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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5-02 10:34 조회 1,65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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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탈고용 사회,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


이충한 『비노동사회를 사는 청년, 니트』 저자, 하자센터 기획부장



나에게는 세 가지 정체성이 있다. 명함에 적힌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미래진로센터) 기획부장’이 첫 번째 정체성이라면, 두 번째는 9년 전부터 갖게 된 ‘다인이 아빠’라는 정체성이다. 세 번째는 가장 오래된 정체성이지만 딸이 세상에 나온 뒤 많이 희미해진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미래진로센터 기획부장은 일의 영역, 아빠는 삶(생활)의 영역, 음악가는 예술 또는 여가활동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일과 육아, 예술이나 여가활동은 서로 엮여 있으며, 개념적·실재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

지나친 일의 부담이 삶을 짓누르는 과로사회 속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갈망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전쟁 같은 현재가 아니라 조금만 먼 미래를 바라본다면 해법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음 세대 청소년들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보려 한다.



구태의연한 노동관념에서 탈피하기


단어 사이의 관계에 쓸데없이 예민한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조금 어리둥절해진다. 일과 삶은 대립이 아니라 포함하는 관계인데 어떻게 둘 사이를 저울질할 수가 있지? ‘노동과 여가의 균형’ 정도라면 모를까.

물론 이는 사람들이 노동을 삶의 일부가 아닌 절반 이상으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근현대사회에서 일은 생존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도 잘살 수는 있지만 일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 사회가 지원해 주는 것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앞으로도 ‘일’이라는 녀석이 그 중요성을 지킬 수 있을까?

(...) 여기저기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라는 결의에 찬 반응들을 마주하게 된다. 세 번째는 청년 무직자 또는 구직단념자로 불리는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다. 

통계마다 기준이 달라 그 숫자가 50만 명부터 180만 명까지 큰 차이가 있을 만큼 체계적인 정책 대상이 되지 못했던 청년 니트가 요즘 점점 주목을 받고 있다. 당연히 문제가 너무 심각해져서다. 여기에는 구직에 어려움을 겪다가 포기한 청년 니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내에서만 일하고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화제가 되면서 ‘제발 취직 좀 시켜 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고정관념에만 기반해 온 청년 고용·노동 담론은 아주 복잡한 지형으로 변모하고 있다. (...)



탈고용·비노동 사회의 도래

    
좋건 싫건, 아직도 기성세대는 일에 너무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일을 통해서 재미와 뿌듯함도 느끼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도 쌓고, 의미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오히려 일에서 좋은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청년들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취업이든 승진이든 어차피 인정받을 수 없고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일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뿐이니 말이다.
이런 분위기가 청소년들에게 퍼지면 이들은 아주 쿨한 태도로 변한다.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처럼 말하자면 ‘어느 새부터 일하는 건 안 멋져∼’ 같은 톤이랄까. 일례로 요즘 중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뜸 “돈 많은 백수요!”라는 대답이 나온다. 앞뒤 계산하지 않고 나온 솔직한 대답이다.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중학생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노동소득이 금융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확산 가능한 노동만이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세대들이 물질·시간 기반 노동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고용된 노동을 통해서 사회의 자원을 분배하는 시스템을 ‘고용사회’라고 부른다. 지금 한국 사회의 30∼50대들에게 익숙한 고용사회는 부모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서 핵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회다. 이런 고용사회가 가능한 조건은 당연하게도 광범위한 고용이다. 그런데 어떤 미래학자나 경제학자도 20년 후에 더 많은 고용이 가능해질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세계 석학들은 『초예측』(유발 하라리 외)에서 미래사회의 가장 큰 위협요인으로 자동화와 ‘격차의 가속화’로 인한 ‘무용계급화’를 꼽는다. 가난해지는 것을 넘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 무서운 표현이다.
이러한 고용 축소 경향,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일자리 소멸’ 현상은 사실 미래의 일도 최근의 일도 아니다. IT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인공지능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오랫동안 전 세계는 ‘비물질 노동’에 기반한 경제로 전환되어 왔다. 물질로 이루어진 상품을 생산할 때는 설비, 원료,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하지만, 영상 콘텐츠처럼 비물질 상품을 만드는 데는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 즉 ‘한계비용’이 점점 제로에 가까워진다.1) 노동자가 점점 필요 없어진다는 얘기다. 더욱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콘텐츠산업과 같은 일상생활 속 비물질 상품의 비중과 물질 상품이 온라인 유통 플랫폼을 경유하는 빈도가 급증했다. 앞으로 오프라인에서 단기적인 보복 소비가 일어날 수는 있어도 비물질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장기적인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1) 『한계비용 제로 사회』, 제러미 리프킨 지음, 민음사, 2014. 



전환 역량을 기르는 시공간의 조건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낙관론자들은 새로운 개념의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도 문제가 있다. 새롭게 코딩을 짜면 되는 로봇이 아닌 이상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40∼50대 이상 장년층에게 갑자기 새로운 개념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현재의 일과 소통 방식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청년들이 새로운 영역의 일자리라고 해서 갑자기 선망하고 몰입하게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환의 시대에 청소년들은 어떻게 진로를 설계해야 할까? 『사피엔스』의 저자이기도 한 유발 하라리는 미국 잡지 <Wired>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불확정성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적 적응력과 감정적 균형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하자센터에서는 이를 ‘전환 역량’이라고 부른다. 전환 역량은 주변 환경과 소통하며 맥락을 파악하고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결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기본적인 사회적 능력이지만 한국의 교육시스템에서 얻기 어려운 역량이다. 기존의 교육 개념 중에서는 융통성 있게 문제를 극복하고 대처하며 삶의 목적에 따라 삶을 설계하는 기술인 ‘진로 탄력성’과 비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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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가치를 통합한다는 것

    
지금 한국 사회는 미래를 바라보며 일과 삶의 방향성을 재점검하고 전환해야 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런데 현재의 위치만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모두가 모두를 향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건 아닐까? 일과 삶의 화해는 두 가지 대립적인 요소 간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으로는 성사되기 어렵다. 그보단 일과 삶의 가치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는 일의 무게를 줄이려는 게 아니라 삶의 행복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니 말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이야기하자면 탈고용·비노동 사회의 도래를 앞둔 우리는 존재의 가치가 ‘노동’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일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가오는 탈고용·비노동 사회에서 우리 모두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학교도서관에서 미래세대 청소년들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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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저임금 노동자를

대체할 거라는 착각

시민적 윤리가 교육목표가 돼야 하는 이유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AI 기술의 발전과 챗GPT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공포가 팽배하다. 사람들은 공부를 못하면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기술이 발전하면 저숙련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 믿었다. 정부는 기술 혁신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교육대책을 발표한다. 변화하는 산업에 발맞춰 코딩 등 직무교육을 강화하거나, 기계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을 하겠다고 한다. 물론, 기술발전과 무관하게 고용과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차지하는 게 가장 유력한 대안처럼 보인다. 성적 향상은 언제나 중요한 교육의 목표다. 그러나 그 어떤 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기술 발전 때문이 아니다.



근면 성실함이 담보됐던 시대는 종료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노동력 재생산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의무교육이 도입되기 이전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 산업현장에 던져졌고, 목숨을 잃거나 숙련도가 낮아 노동력 재생산에 위협이 됐다. 현재의 노동자가 일터로 나가는 동안 미래의 노동자를 양육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고 종소리에 따라 중간중간 휴식과 식사를 해결하면서 글과 셈을 익히는 일은 양질의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근면 성실한 학생에 대한 요구는 근면 성실한 노동자를 바라는 사장님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 학교생활을 잘한다는 건 성실하다는 뜻이었고,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실’이라는 덕목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유효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만든 산업 주력은 ‘제조업’이었다. 제조업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기계와 기술 발전을 이루었고, 양질의 물건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노동생산성을 높였다. 노동생산성을 높이면 물건의 개별 단가를 낮출 수 있었고,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충분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구입할 수 있었다. 물건이 판매가 잘되면 이윤을 얻은 기업이 다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 소비 여력을 높이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소수의 실업자들에게는 국가의 잔여적 복지를 제공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1950∼1960년대, 일본에서는 1970∼1980년대, 아시아에서는 1980년대에 매우 짧은 시기 동안 일어난 호황이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의 중장년층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제조업은 여러 나라에 추억을 남기며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고 제조업이 떠난 자리에는 일자리 문제가 남았다. 인류에게 필요한 상품 생산은 충분해 보였고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지를 걱정해야 할 때가 왔다. 경제와 환경을 위협하는 복합 위기가 우리 앞에 놓였다. 제조업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 자본은 제조업 투자 대신 돈이 돈을 낳는 금융업으로 옮겨갔고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금융적 지대수익을 올리는 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실업자들은 대부분 서비스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서비스 일자리는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한 사람의 알바 노동자를 아무리 쥐어짜 보았자 1시간에 1000명의 손님을 응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키오스크가 생산성이 높은 기계도 아니다. 키오스크를 다루는 소비자가 기계를 매일 다루는 숙련노동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손님의 변덕스러운 동선과 마음을 자영업자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비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을 낮춰서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게 만들기도 어렵다. 근면 성실함이 일자리를 보장하는 시대는 종료됐다.



'실업자'의 노동을 갉아먹고 큰 서비스 산업


서비스 산업이 인간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노동생산성을 높일 방법도 마땅히 없다면, 저렴하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임금을 동결시키거나 노동력을 잘게 쪼개서 필요할 때만 파트타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명예퇴직, 희망퇴직 명목으로 쫓겨나거나 정규직 일자리에 진입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영업으로 몰리게 됐다. 이들 대부분은 음식점, 편의점, 카페 사장님이 됐다. 즉 서비스 산업을 떠받치는 동네 사장님 역시 정규직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 자영업을 하지 않았다면 실업자가 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규모가 경제활동인구 2500만 명 중, 500만 명 정도 된다. 사장 아닌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알바 노동자들은 사장님의 경쟁력을 위해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거나, 주휴수당을 떼이거나 연차, 퇴직금을 포기하게 된다. 똑똑한 알바 노동자가 노동법으로 반격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면 사장님들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맞선다. 알바 노동자가 최저임금을 받거나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동법에 대한 지식과는 무관한 일이다. (...)
이 모든 경쟁 속에서 한 발 빠져 순순한 지대적 수익을 걷어 가는 이가 있으니 바로 건물주다. 개별 가게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만 존재한다면 건물주는 고정적인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생산한 사회적 부를 누가 독점적으로 차지하는가’라는 권력의 문제다.


극단적으로 유연화된 노동, 플랫폼 노동


노동자를 최저가로 필요한 시간에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사장님의 욕망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상품에 대한 수요가 언제나 변함없을 수 없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적을 때는 노동력 공급도 줄이고 싶은 법이다. 실제 그렇게 공장이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봄과 여름에 수요가 많은 에어컨 공장에서는 봄과 여름에만 노동자를 연장 야근, 휴일 근로시키고, 수요가 적은 겨울에는 해고하고 싶은 법이다. 이를 경영학에서는 수량적 유연화라고 불렀고, 우리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기간제 비정규직에 대한 자본의 수요는 서비스 산업에서는 주 단위로 노동자를 쓰고 버리고 싶은 욕구로 발전한다. 손님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에는 알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늘리고, 손님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에는 알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4.5시간으로 줄여 주휴수당조차 주지 않으면 된다. 해고와 채용 없이도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노동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69시간 근무제 논란은 수량적 유연화에 대한 자본의 순수한 욕망의 표현이자 정치적 공세일 뿐이다. 이미 69시간이 아니더라도 노동시간은 극단적으로 유연화되어 있다. 노동시간이 유연화되면 일자리가 많을 필요가 없다. 바쁠 때는 추가적 고용을 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오래 일 시키고, 한가할 때는 내보내면 된다. (...)
우리는 혁신의 이름으로 나타난 플랫폼 산업과 플랫폼 노동자를 현실에서 노동법 없던 야만적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된다. 청소년들은 1000만 원 정도 들어가는 오토바이 값과 보험료를 감당하지 못해 오토바이를 빌려 사용하는데, 하루 대여료가 3∼4만 원에 육박한다. 월 120만 원 정도로, 청소년들은 ‘-120만 원’을 머리 위에 띄우고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일은 못하는데 렌트비는 계속 내야 해서 큰 빚을 지게 된다. 기술 발전도, 개인의 노력도, 지식도 이 극단적인 노동구조를 넘을 수 없다.


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AI와 기술의 발달로, 배달과 같은 저숙련 노동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커다란 착각이다. 로봇과 AI가 잘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일이 인간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대체할 인간 로봇은 만들 필요가 없는데, 이미 인간 노동자야말로 최고의 로봇이기 때문이다. AI가 대체하기 쉬운 일은 오히려 데이터를 확보하여 알고리즘을 만들기 편한 관리직이다. 배민, 쿠팡이츠, 요기요처럼 AI로 배차와 배달료를 결정하는 회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존재는 배달 노동자를 관리하는 관리자들이었다. 디자인, 편집, 번역은 물론 주식투자까지 알고리즘이 하고 있다. 오히려 AI의 지시를 받거나 정비하는 노동자들은 늘어날 것이다. 실제로 2019년부터 2022년 사이 대한민국 취업자 수는 96만 6000명 증가했는데, 이 가운데 51만 1000명이 단순 노무 종사자다. 늘어난 일자리 절반 이상이 음식배달, 택배, 가사, 경비 노동자 등 플랫폼 노동자이거나 구인·구직 플랫폼에서 일자리를 찾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따라서 교육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변하는 기술을 좇아 교육을 하겠다는 건 불가능한 꿈이다. 어제 프로그램을 짠 인간의 노동은, 오늘 데이터화되고 축적되어 내일 알고리즘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것이다. 공부를 잘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소수의 일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인간 사이의 경쟁을 강화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발전된 기술을 활용하여 모두가 생존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각자가 생계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며 사회 안정망을 통해 사회적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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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가 가장 궁금해하는

노동인권 질문 Q&A

 

이수정 공인 노무사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특성화고 학생의 현장실습 실태를 다룬 영화 <다음 소희>에서 청소년 노동 현실을 마주한 형사 유진의 말이다. 영화는 유진의 탄식처럼 일터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청소년을 비추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성인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랴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 노동은 노동자라는 입장과 나이, 성별, 경력이 중첩하며 만든 이중·삼중의 차별 속에서 존중받기가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산업구조가 빠르게 변하며 복잡해진 고용 관계도 염두에 둬야 한다. 식당과 패스트푸드점, 편의점뿐 아니라 배달 노동을 하는 라이더, 예술·체육 분야의 뮤지컬 배우와 가수,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받아 일하는 영상 편집자와 웹디자이너 등 하는 일에 따라 관련된 법을 개별적으로 살펴야 할 때가 있다. 청소년 노동인권 문제 중 많은 부분은 널려 알려진 ‘알바 10계명’으론 해결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정된 지면에서 모든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청소년노동자가 겪는 어려움 중에서 주요한 다섯 가지 질문을 뽑아서 살펴보고, 청소년이 당당하게 노동인권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Q. 일도 못하면서 무슨 권리를 찾냐는 사장님을 만난다면요?

A. 여느 권리와 마찬가지로 일하는 사람을 위한 권리 또한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고의로 일을 망치거나 중대한 잘못을 하지 않는 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위축될 이유가 없다. “일도 못하면서”라며 자존감을 뭉개려 들고, “일을 시켜 준 것도 어딘데”, “그만큼 돈을 주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말하며 청소년 노동을 폄훼하는 사업주의 태도를 문제 삼아야 한다. 이는 사업주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청소년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권리 주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십 대 밑바닥 노동』에 등장하는 청소년 노동자 ‘건진’은 아르바이트 경험도 많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노동법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막상 사장을 만나자 얼어 버렸고, 오히려 잘못한 사람처럼 위축이 되더라고 한다.

“그 사람은 아직까지도 저한테 계속 반말을 하고 있고, 저는 계속 “네, 네” 이러면서 끄덕이고요. 어쨌거나 그 사람은
제게 돈을 주는 사람이고, 어른인 거예요. 또 그 사람은 저를 막 욕하고 혼냈던 적이 있고 저는 당했던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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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 것을 안다 해도 나에게 일을 주고, 돈을 주며 반말하는 어른이 “그런 거 뭐하러 쓰냐.”라고 무시할 땐 보통은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청소년이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은 법을 몰라서라기보다 사회적 위치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이 노동 관련법을 알든 모르든 사업주는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거칠고 서툰 태도 운운하며 훈계하고 책임을 회피할 궁리를 할 게 아니라 권리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다.



Q. 교육 기간에는 공짜 노동이 당연한가요?

A. 타인의 노동을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교육 기간이라고 달리 적용할 이유가 없다. 일 시작 전에 교육을 한다면 이는 업무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얘기다. 교육이 업무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교육은 일의 성격에 따라 1시간으로 끝날 수도 있고, 석 달이 걸릴 수도 있다. 교육받는 시간은 노동시간이고,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육 기간에 임금을 적게 줄 수는 있지3개월 기간 내 최저임금의 90% 이상은 지급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1년 이상 일하기로 하고 단순반복적인 일이 아니어야 한다. 교육, 수습, 현장실습, 인턴 등 어떤 이름을 붙여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적다고, 학생이라고 해서 달리 적용할 이유는 없다.
청소년이 공짜 노동을 강요당하는 일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업무 시작 전 청소를 위해 30분 일찍 출근시키거나 업무가 끝난 후 정리하는 시간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식이다. 업무 시작 전후 청소 시간도 노동시간이다. 마무리 청소를 58분 했는데 1시간을 채우지 않았다고 시급을 주지 않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임금 지급 대상이 되는 시간은 일한 모든 시간이다. 1분 단위에 대해서도 노동시간에 포함하는 게 원칙이다. 손님이 없을 때 밖에 나가서 쉬고 오라며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휴게 시간은 미리 정하고 어떤 간섭도 없이 쉴 수 있어야 한다. 손님이 없어 대기하는 시간은 휴게 시간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다.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받아 영상 편집을 한 청소년 노동자에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작업비를 주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 막무가내로 다시 해 달라는 건 공짜 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다. 몇 차례 수정 작업이 가능한지, 그 이상에 대해서는 얼마를 더 지급할지 미리 협의하고 정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미리 협의하고 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권리를 찾는 정당한 절차라고 여겨야 한다. 
 

맛보기로 소개한 특집 외 다양한 이야기는 2023 <학교도서관저널> 5월호에 수록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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