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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이 사람의 책꽂이 - 책 읽기, 그 스산한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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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5 16:21 조회 6,86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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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게 좋았습니다. 아니 무얼 읽는 것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뒷간에 앉아서도 뒤를 닦을 신문지 쪼가리나 종이에 인쇄된 것들을 읽는 데 빠져 있곤
했습니다. 옛날 뒷간은 허름하기 짝이 없어서 거적문이나 나무판자 사이로 안이 조금
씩 들여다보이는 곳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어른들이 내가 무얼 읽고 있는 낌새를
눈치채시고는 꾸지람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도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도서실로 달려가
곤 했습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중학교 도서실은 꽤 컸습니다. 학생들 백 사오십 명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책걸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서가가 따로 있었는데 당
시에는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도서실은 개가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래
서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도서실에 가면 자기가 원하는 책을 직접 골라서 나올 수 있
었습니다. 도서실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선 기다란 줄 앞쪽에 서 있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신이 났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도서실 안으로 들어가
비치된 많은 책들을 뒤적이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책 안에는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신비한 우주, 무릎을 치게 하는 과학, 야릇
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설 속 어른들의 세상, 상상의 공간이 있었고, 추리와 모험
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이 있었습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중학교가 있
는 청주에서 집이 있는 증평까지 기차 통학을 할 때도 있었는데,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어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미리 가서 역 주위를 배회
하기도 했지만, 도서실에서 책을 보는 것만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것도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책을 대출해 주기 위해 카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
다. 삼단으로 접어서 앞뒤로 사용하게 칸이 그어져 있고 거기에 대출해 간 책 이름과
대출일과 반납일을 적고 확인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삼단으로 접혀 있어서 수첩 속
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도서대출카드는 앞뒤를 다 합해 대략 60여 칸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책을 읽는다면 일 년에 한 개면 충분히 사용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도서대출카드 하나로는
부족해서 2학기가 되면 하나 더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도서실을 가는 나
는 일 년이면 도서대출카드가 두 개 또는 세 개 필요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다른 아
이들의 카드와 내 카드를 비교해 보면서 나보다 더 많이 책을 읽는 아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체계적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닥치는 대
로 읽었고,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잡식성 독서를 했습니다. 이제와 생
각해 보면 수없이 도서실을 찾는 제게 권장도서 목록을 주고 차례차례 읽게 하거나 독
서지도를 해 주는 선생님이 계셨다면 훨씬 더 생각이 깊고 사유체계의 틀이 잡힌 사람
으로 자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이 데려다 주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 공상으로 이어지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호기
심을 채워 주는 책은 또 다른 호기심과 유혹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연필은 문제를 풀
기보다 빈 공간 가득 공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고, 영어단어로 채워야 하는 연습장은
알 수 없는 선들과 낙서로 가득했습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 줄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탓에 친구들이 과외를 받거나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도 도서실로 갔습니
다.

이래저래 성적은 자꾸 떨어졌고 객지로 떠도는 아버지 대신 밥을 먹여 주고 학교를
보내 주는 외가에서도 외사촌 큰형의 질책이 잦았습니다. 성적 때문에 혼이 나고 나면
씁쓸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도 책을 읽는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
다.

외가는 변두리 동네에 있었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었고, 큰형은 그
동네에서 몇 안 되는 대학생이었던 것에 비해 나는 망해서 뿔뿔이 흩어진 집안의 외톨
이요, 얹혀사는 처지라는 자의식이 상처받기 쉬운 채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서 내면
이 자주 스산했습니다. 그 스산한 내면을 책이 들어와 채워 주었습니다.

그 스산한 기운이 나를 작가의 길로 걸어가게 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십대 중반
부터 스산한 바람처럼 내 주위를 맴돌던 고독과 자학과 자의식의 상처가 나를 책에 파
묻히게 했고 글을 쓰게 했을 것입니다. 고마운 고독, 고마운 몰입, 그 책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책에 빠져 지
낸 어린 시절만큼 고마운 시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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