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 『최악의 최애』 김다노 동화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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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6-04 09:51 조회 466회 댓글 0건본문
“세상에 태어나 한 자릿수 나이로 사는 건 9살뿐”이라고 하신 바 있는데, 작가님의 아홉 살 시절은 어떠셨나요? 최애 목록 백 개쯤은 있었을 것 같아요.
얌전한 어린이였어요. 무리 지어 노는 친구들과 달리 주로 혼자 조용히 있곤 했어요. 하굣길에 책 읽으면서 걸어가다가 집 앞에 서서 대문은 안 열고 읽는 데 온통 집중할 만큼 책을 좋아했고요. 『푸른 수염』(샤를 페로의 동화), ‘꼬마 흡혈귀’ 시리즈(앙겔라-좀머 보덴부르크가 1979년에 쓴 명랑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동화 시리즈)를 즐겨 읽었어요. 특히 ‘꼬마 흡혈귀’에 나오는 주인공 ‘안톤’과 흡혈귀 남매가 같이 모험을 나서던 장면이 지금도 선명해요. 『톰 소여의 모험』도 재밌게 읽었는데, 어린이들끼리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제약된 상황에서 한 존재로 하여금 다른 세계나 모험을 떠나는 서사를 좋아했어요. 당시 국내에 동화 붐이 일어날 때였는데, 주로 어린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이야기는 재미없더라고요. 그 무렵부터 ‘내가 동화를 쓰면 아이들이 뭔가를 나서서 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부터 글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신 거네요. 쭉 한 길을 파기가 쉬운 일이 아니셨을 텐데요.
공부는 별로 안 좋아했지만 책은 많이 읽어서인지 글짓기상은 줄곧 받았었어요. 부모님께선 막연하게 ‘쟤가 글 좀 쓰나 보다. 그럼 나중에 뭐 먹고살 수 있을까.’ 염려하셨던 것 같아요. (웃음) 아주 어렸을 땐 기자가 되고 싶었고, 중고등학생 시절엔 작가라는 직업이 갖고 싶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한참 다른 일을 하다가 더 나이 들기 전에 ‘해 봐야겠다’ 마음먹고 회사를 그만두고 3년간 글쓰기에 매달렸죠. 30대 초반이었는데, 보통은 직장도 안정되고 결혼도 하고 안정기에 접어드는 시기잖아요. 저는 괜찮았었는데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해서 되레 부담스러웠죠. (글을 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쓰는 데 집중했고, 다행히도 제가 필요할 때마다 문이 열렸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직업 만족도가 백 퍼센트거든요. 인생을 한번 전환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퇴사하고 글에만 매달렸던 3년간은 불안한 시절이었는데 딱 3년째 되던 해,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당선작 「그런 하루」) 수상 소식을 받았어요. 당선 전화가 오던 날 왠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웃음) 기뻤는데 걱정도 들었죠. ‘앞으로는 어떡하지?’ 하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으니까요.
첫 동화집 『나중에 엄마』는 주인공 ‘바로’의 요청에 늘 “나중에”라고 말하던 엄마가 햄스터, 고양이, 개로 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에필로그까지 이 유쾌한 서사를 어떻게 계획하셨나요?
저의 ‘최애’, 그러니까 오랫동안 좋아하던 작가님은 이현 선생님과 최나미 선생님이에요. 두 작가님이 쓰신 이야기들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죠. 어른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써야겠다, 흔하고 쉬운 건 쓰지 말자는 결심이 섰고요. 그렇게 마음먹고 완성한 『나중에 엄마』는 제게 귀한 동화예요. 대학원 재학 당시 김서정 선생님께서 동화를 가르쳐주셨는데, 선생님께 처음으로 칭찬받은 원고가 바로 이 「나중에 엄마」예요. 드디어 동화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한 듯해 기뻤죠. 그 뒤로도 책으로 나올 때까지 여러 번 고치긴 했지만요. 동화의 소재는 당시 일곱 살이던 첫째 조카가 다니던 발레 학원에서 얻었어요. 어른들이 교실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4살쯤 돼 보이는 한 아이가 엄마에게 뭘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중에”라고 답했고, 아이가 “맨날 나중에 하래.” 진심으로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어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웃었어요. ‘미루는 어른’에 관해 모두가 공감한다는 걸 알았고, 그렇다면 미루는 양육자 말고 어린이들이 보기에 귀엽고, 멋진 양육자 이야기를 해볼까 싶어 『나중에 엄마』를 쓰게 됐어요.
『잘난 척쟁이 혼내 주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요. 짓궂은 강우에게 맞서기 위해 하영이가 ‘뀨뀨’라는 가상의 열매를 떠올리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책 말미에 “사람마다 저마다의 ‘뀨’가 있다”라고 언급하셨어요. 작가님껜 어떤 모양의 뀨가 있나요?
재물이나 힘, 권력이 아니더라도 여유나 위트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잖아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인데, 재치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이 있어요. 저는 조용하고 소심한 어린이였는데, 제 조카도 어릴 때 몸이 작아서 덩치 큰 친구에게 눌리는 경험을 겪은 적 있다고 하더라고요. 특유의 소심함과 다정함을 가진 한 어린이가 이야기를 마음껏 지어내는 힘을 발휘하는 이야기를 동화로 써 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강연을 가면 또래보다 키가 크거나 목소리가 큰 어린이들이 눈에 띄어요. 그 뒤에 조용히 앉아서 듣는 어린이들이 있는데, 그 어린이들도 분명 제 말에 대답은 하지 않지만 열심히 경청해 주는 걸 느끼거든요. 오늘 수업 열심히 들은 친구한테 선물을 준다고 가정할 때, 당연히 제 질문에 대답을 곧잘 하고 적극적인 어린이에게 줄 거라고 대다수 예상해요. 저는 그 어린이 뒤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준 어린이에게 선물을 줘요. 앞에 나서는 것도 좋지만 고요하게 내면의 힘을 지켜 나가는 모습도 그 어린이만의 ‘뀨’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린이들은 어떤 갈등이 생기든 금방 잊고 용서하고 회복하는 힘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기도 했고요. 주변에선 제가 늘 걱정이 많다고들 하지만 타인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하는 편이에요.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불편해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 나가는 세심함이 저만의 ‘뀨’가 아닐까 싶어요.
『비밀 소원』(제1회 나다움어린이 창작 공모전 수상작)에는 보편적이지만 여전히 쉬쉬하는 ‘정상가족 바깥’에 사는 인물인 미래, 이랑 등이 등장해요. 캐릭터를 구축하실 때 중요하게 여기신 윤리가 있을 것 같아요.
나다움이라는 요소를 의식하고 쓴 대목은 여성 경찰들이 나오는 장면, 여성 PD가 나오는 장면이었어요. 매체에서 PD는 남자고 보조 작가는 여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걸 깨 보고 싶었고 ‘아줌마’라는 단어도 그런 맥락에서 사용했어요. 많은 매체에서 경박스러운 이미지로 아줌마라는 단어를 쓰는데, 프로페셔널한 중년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쓸 수 있다는 의미로 ‘아줌마 PD’를 동화에 넣었거든요(편집자 주: 동화에서 현욱이 “한 아줌마한테 가서 인사했다.”라는 문장이 언급된다). 대개 어린이들은 부모가 싸울 때 공포를 느끼잖아요. 저희 부모님 또한 그러했는데, 지금은 노부부가 되신 부모님이 너무 사이좋게 지내고 계셔서 가끔 배신감을 느껴요. (웃음) 그럼에도 불쑥불쑥 제 안에 서럽고 두려운 마음을 품었던 어린이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데 미래, 이랑, 현욱의 이야기를 쓰면서 제 안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었어요. 제 동화가 타인에게도 위로가 되어 줬구나, 하고 생각하게 해 준 책이 『비밀 소원』이에요. 『나중에 엄마』가 제 첫 동화책이라면 『비밀 소원』은 제 동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어요. 이 책 덕분에 다양한 곳에서 강의를 했는데 『비밀 숙제』에도 나오듯이 아버지가 집안일하고 어머니가 바깥일 하는 가족과 사는 어린이, 한부모가정 어린이도 만날 수 있었어요. 요즘 들어 ‘비밀 시리즈’를 들고 어린이들을 만나러 갈 때는 “그냥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하고 말해요.
열세 살을 위한 건강한 연애 공식: 『최악의 최애』
『최악의 최애』에는 열세 살 어린이들의 연애담이 간질간질 건강하게 펼쳐져요. 많고 많은 소재 중 어린이들의 ‘사랑’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신 이유는요?
7년 전쯤 박물관에서 복식을 다룬 전시를 본 적 있어요. 재킷 단추에 불어로 문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인상적이었어요.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로맨스를 알고 있다.” 문장이 좋아 메모하면서 언젠가 부드럽고 신중한 로맨스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던 게 동화를 쓴 첫 번째 계기예요. 두 번째 계기는 강남역 살인사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당시 여성 혐오 사건이 줄줄이 일어나면서 페미니즘 열풍이 일어나는 걸 생생히 지켜 봤어요. 내 여자친구이기에 혹은 내 여자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시대에서 로맨스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했어요. 제 안의 부드럽고 신중한 로맨스와 지금 이 시대의 로맨스의 모양이 맞물리면서 ‘정말 제대로 된 로맨스’를 써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고요. 『최악의 최애』에 나오는 두 번째 챕터 「눈인사를 건넬 시간」을 맨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이번 동화가 완성되었어요. 이야기의 주인공 수민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덕형으로부터 온갖 선물과 전화(협박)를 받는 것처럼, 저도 열세 살 무렵에 비슷한 경험을 겪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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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폭력을 일삼는 어른과 덕형의 모습이 포개어지는데, 어린이 입장에선 공포감이 더 클 것 같아요. 당시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자아이가 저희 집 우편함에 항상 선물을 넣어 놓고 갔고, 하교 후 전화를 해 왔는데 제가 안 받으면 자동응답기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남기곤 했어요. 보복 심리였던 것 같아요. 동화에서도 덕형이 수민이 집 우편함에 선물을 넣어 두고 가고, 수민이 교실에 들어서면 “야, 쟤가 너 좋아한대.” 하는 소문을 수민이 계속 들으면서 일종의 압박을 받잖아요. 그 감정들을 헤아리면서 좋아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일 수 있는지 건강하게 보여 주는 동화를 써야겠다 싶었죠. 한편으론 고학년 어린이들을 만나 보면 자기 또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애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경우를 자주 봐요. 사랑과 연애 감정은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감정이자 어린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이잖아요. 대다수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로맨스물을 읽으면 성적인 것에만 골몰할 거라고 여겨요. <고딩엄빠> 같은 TV 프로그램을 싫어하는데요. 미성년자가 임신과 출산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되고 폭력적인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아무렇지 않게 미디어로 노출하면서, 연애 이야기가 담긴 책을 못 읽게 검열하는 건 모순이라고 봐요. 이런 때일수록 어린이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연애란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는 콘텐츠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으로 동화를 썼어요. | 『최악의 최애』에서 수민이 덕형을 거절하는 장면. “연애 이야기가 담긴 책을 못 읽게 검열하는 건 모순이라고 봐요. 이런 때일수록 어린이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연애란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는 콘텐츠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으로 동화를 썼어요.” |
키 작은 남자아이 무지와 키 큰 여자아이 미지 등 흔히 볼 수 없었던 캐릭터들의 성별 구조가 신선했어요. 특히 남자 어린이들의 섬세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보통 남자아이들을 장난꾸러기에 단순하고,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는 이미지로 뭉뚱그려 생각하잖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여왕벌이 있고, 질투을 일삼는 획일적인 이미지로 여자아이들을 바라보고요. 실제 제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랑 성격이 잘 맞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피곤할 정도로 섬세해요. (웃음) 제 주변 남자 어린이들도 그런 편이고요. 더구나 요즘 어린이들은 예전 세대와 달라지기도 했고요. 어쩌면 늘 비슷비슷하게 그려지는 어린이 이미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어린이 독자들이 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캐릭터를 구축할 때 남자든 여자든 어느 정도 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 같아요. 동화에 나오는 어린이들 모두 저의 성격을 조금씩 지니고 있어요. 이는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가진 ‘보편’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리고 한 바퀴 더」에 나오는 기온의 캐릭터가 유독 사랑스러웠는데요. 좋아하는 마음을 솔직담백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미지와 비슷한 면모가 있는 듯해요. 어린이로 돌아간다면, 연애해 보고 싶은 작품 속 인물을 뽑아 보신다면요?
우선 「눈인사를 건넬 시간」의 주인공 수민이가 좋을 것 같아요(편집자 주: 수민이는 자신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덕형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용기 있게 거절한다). 수민은 잔잔하고 고요하며 속깊은 어린이거든요. 수민이가 싫다고 처음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기보다는, 상처 주는 행위를 쉽게 하지 않는 섬세한 어린이이기 때문일 거예요. 수민이와 연애한다면 서로 배려하는 고요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대한이일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작정하고 만든 캐릭터인데, 제가 습작 시절에 쓴 연애물 「한 바퀴 더」에도 6학년 대한이가 등장해요. 섬세한 남성 캐릭터인테, 그런 캐릭터가 현실에 잘 없다 하더라도 가상에 한 명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런 사람과 만나고 싶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한이 캐릭터를 구현했던 것 같아요(「다시 봄」에 등장하는 대한이는 진아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 표현이 거칠거나 강압적이지 않고 배려심이 깊다).
장애를 가진 진아가 자신을 안아 주려 다가오는 아이돌 춘기를 멈춰 세우고, 되레 안아 주는 대목에서 감탄했어요. 쓰시면서 즐거웠던 장면이 많았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챕터 「무지와 미지」에서 미지가 무지를 업어 주는 장면이 그랬어요. 무지가 폴싹, 미지한테 업히는데 쓰면서도 유쾌했어요. 두 번째 장면은 언급하셨듯이 진아가 아이돌 가수 춘기를 안아 주겠다고 할 때의 장면이에요. 퇴고하면서도 가장 울컥하며 다듬은 장면이에요(편집자 주: 동화에서 진아는 아이돌‘틴케이스’를 좋아하는데, 사인회에서 대한의 활약(?)으로 틴케이스의 멤버 춘기가 둘이 다니는 학교로 와서 진아를 찾는다). 처음부터 진아가 포옹하는 장면을 설정하고 쓴 건 아니었지만, 진아라면 주체적으로 행동했을 거라고 여기며 자연스레 썼던 것 같아요. 춘기 역시 진아가 자신이 있는 단상으로 무사히 올라올 때까지 성급하지 않게 행동하는 인물이라고 내심 믿었던 것 같아요. 사실 오래전부터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동화를 쓰고 싶었지만 제대로 쓸 수 있을 때까진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장애 소재가 도구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어린이를 누군가 도와줌으로써 선하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서사들이 불합리해 보였어요. 휠체어 탄 어린이들도 그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을 텐데, 주인공을 빛내는 위치에서만 존재하는 걸 본다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그 생각을 오래 하다가 어느 날 ‘최악의 최애’라는 제목이 저한테 찾아왔고, 드디어 이야기의 주인공을 내세울 수 있겠다 싶었죠. 언젠가는 제 이야기도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상에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온전한 어린이’ 그리기
찾아가는 성인지교육 사업차 작은도서관에서 그림책 강의를 해 오셨는데요. 현장에서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문제의식을 느낀 적도, 오히려 배운 날도 많으실 것 같아요.
1학년에서 3학년 사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평등, 미의 기준, 나다움에 대해 교육하고 있어요. 수업하면서 어린이들이 편견이 없다는 걸 느껴요. 오히려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 수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들한테 휠체어 탄 몸, 의족을 하거나 보청기를 끼고 있는 몸, 유방이 한쪽만 있는 등 다양한 몸이 그려진 그림책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요. 어느 날, 어린이들한테 “여러분, 누가 예쁘다고 생각해요?” 하고 물어본 적 있는데 장원영 같은 아이돌을 말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어린이들은 자기가 예쁘대요. “왜요?” 물으면 “할머니가 저보고 예쁘다고 하셨어요.” 하고 답해요. 어린이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이들은 스킨십이 조심스러워 경직된 저를 안아 주고 아껴 먹던 오징어 뒷다리도 나눠 줘요. 아마도 제 동화를 읽어서일 텐데, 이런 책을 쓴 어른은 안전하고 좋은 사람일 거야, 하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써 놓고 뒤에서 나쁜 짓 하고 다니거나 위험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배신감이 들까요? 그래서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최악의 최애』 본문 중에서.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 『비밀 숙제』에서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잠자코 받아들여야 할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셨어요. 그럴 수 있도록 어른이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일까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다워야 할 권리가 있어요. 제가 쓴 『마음대로 학교』(2022)에는 자신들이 사는 빌라에 둥지를 튼 까치가 시끄럽고 냄새난다며 치우자고 하는 이웃들이 등장해요. 주인공 어린이 ‘무늬’는 어른들과 맞서요. 아저씨도 문 앞에 침 뱉고, 아줌마도 담배 피워서 냄새나고, 누나네 집도 개 짖어서 시끄럽다고 항변하거든요. 아기 까치가 커서 날아갈 때까지 내가 기다릴 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어른들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와 맞닿아 있어요. 어린이들은 시끄럽고 미숙한 게 아니라, 어린이다운 거예요. 어린이답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는 게 혐오이자, 어린이다운 태도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부당한 거예요. 장편동화 『13의 얼굴』(2022)을 내고 초등학교로 강연을 간 적 있는데, 어린이들이 노키드존이 있어야 할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해 놀랐었어요. 처음에는 자신들이 노키드존 카페에 못 들어가는 걸 억울하게 생각했지만 익숙히 듣다 보니 ‘나는 저런 데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버린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팠죠. 어떤 일에 미숙한 사람을 ‘∼린이’라고 붙여서 부르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데요. 유튜브를 틀어도 ‘잼민이’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써요.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그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이것들을 부당하고 잘못됐다고 얘기하고 편들어 주는 어른이 있다면 어린이들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존재가 아니란 것을요. 어린이를 낮춰 부르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도록 자각하는 어른이 많아져야 해요. 따라서 어린이를 낮춰 부르는 혐오 표현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해요. |
작가님이 쓰신 동화를 읽다 보면 키가 똑같은 어린이와 어른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라요. 독자에게 닿았으면 싶은 또 하나의 동화 세계를 그리신다면요?
어른들이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잖아요. 제 생각은 달라요. 어린이들과 일대일로 대화하면 그들의 지혜나 통찰력이 저보다 높다는 걸 깨달을 때가 많거든요. 굳이 눈높이를 낮출 필요 없이 ‘우리는 같은 존재’라고 의식하는 마음이 필요해요. 그런 마음으로 동화를 대하려 해요. 지금까지 밝고, 강하고, 건강하고, 단단한 내면을 가진 어린이들 이야기를 주로 썼어요. 다음 작품은 어린이가 지닌 슬픔이나 어두움에 관해 써 볼 차례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껏 썼던 것과 사뭇 다른 방향이라 어려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금방은 어렵더라도 당분간 제가 몰입할 세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한 가지 있는데, 학교 갈 때마다 좋은 사서선생님들을 많이 만나거든요. (웃음) 어린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와서 사서선생님에게 곧잘 말을 걸더라고요. “저 네일 했어요!” 하고 친근하게 말 거는 걸 보고 사서선생님이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직업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어린이들이 사서선생님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책 구경하면서 온전히 휴식하더라고요. 선생님들에게 힘든 뉴스도 많고 일도 워낙 많아 고단하시겠지만, 오늘 감사의 말씀을 보태고 싶어요. 어린이의 곁을 지켜 주시는 사서선생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