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김지윤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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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7-03 09:38 조회 442회 댓글 0건본문
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 수학하셨지만 우연한 계기로 영상제작 동아리와 대학 신문사에 찾아간 뒤 콘텐츠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요. 콘텐츠 사업가로 새 길을 개척하고 계신 오늘, 작가님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지금 이 인터뷰를 하기 직전에 온라인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요. 화상 회의부터가 저의 화면에서 많이 이뤄지는 일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지금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살다 보니 화상으로 일하는 게 되게 익숙해졌어요. 그전에도 익숙하긴 했지만. (웃음) 또 창업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긴 한데, 일하고 삶이 덜 분리되어 있어서 제가 일상적인 글을 쓰는 페이스북이든 아니면 링크드인(Linked in, 비즈니스 전문 소셜 미디어 플랫폼) 같은 일적인 SNS든 늘 화면에 연결되어 있긴 해요. 최근 들어 아시아권 창업가들을 인터뷰하는 시리즈 콘텐츠를 프로젝트로 제작하고 있는데, 이분들 만나려고 링크드인에서 영어로 글을 쓰고 있거든요. 결국 화면 안에서 글을 쓸 때는 많은 경우 언젠가 SNS로 연결될 누군가를 상상하며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제가 결혼이라는 걸 하고, 또 요리라는 걸 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이라) 요리를 못하다 보니 쉬는 시간에 레시피를 되게 많이 찾아봐요. 사실상 화면이 없었으면 요리를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일로써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려고 띄워 놓는 화면뿐만 아니라, ‘정보를 얻는다’는 되게 고전적인 창구로써의 화면도 유의미하다는 걸 이렇게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느끼는 것 같아요.
지금 대표로 계신 디지털 에이전시 ‘스텔러스(Stellers)’의 창업 과정과 더불어, 스텔러스가 정확히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인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공동창업자로 합류했던 ‘뉴즈’라는 회사가 있었어요. 2019년에 기자로서 취재하며 알게 된 사실들을 쉽고 짧게 틱톡 영상으로 만드는 걸 취미처럼 동료랑 했었거든요. 근데 그 채널이 되게 잘 커서 2020년에 엔젤투자(자금이 부족한 벤처기업에 개인 투자자들이 돈을 모아 자본을 대고 주식을 받는 일)를 받고 회사를 설립하게 됐어요. 동료 기자는 대표가 되고, 저는 콘텐츠 만드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처음으로 창업을 겪었죠. 그러다 2021년에 숏폼 전문 MCN(다중 채널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1인 창작자들을 지원·관리하며 수익을 공유하는 사업) 회사까지 만들게 됐는데, 사실 MCN 비즈니스 모델이 저의 최우선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쉬어야겠다 하고 2022년에 실무를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돈은 계속 벌어야 하니 (콘텐츠 에디터로서) 프리랜서를 시작했어요. 이때는 뉴스레터를 만들고 싶은 분들께 뉴스레터 콘셉트를 간단하게 만들어서 레터가 정기적으로 발행되게끔 돕는다거나, 누군가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는데 그걸 실제 세상에 내보이는 콘텐츠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면 제가 그걸 실현하게끔 도왔어요 그러면서 단·장기 프로젝트도 맡아 가며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 서비스를 많이 하게 됐어요. 아직은 개인사업자를 등록한 지 1년도 안 돼서 저도 지금의 스텔러스를 뭐라고 한 줄로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인데, 따지자면 맞춤형 콘텐츠 미디어 전략을 짜고 운영 대행을 같이 해 드리는 사업, 즉 ‘콘텐츠 미디어 에이전시’ 혹은 ‘디지털 에이전시’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의 소망1)이 데이터로 남아 있는 화면 속 세상이 내 아이에게도 살기 좋은 곳이 돼야 한다고 믿”기에 이번 책을 쓰셨다고요. 아이들에게 올바른 화면 속 세상을 물려줄 책임을 느끼셨기 때문일 텐데, 이런 다짐이 어느 한순간 생긴 건 아닐 것 같아요.
이 얘기는 결국 ‘아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남편과 7년 정도 만나고 결혼했는데요. 20대 초중반이던 연애 초반에 서로 자녀관에 대해 이야기했었어요. 당시 저는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출산을 하면 여성이 사회 활동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워지기 때문도 있었지만, 당시 저는 상대에게 “아이를 낳아 열심히 키웠는데 결국 걔가 불행하다고 날 원망하면 어떡하냐” 말했었어요. 그런데 돌아온 주말에 상대방이 “오래 고민했는데 나는 그래도 애를 낳아야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로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키워 준 게 좋았기에 자신도 자식에게 제 아버지 같은 부모가 되어 주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인상적이었어요. 뒤를 만들지 않는 게 제게는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런 이유가 있었어?’ 하고 생각해 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일차적인 마음의 변화가 생겼어요.
그 후 또 생각의 변화를 맞게 된 계기가 있어요. 가족끼리 여행을 갔을 때 잠결에 저희 어머니랑 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요.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내 인생이 별 볼 일 없지만 너네를 낳아서 키웠다는 게 나의 업적”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얘기가 앞서 지금 제 남편이 했던 이야기와 되게 맞닿아 있었다 보니, 정말로 ‘자식을 낳는다는 게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나’ 하면서 생각의 변화를 맞게 됐어요.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저에겐 고민이 필요한 문제였거든요. 그러면서 ‘나를 남긴다면 어떻게 남길까?’ 하며 생각이 바뀌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 갖는 사람’에서 지금은 ‘아이를 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 됐어요. 그런 변화가 없었으면 사실 애초에 이 책을 안 쓰고, 뉴즈 같은 회사를 창업해 어린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부모님에서 나를 거쳐,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나의 자식으로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던 차에 마침 출판사에서 아이들의 미디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 달라 연락을 주셔서 고민하다가 책을 쓰게 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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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 주_김지윤 작가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SF 웹소설 작가의 꿈을 꾸며 200화 가까이 온라인에 소설을 연재했다.
프롤로그가 11쪽으로, 꽤 긴 편이라고 느껴졌는데요. 이유가 있었을까요?
제가 아이도 없고, 그렇다고 학교 선생님도 아닌데 이 책을 써도 될까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출판사 편집장님은 이게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 점에는 동의했어요. 하지만 그래서 이걸 과연 왜 ‘내가’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물음이 있었어요. 곱씹어 보니 은연중 갖고 있던 그 생각이 떠올랐어요. 단순히 내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해 나를 거쳐 나중에 자식으로까지 이어지는 어떤 맥락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형질(글쓰기)이 있는데 부모님은 미디어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 그 형질을 발휘해 보지 못했고, 나는 그걸 발휘했다면, 내 자식 세대에 이르러서는 그 미디어 환경이 이왕이면 더 건강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최소한 아이들이 미디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미리 고민해 놓으면 훗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런 것들이 모여 제가 이 책을 써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됐어요. 그래서 누군가 네가 뭔데 아직 아이도 없는데 이런 책을 쓰냐고 해도 (웃음) 그럼에도 나는 이런 나만의 서사가 있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제가 스스로 지금의 제 삶을 어느 정도 좋아하기에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있다고 느껴요. 제가 만약 지금 사는 삶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굳이 뭐 책까지 쓰냐’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30대가 넘어서 사람들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전혀 모르던 외국에 있는 사람하고도 연결되는 삶을 사는 게, 어느 정도 나답다고 느끼거든요.
온라인 디폴트 시대, 화면 안은 또 하나의 삶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의 부제를 짓는다면 ‘온라인 디폴트를 향한 옹호’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서 말씀해 주셨던, 온라인이 몰입보다 중독을 야기한다는 오명에 한번 더 변론해 주신다면요?
온라인이 중독을 야기하는 부분은 당연히 있다고 봐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미 많이 나와 있어서 제가 동어 반복을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온라인을 잘 활용할 방법이 있다면 나는 낙관주의를 택해 보면 어떨까’가 책의 기본적인 취지였어요. 예를 들어 게임 중독은 학생 설문 조사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인데요. 조사 결과 실제 게임 중독이라고 지칭할 만한 학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통계는 항상 정규분포를 따르니까 회색지대에 있는 학생이 훨씬 많아요. 그런 맥락에서 당연히 온라인을 완전히 생산적으로 쓰는 학생도 적죠. 그렇기에 게임 중독 학생도 생각보다 적어요. (온라인 게임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세계를 잘 알 수 없어서 더더욱 ‘게임이 문제다’라는 식으로 오해를 쌓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게임 중독이 너무 많아 문제라고 말하기보단 게임을 많이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하고 변론하고 싶었던 게, 사실 게임을 포함한 온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거든요.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직업을 얻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런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거나 아니면 잠깐 부는 바람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래서 ‘여기도 사람 사는 데’라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화면이 있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제가 하고 있다는 아시아 창업가 인터뷰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쉽고 빠른 길도 화면을 통하는 길이거든요. 이처럼 화면 밖에서 내가 목적을 세웠을 때 화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어요. 반대로 목적이 비어 있을 때 화면은 즉각적인 보상만으로 작용해 시간을 낭비하게 될 여지가 물론 크죠. 사람은 동물인데, 항상 사람의 시간을 가져가는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은 인간의 동물적인 면을 관통하는 다양한 기획을 하잖아요. 하지만 화면 바깥에 나만의 목적이 있어서 화면이 내 파트너 역할을 한다면 화면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도 많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몰입과 중독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아이들이 존재합니다. 온라인 중독의 예방법, 혹은 이미 중독 상태의 아이들을 가능한 한 안전하게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줄 방법이 있을까요?
유년기를 놀이터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 보내면 아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거나 놀이를 좋아하는 면모를 잃어버리는 지점에 대해 따로 연구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되게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 스마트폰에서도 훨씬 다채로운 놀이 경험을 추구할 수 있는데, 아이가 스스로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 누르면 바로 나오고, 스스로 뭔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할 것과 볼 것을 정해 주는 편리한 미디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아이들이 도파민에 대한 역치가 너무 낮아져서 결국 기쁨 자체를 느끼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커 가는 것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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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걸 어떻게 극복할까 생각했을 때, 『도파민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 교수는 운동을 하라고 하거든요? 몸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도파민을 다른 종류의 자극으로 치환하면서 즉각 보상이 아닌 지연 보상 경험을 늘려야 한다 말해요. 근데 이게 결국은 다양하고 낯선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 또는 그 환경을 구축해 줄 조력자가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거거든요. 최근 복지재단에서 취약계층 아이들을 따로 지도하시는 선생님들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었는데요. 거기서도 나오는 이야기가 ‘자극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엔 너무 공감하는데 아이들에게 그럴 여건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일하느라 바쁘고 여건이 안 되면 아이는 학교에 있거나 아님 집에 와서 핸드폰만 한다는 거죠. 이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낯선 자극을 주냐는 게 선생님들의 고민거리였어요. 똑같이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는 아이여도 부모가 아이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려고 주말농장에 데려간다거나 가드닝 수업을 보내 주는 가정도 있다더라고요. 결국 낯설고 다양한 자극을 안겨 줘야 하는 건 맞는데 자극의 다양성을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런 격차를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결국 아이들이 낯설고도 건강한 자극을 자꾸 느끼도록 함께하는 시간, 혹은 아이들을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놀게 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겠다는 것이군요.
방치해 두면 알아서 크길 기대하긴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미디어를 다룰 때는 지도하지 않으면 사실상 자기가 봤던 것만 또 보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안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랬을 때 자기가 본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아이들은 어떤 무기력을 느끼거든요. 제가 책을 쓰며 만난 대학생이 있는데 이 친구가 멀리서 보기엔 잘 공부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퇴학을 당했어요. 그래서 모두가 놀랐죠. 부모님도 애한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 없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했었거든요. 근데 이 친구가 “하고 싶은 게 없고,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다더라고요. 당시에는 공무원 시험이 유행이었어서, “뭘 해도 어차피 나는 공무원 돼서 다 그렇게 살 거 아니냐”는 거예요. 유연하게 다른 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워하고, 설령 그걸 하고 싶어도 안 될 거라고 미리 생각하는 게 이십 대 초반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조금이라도 더 어렸을 때 크고 작은 실패를 해 보고, 무언가를 해 보고 싶어 하는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서 삶의 근육을 키울 시기인데… 다행히 이 친구는 삶의 벼랑 끝까지 가 본 뒤에 오히려 자유로움을 발견해 현재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잘 살고 있는데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고 봐요. 그러니 결국 궁극적으로는 (게임 중독인 아이가 있으면) 왜 이 아이가 게임에 이렇게 빠져 있는가에 대해 다섯 번 정도는 이유를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해?” “왜 게임에 빠진다고 생각해?”를 아이들에게 최소한 다섯 번은 물어봐 주기. 구체적이고도 인상적인 말이네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유저들에게 이 서비스를 왜 쓰는지 한 다섯 번쯤 물어봐서, 궁극적으로 유저가 이 플랫폼을 왜 쓰는지 이해해 치열하게 서비스를 만들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 서비스를 쓰는 유저들은 ‘왜’라는 질문을 안 하고 그냥 쓰다 보니 유저 스스로 시간 낭비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스스로 ‘왜’를 묻기가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들도 부모님도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특히나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여기에 많은 시간을 쓰니?” 하고 물으면 방어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질문을 질책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한 번 질문하고 안 되면 말 게 아니라, 대화 자체를 훈련해야 할 것 같아요. 내 화면이, 내 시간이 왜 이렇게 쓰이는가를 언어화하는 훈련인 거죠. 결국은 이 방식이 대화의 훈련이자 자기 이해를 높이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지 않나 싶어요. 애들뿐만 아니라 양육자도 내가 왜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매일까진 아니어도 자주 질문해야 돼요. 자기 시간에 대해서 언어화하고, 시간을 다르게 쓰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수없이 실패해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게 끊임없는 시도이자 훈련이라는 걸 모두가 스스로 이해하면 설사 실패하더라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계속 질문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해요.
화면은 인위적으로 발명된 것인 만큼 화면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 역시 인위적으로 더 나은 쪽으로 수정해 나갈 수 있다고 하셨지요. 지금 당장 ‘최우선적으로’ 어른들이 먼저 머리를 맞대고 바꿔 나갈 문제점이 있다면요?
SNS에서 나아가, 메타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콘텐츠를 어떻게 잘 필터링할 것인지가 갈수록 더 큰 문제가 되고 있긴 해요. 왜냐하면 영미권 아이들 중 대부분이 예전에는 검색해서 포르노를 봤다면, 요즘은 소셜 미디어에서 우연히 접하게 되는 방식으로 패턴이 바뀌었거든요. 그런 걸 생각해 봤을 때 소셜 미디어나 메타버스 플랫폼들이 어떻게 콘텐츠 자체 필터링을 더 잘할 것이냐에 대해서 더 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특히나 3D, 가상현실 등 콘텐츠가 체험형에 가까워질수록 거기서 마주하는 부적절한 콘텐츠들이 주는 충격이 훨씬 크거든요. 예전부터 이슈긴 하지만 적어도 플랫폼이 이 문제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해야 한다 생각해요. 이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이 생각보다 플랫폼이 스스로 못 하는 부분이거든요. 플랫폼이 바뀌도록 소비자 차원에서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계속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느 날 다소 포괄적인 규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3세 이하에게 스마트폰을 못 쓰게 한다는 식으로요. 법은 사실 모두에게 통용되어야 해서 세심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당연히 법으로 막는 부분도 하나의 방안이 되겠지만 그 전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해요.
온라인에 치여 무기력이 찾아온 아이들에게 삶이 주는 “경이감을 되찾아 줘야” 한다는 말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를 위해선 어른들이 먼저 삶 속 감동을 자주 느끼고 나눌 줄 알아야 할 듯해요. 작가님은 요즘은 어떤 생의 ‘경이감’ 속에 계시나요?
요즘엔 저랑 완전히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경이감이 올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예 다른 문화권이라든지, 같은 문화권이어도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게되면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서 살아가도 되게 다르게 세상을 보게 되는구나.’ 하는 걸 느껴요. 최근엔 자연에서 오는 소소한 경이감이 저를 많이 살려 줘요. 제가 집에서 사과나무를 키우거든요? 사과 씨앗을 마당에 심어 놨는데 그게 알아서 꽤 자랐어요. 그런데 이 나무가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죽는 거예요. 그래서 역시 잘 자라긴 글렀다 생각했는데 봄이 되니 다시 살아나서 그 전보다 자랐어요. 또 어느 날 보니 집 앞 산책로 쪽 어느 한 구역에만 잡초랑 들꽃이 다른 풀에 비해 열 배 넘게 자라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딴 데는 다 나무 그늘이 있는데 거기만 그늘이 없어서 햇빛을 더 받았던 거였어요. 조건만 맞으면 생명은 어떤 식으로든 자라는구나, 그걸 발견하고 정말 놀랐었어요.
온라인 플랫폼을 향한 문제 제기,
화면친화적 삶의 주요한 생활
작가님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커뮤니티 찾기”로서 아이들의 제2의 삶터 찾기를 긍정적으로 보셨지만 오늘도 커뮤니티를 찾아 떠도는 아이들에게 당부하고픈 말도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첫째는 내가 나의 곁에 있어 줘야 한다는 것. 커뮤니티로 소속감을 찾고자 할 시기에는 더욱이요. 십 대 때는 이십 대 삼십 대를 상상하기가 당연히 어렵지만 생각보다 나이는 금방 들고, 소속은 계속 바뀌니까 결국 나한테는 많아 봐야 가족, 혹은 가족조차 없이 내 곁에 나만 남는 순간이 많거든요. 그러니 내가 나의 곁에 있는 연습을 지금부터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말하고 싶어요. 자립할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을 잘 구축하는 것. 사람에게 기대서 삶의 난관을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도 괜찮을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아이들이 잘 마련하면 좋겠어요. 두 번째는 자기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어쨌든 몸이 있기에 밖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뭘 만지고 하는 이 모든 게 온라인에서와는 또 다른 화학적인 작용이거든요. 이걸 간과한 채 화면을 통해서만 모든 게 다 해결되진 않아요. 적어도 사람에게 물리적인 몸이 있는 한 나의 몸을 잘 가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서 말한 애나 램킨 교수의 운동을 하라는 말이 저는 유효하다고 봐요. 운동이 ‘화면을 통해 갖는 인지적, 화학적 자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자극인 거죠. 화면 속 나와 물리적인 나, 이 두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게 오히려 커뮤니티에 확 빠졌을 때 나를 객관화하고 상황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교육계는 지금 AI 리터러시를 미래교육의 중심 화두로 두고 혁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로서 미래 학교도서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인간에게는 물리적인 몸이 있어서 종이를 넘기고 메모를 남기는 일을 디지털화하는 게 쉽지 않아요. 설령 실현하더라도 실제 종이책이 주는 물성과는 거리가 있어서, 좀 큰 의미에서 종이책이 여전히 필요하다 생각해요. 물론 스마트 기기를 도입해야 하고, 인공지능 리터러시가 필요하다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학교도서관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매체와 콘텐츠를 가진 보루로 남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고요. 인공지능에 관해서는, 아이들이 AI를 활용해 정확히 뭘 얻고자 하느냐를 스스로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결국 본인이 얻고자 하는 게 있어야 AI를 잘 써먹고 싶어서 스스로 그 분야를 공부하게 되는 거거든요. 이미 사서선생님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레포트 작성 같은 어떤 특정 목적을 세워 주고 그에 맞춰 인공지능을 쓰게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콘텐츠 경험에 인공지능이 쓰일 수는 있어도 저는 거기에 맞춰 모든 게 바뀌어야 될지는 의문이에요.
책에서 이미 대답해 주신 듯하지만 다시금 여쭤 보고 싶어요. 화면친화적인 삶은 지속가능할까요?
가능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요. 저는 지속 가능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더 나아지게 할까를 계속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어요. 좀비처럼 지속할 것이냐 (웃음) 아니면 좀더 인간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냐가 관건인 거죠. 불만이 있어야 개선할 수 있잖아요. 플랫폼의 문제점을 찾고, 직접적으로 문제 해결의 당사자가 되어 플랫폼들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을 거쳐 봐도 좋겠어요. 물론 문제가 있어도 불만을 가지는 게 의외로 쉽지 않은 역량인 것 같아요. 자기 검열을 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거나 앞으로 쭉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면 먼저 불만을 제기해서 같이 목소리를 모으는 과정들도 화면친화적인 삶의 주요한 생활이지 않을까 해요. 십 대 학생들도 단순히 온라인에 자기 시간을 의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하고 자문하고, 그렇게 화면을 꺼 보기도 하고, 때로 아무것도 안 되네 하고 느껴 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화면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또 ‘저항’하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