을 끼고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많았다. 4대강사업으로 두물머리가 쓸려나가서 그렇지 흐르는 강물과 바람은 달라진 게 없었다. 서종면사무소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도 보였다. 거기서 더 위로 가면 강릉에서 유명세를 떨친 테라로사 커피숍이 최근 문을 열기도 했다.
책을 빨리 돌려드렸다면 후련하게 다시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길이었다. 책을 돌려드리지 못해 생긴 마음의 짐이 몸에 쌓이고 쌓여 몇 십 킬로미터의 계단이 된 것 마냥 오르고 달리기를 반복하는 길, 서울에서 팔당역을 지나 양평 서후리로 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팔당역을 지나 양평 서후리로 가는 길. 이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북한강을 끼고 2차선 좁은 길을 달려야 하고, 워낙 갈림길이 많아서 한번 길을 놓치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특히 우중(雨中)에는 물안개에 길이 묻혀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 곳.
내가 이 길을 자주 왕래한 건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을 뵙기 위해서였다. 시인은 그때 폐기종(肺氣腫)이라는 병을 얻어 서후리에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서후리까지 가는 길은 볼거리가 많아서 길에서 자주 멈춰 쉬곤 했다. 팔당댐 길옆에 연인들이 써 놓은 낙서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실학박물관을 허적허적 걸어 다니기도 했으며, 다산 정약용유적지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또 길가에 공터가 제법 많아 차를 세워두고 책을 보곤 했다. 그때 즐겨 읽었던 책이 허균의 산문집 『누추한 내방』이었다.
왜 하필 『누추한 내방』일까, 전라북도 부안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허균과 양평이 무슨 관련이 있나 싶겠지만 이 책에는 강릉도 나오고, 한양도 나오고, 철원도 나오는 터라 굳이 장소를 따지지 않더라도 허허한 강물을 보며 읽기 좋았다. 특히 양평 352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다리 오른쪽에 두물머리가 나왔는데 강변에 축 늘어진 버들가지에 눈을 씻고 허균의 산문을 읽으면 만정이 다 돋았다.
『누추한 내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꼭지는 「책을 돌려주십시오」와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노라」이다. 한강 정구는 허균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책을 돌려달라는 허균의 말본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책을 돌려주십시오”라는 문자를 받는 일이 생겼다. 문학도였던 내가 오규원 시인이 살던 서후리 집에서 당신이 쓴 초판 시집 『분명한 사건』을 빌리고는 돌려 드리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난 사단이었다. 오규원 시인이 책을 돌려달라고 독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길이 먼 데다 험해서 낮에 월차를 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보름 정도 시간이 흘렀고, 당신의 초판 시집을 돌려달라는 문자를 조석으로 수십 번 더 받고서야 겨우 『분명한 사건』을 돌려드렸다. 시집을 돌려받은 노 시인의 눈가가 촉촉했다. 병색이 완연한 당신에게 그 시집은 지고 갈 수는 없지만 잃어버릴 수 없는, 묘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양평 서후리로 가지 않았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도저히 얼굴을 뵐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규원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이태 만에 서후리를 다시 찾아갔다. 오규원 시인이 여러 날 몸소 사다가 심은 나무들은 죄다 죽고 키 큰 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는 더 자주 그곳으로 갔다. 352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여전히 강을 끼고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많았다. 4대강사업으로 두물머리가 쓸려나가서 그렇지 흐르는 강물과 바람은 달라진 게 없었다. 서종면사무소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도 보였다. 거기서 더 위로 가면 강릉에서 유명세를 떨친 테라로사 커피숍이 최근 문을 열기도 했다.
책을 빨리 돌려드렸다면 후련하게 다시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길이었다. 책을 돌려드리지 못해 생긴 마음의 짐이 몸에 쌓이고 쌓여 몇 십 킬로미터의 계단이 된 것 마냥 오르고 달리기를 반복하는 길, 서울에서 팔당역을 지나 양평 서후리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