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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책으로 나를 포함한 세상을 조금 더 자신 있게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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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1-17 17:00 조회 6,11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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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원 위탁형 대안학교 ‘나우학교’ 교사
 
저는 20년 넘게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알게 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 제게 만병통치약과 같았던 책을 만나게 해 줄 때 가장 신이 납니다. 저는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책이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믿습니다. 그 힘은 콧물이 나면 콧물을 멎게 하고, 기침이 나면 기침을 잠재우는 그런 약이 아닙니다. 책은 아이에게 가만가만 궁금한 것이 생기게 하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마치 아이 자신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조심조심 멋진 해결 방법들을 떠오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아이들과 조심조심, 가만가만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 있는 곳은 위탁형 대안학교 고등과정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기존의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아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학교를 나오는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입었고, 길지 않은 삶이지만, 그동안 살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들도 많습니다. (물론 마음의 상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아픔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게다가 책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학교의 가장 중앙에 책을 읽는 공간이 있는데도 처음에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놀림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나고부터 책을 읽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지윤이가 ‘아주 슬픈 연애’가 나오는 소설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고, 얼마 전에는 현성이가 갑자기 내용이 궁금하다고 『모모』를 구해 달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눈에 익숙해지고 몸으로 스며들기!
학기가 시작되기 전, 저는 아이들과 만날 책들을 정리합니다. 책을 정리하다 보면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책들이 생깁니다. 학기가 시작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나면 그 아이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라 또다시 책 정리를 합니다. 아이들에게 바로 책을 주지 않습니다. 책의 한 장면을 작게 복사해서 화장실 게시판에 끼워 놓기도 합니다. 앉아서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잘 잡고, 화장실 칸마다 다른 내용을 붙여 둡니다. 요즘은 감성에세이집에서 한 컷을 골라 잘라서 두기도 하고, 시를 넣어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살짝 이 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합니다. 모르는 척 읽어 주는데 화장실에서 봤다고 아이들이 반응하면 힘이 납니다.
연애에 실패했다며 시무룩해진 아이들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책의 한 장을 옮겨 놓기도 합니다.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조심조심 아이들 곁에 이야기를 놓아둡니다. 일부러 아이들이 보는 곳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책을 읽고 있다가 말을 걸기도 합니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다고 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해 절대 이해할 수 없다며 흥분하기도 합니다. 마치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듯이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들리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책의 노출 빈도를 높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책표지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책을 여기저기 놓아둡니다. 책표지를 이용하여 예쁜 책갈피를 만들어 두기도 합니다. 생일카드에 살짝 끼워 놓기도 하지요. 그리고 항상 서가를 살피며 책이 어떤 식으로 자리를 이동했는지도 확인합니다. 나름의 실험 결과 아이들이 제가 권한 책에 관심을 가지고 집어 들 때까지 4개월이 걸렸습니다. 참, 책을 권하기 전에 먼저 제가 아이들과 친해져야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죠?
 
책으로 이야기 시작하기
나쁜 책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해서 본다는 웹툰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책으로 보는 웹툰은 렉이 걸려 멈춰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웹툰과 비슷한 내용의 그림책을 보여 주며 이야기를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과 함께』라는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우리나라 신화에서 동유럽 신화가 나오는 책까지 이어졌다가 요즘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lol’이라는 게임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적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민족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은 자신이 고급스러워진 느낌이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책일수록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가 풍부해집니다. 그런 책은 한 가지 이야기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기도 하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라도 그 안에 희망의 씨앗이 꼭 감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주제 분류를 다양하게 할 수 있으며, 글을 읽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작년의 아이들과는 ‘구덩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험 이야기를 하다가, 운명 이야기를 하다가 살면서 억울했던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올해 아이들과는 같은 『구덩이』(루이스 새커, 창비)로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면서 즐거운 것은 이렇게 같은 책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서지도에 대한 강의를 가면 항상 듣는 질문이 책 목록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느냐보다 어떤 아이들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슬픈 이야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교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제가 흉내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과 웃으면서 뒹굴면서 책을 읽는 것이 더 잘 맞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는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교사가 있습니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과 슬픈 이야기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참 잘 맞습니다. 저와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고, 그 선생님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서로를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둘 다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한 교사가 모든 분위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님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만날 때 좋은 책은 내가 좋아하고 내게 맞는 책입니다. 다른 목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치료? 독서지도? 책수다?
십년 전부터 독서치료에 관심이 갔습니다. 최근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독서치료와 관련된 책과 논문을 읽으면서 공부했습니다. 수업을 듣고, 공부해서 시험을 보기도 하여 자격증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가 짧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책에서 권하는 책 목록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아이들에게 그 상처를 이야기하게 하는 책에 대한 것입니다. ‘치료’라는 단어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이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독서치료에서 말하는 문제인식–정서적 반응–문제해결–자기적용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무장해제하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아픔과 만나면서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실컷 화도 냈다가, 울어도 보았다가, 모른 척도 해 두었다가 하다 보면, 미루어 두었던 상처들을 잘 빨아서 햇볕에 말리게 됩니다. 그렇게 잘 말리고 나면 이제까지보다는 좀 더 씩씩하게 세상으로 한 발짝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무척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표현할 때 저는 ‘독서치료’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아직 딱 맞는 단어를 찾지는 못했지만 제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함께한 이야기들을 ‘독서치료’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왕도가 없습니다. 아이들도 변하고,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도 변하고, 저 역시 변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항상 살아서 움직입니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는 있어도,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많지 않습니다. 다시 아이들 곁으로 이야기들이 갈 수 있도록 아이들의 상처에 딱지가 생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간혹 또 다른 상처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자신도, 세상도 다 막아버리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를 계속 덧나게 만드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조심조심 살금살금 다가온 이야기들을 아이들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단단해집니다. 시간을 정해서 구조화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이야기를 고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밟아갈 수 있도록 곁에 책을 놓아두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그래서 그 아이가 평생 독자가 되어 변화하는 세상에서 좀 더 자신 있게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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