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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독서,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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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6 22:12 조회 9,01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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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네 번째 모임
때 2011년 4월 29일
곳 서울 신촌 ‘윙스터디’
책 「외투」 니콜라이 고골
발제자 송지윤동덕여대 식품영양학과
참석자 김수인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서송이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성정환서강대 중국문화과,
참석자 이성근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한지연 서울여대 원예생명조경학과, 황연수

러시아의 사실주의 작가 고골(1809~1852)의 명작 『외투』는 『검찰관』과 더불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틀을 확립하는데 본보기가 됐던 작품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했을 정도로 이 작품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배고프고 힘없는 자들만의 가슴 찡한 휴머니즘, 권력자들의 위선과 인정 없음에 대한 풍자가 알알이 밴 작품입니다. 『외투』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신간도서에 밀려 쉽게 대학생들이 접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저는 동아리 회원 분들께 고전을 통해 더 깊고 다양한 생각을 해보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시험기간과 맞물리는 토론 시점을 고려하여 고전 중에서도 짧은 단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발제자: 송지윤)

외투의 의미?
송지윤
아카키 아카키에비치에게 외투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새 외투를 장만하기로 결심한 후, 새 외투가 생겼을 때, 새 외투를 잃어버렸을 때, 아카키 아카키에비치의 모습과 심리는 각각 어떻게 변화했는지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서로 비교해보죠.

서송이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외투라는 기본적인 삶의 수단을 열망하게 됨으로써 자신이 생활하는 삶에 대한 이유와 목표의식이 생겼어요. 또한 그에게 외투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손에 쥠에 따라 만족을 얻는 것에서 나아가, 평생 단조롭던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자기 자아의 성립까지 얻을 수 있었어요. 존재감 없던 그가 외투를 가짐으로써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 그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죠.

성정환 아카키 아카키에비치에게 외투는 난생 처음으로 가지게 된 진지한 삶의 목표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전에 정서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외투를 사기 위해 노력할 때 만큼의 강렬한 열망을 보이지 않아요. 그는 오직 새 외투를 살 생각에 가득 차 있고, 새 외투를 상상하면서 강력한 만족을 느껴요. 비록 그 외투를 사는 것이 자신의 자아의 성취 같은 것과 관련이 없는 단순한 소비 행위이기는 하지만 생기 없고 하루하루 흘러갈 뿐이던 그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줘요.

한지연 외투를 산 후에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던 아카키의 모습이 180도 달라졌어요.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외투의 역할이 커요. 현대인들의 예를 들어본다면, 여자들에게 명품이란 것은 명품이라는 고가의 질 좋은 상품 이상의 의미를 지녀요. 명품백은 여자의 ‘자존심’이라 일컫는 만큼 명품백이 자신의 이미지를 대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이미지와 시선을 생각하며 만족감을 얻게 돼요. 이와 같이 아카키도 새 외투를 입었을 때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황연수 삶의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해요. 삶을 생기 있게 해주는 것들은 사람마다 달라요. 일반적으로 가족이나 애인, 취미 등이 되기도 하지만, 현대에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소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해요. 가족도 애인도 없었던 아카키에게는 외투가 활력의 도구가 됐던 것 같아요.

김수인 아카키 아카키에비치가 새 외투를 마련했을 때 평소 아카키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아카키에게 관심을 가져주면서 외투는 아카키에게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매개체가 되었어요. 아카키가 외투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평소 굉장히 어수룩해 보이던 아카키가 화를 내는 모습까지 보여요. 외투는 아카키에게 존재의 이유이자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에요.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 자체보다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해버리고, 그 사람 자신 또한 겉모습에 집착하는 현상과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성근 그에게 외투란, 내면의 억눌린 자신을 외면에 표현하는 수단일 거예요. 그는 새 외투를 얻음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자기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게 돼요. 또한 외투를 구입함으로써 직장동료들의 인정을 받게 되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외투는 아카키에비치에게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 준 소재라고도 볼 수 있어요. 아카키에비치가 현대 소시민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작고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경향이 단순히 새 옷을 구입하는 정도로일시적으로나마 해결되는 장면으로 보아, 큰 가치보다는 겨우 물질적 욕망의 달성으로 인해 자신감이 상승하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게 해요.

송지윤 외투가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공통된 생각과 함께 사회적 인정과 개인의 만족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네요. 외투가 사회적 인정의 요소를 더 많이 불러일으켰다는 의견에서는 사람들이 외투를 새로 사게 됨으로써 아카키를 인정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근거를 들었어요. 개인의 만족의 의미가 크다는 의견에서는 외투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삶의 목표가 생겼고, 자아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했어요.

유령의 복수, 결말은 왜?
송지윤
이 소설에서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유력한 인사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한 뒤, 그 충격으로 인해 헛소리를 하고, 몸에 열이 오르다가 결국 사망하죠. 결말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그리고 아카키 아카키에비치가 병으로 사망하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작품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이성근 이 소설은 독자의 예상과는 달리 아카키에비치가 유령으로 돌아와 관리에게 복수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죠. 이 결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요. 일단 작가의 취향을 고려하면, 고골은 원래 해학을 선호하는 작가이므로 취향에 맞게 결말을 구성했을 수도 있어요. 또, 문학의 사회적 기능 측면으로 보면, 서민층이 지배층에게 복수를 하고 끝을 맺음으로써, 현실 개혁 가능성을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고, 현실에서 서민층의 불만을 작품을 통해 일부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고도 볼 수 있어요.

성정환 두 가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먼저 사람에게 유의미한 삶의 의미, 목표 같은 것이 상실 되었을 때 사람이 얼마나 황폐화 되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아카키 아카키에비치는 외투를 잃어버리자 이번에도 인생에서 그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강렬한 분노와 슬픔을 보이죠.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외투에 관한 헛소리를 내뱉습니다. 그리고 관료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봐요.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장관이 되면서 딱딱하고 거만해진 고급관료, 그 고급관료에게 질책을 받은 뒤 죽고 유령이 되어 장관의 외투를 뺏어가는 아카키에비치의 모습에서 그가 진정 분노하는 것은 장관에게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관료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송이 저도 앞서 말씀하신 분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는데요, 고위층의 외투를 빼앗는다는 것은 과도한 권위의식과 포장된 위엄을 벗기는 것이라 생각해요. 고위층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자리에 앉음으로 자신을 권위적으로 포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로 인해 빚어진 아카키와의 사건을 풍자하여 기존에 아카키가 갖고 있던 의미와 다르게 ‘외투=포장’ 혹은 ‘외투=겉치레’를 의미한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카키가 유령이 외투를 빼앗아 간 후 고위층은 권위의식에 쌓였던 모습에서 변화하여 다른 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된 것이 아닐까요. 또한 서민들이 기득권자들에게 당하는 것으로 결말을 냈을 경우,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고위층에게 복수하는 마무리를 낸 것도 같아요.

한지연 아카키가 유령이 되어 고급관리의 외투를 빼앗는 장면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했어요. 물론 작가가 비극적인 결말로 글을 끝맺었다면 글의 주제이기도 한 관료제의 폐해를 좀 더 부각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가 이러한 결말을 맺게 한 것은 독자가 글을 읽으면서 유쾌함과 통쾌함을 느끼길 바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연수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요, 고위관료를 통쾌하게 복수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일시적으로 억압이 해소되는 해방감을 안겨준 것 같아요. 이는 문학의 기본적 기능에 충실한 결말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이러한 결말은 대중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하여 현실 개혁의지를 감소시킴으로써 기존 부정적 체제의 안정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단점도 있어요.


김수인 결말에서 유령이 된 아카키가 강도가 아닌 유력인사를 노리면서 관료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가 더 잘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아카키가 유력인사에게 벌을 주었다거나 저항을 했다는 차원에서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결말을 통해 소설의 사회비판적 기능이 더욱 부각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분들의 의견처럼 소설이 희화화 되면서 소설의 사회비판적 기능이 오히려 감소되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소설이 아카키가 죽고 나서 끝나버린다면 아카키가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로부터 저항의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송지윤 결말이 사망하는 것으로 끝나면 그저 우울하고 허망하겠지 라고만 생각했는데 비극으로 끝나면 오히려 더욱 관료제 사회를 비판할 수 있겠구나 생각도 있었고,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해봤자 어쩔 수 없구나 라는 생각에서 사람들을 순응하게 만들어 관료제 비판기능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학의 안정판 기능이라든가 문학의 카타르시스기능에 대해 이야기도 나왔고요. 이런 두 가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어차피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가 그 결말을 보고 느끼는 점은 다양할 것이에요.

작품 속 그리고 오늘날의 관료제
송지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유력함을 강화하려 하는 관리들의 속물적 모습이 많이 나타나요. 현대의 정치판 또는 우리나라의 기득권자들과 비교해서 토의해보죠. 그리고 관료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들어봤으면 해요.
서송이 관료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작품에서의 고위층 또한 자신의 지위에 맞는 위엄을 갖추기 위해 포장을 하고 남들과 다른 계급을 과시하길 원해요. 지금도 여전히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죠.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들 모두 변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속물적인 모습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또한 관료제는 절차가 복잡하다는 번거로움이 있어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무턱대고 지금의 시스템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단계를 거치며 문제에 대한 검토 횟수가 잦아져 좀 더 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장단점을 접목해 너무 거추장스러운 절차는 간소화하고, 인터넷 신문고 등을 통해 1:1로 고충을 토로할 수 있는 방법을 겸한다면 좋을 것 같아요.

한지연 현대의 정치판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들이 관료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요. 관료제는 업무 분담이 이루어져 효율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시스템이 오히려 전달을 늦추고 왜곡되게 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아래로부터 상부로 안건이 전달될 때 상부 관리들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문제점도 있어요. 이러한 문제점은 상・하위 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팀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팀제의 경우 능력위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계급 간 고하의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연수 저도 관료제의 권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팀제라고 생각해요. 팀제는 어떤 프로젝트를 조직 구성원들 스스로 팀을 구성해 진행하는 형태예요. 물론 팀제에도 기본적인 위계질서는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히 수평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관료제의 위계질서보다는 훨씬 수평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관료제의 효율성은 일부 인정할 수 있지만 행정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민주성이에요. 행정부문에서는 민간부문과 다르게 효율성이 높다고 무조건 칭찬할 수는 없죠. 국민들의 행정적 수요를 아래부터 잘 파악하여 정책으로 실현하는 것이 관료들이 해야 할 일임은 너무도 당연해요.

성정환 관리들의 속물적인 모습은 현대의 정치판, 오늘날 우리나라 관료들에게서도 보이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는 방법은 관리들에 대한 교육과 관리들 스스로의 끊임없는 자기반성만이라고 생각해요. 관료제는 본질적으로 상급관료들에게 소설 속 같이 상급관료가 하급관료를 통제하려 들고 그들에게 위엄을 과시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어떤 구조도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지고 있어요. 비록 소설에서 관료제의 부당한 점이 나오기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효율적이고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필연적인 만큼 억지로 문제의 해결책을 짜내려고 하기보다는 관리들 스스로가 관료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런 폐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성근 이 작품에서 고위 관료가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카키를 핍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이를 보면서 근래에 화제가 되었던 성남시 이숙정 의원 사건이 떠올랐어요. 두 사건은 고위직이 하위직을 핍박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져요. 저는 관료제에 대해 긍정적인 쪽이에요. 관료제를 통해 일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죠. 허나 관료제도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위세를 부릴 수 있다는 의미에요. 관료제를 아예 없애지 않는 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어요. 아니, 관료제가 없어져도 그 어느 권력체계가 들어서는 순간 고위직과 하위직이 나뉘게 되고 악순환은 그대로 반복될 거예요. 그나마 유일한 방안이라면, 개인의 끊임없는 자아반성 정도를 들 수 있어요.


김수인 앞서 몇몇 분이 관료제를 지지하셨는데, 국민들의 수많은 의견들이 고위직 관료에게 직접적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관료제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의견이 예를 들어 9급 공무원에서부터 5급 공무원까지 전달되어야 한다면, 마지막에 5급 공무원에게 국민의 의견이 올라왔을 때 그 내용은 처음과 달리 변형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간 단계에서 관료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관료제를 따르는 것이 시간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국민의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또한 관료제의 비효율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결론은 현재의 관료제에서 불필요한 중간단계를 없애고, 관료제를 꼭 필요한 곳에 최소한으로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송지윤 관료제의 폐해를 막기 위한 노력은 관료제의 속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노력할 수 있도록 사전 교육이 중요하다, 개인의 의식이 중요하다, 팀제를 도입하자 등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절차를 밟아 자기에게 보고하게 하는 관료제의 속성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엄격한 절차를 밟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만들어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 가능하다는 의견과 보다 민주적으로, 서민의 의견을 가장 잘 아는 말단직원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장 상부직원에게 보고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 두 의견의 절충점인 관료제가 어느 정도 필요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절차는 비효율적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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