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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교사 그건, 공짜가 아니라 상상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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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2 15:45 조회 5,95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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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상상력을 죽여 버렸지만
교과서 수업에서 가장 곤란을 겪는 것 중의 하나가 시 수업이다. 아이들에게 시는 어렵고 재미없는 공부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역설법, 산화공덕, 수미상관구조같이 어려운 말들로 ‘많이 알고’ 있다. 여기에다 3음보율과 7·5조 음수율까지 더하면 교과서는 필기로 빡빡하게 채워지고, 교사와 아이들은 그것을 공부의 깊이로 삼는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해 너는 뭘 느끼느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앵무새처럼 나열하던 지식은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했다. 매년 첫 시 수업 시간마다 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질문하지만 아이들은 매번 굼뜨고 머뭇거린다.

그러면 나는, 시란 별것이 아니고 사실은 재미있기까지 하다고 아이들을 유혹하곤 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에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 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를 ‘지금-나’의 상황으로 불러내 상상해보자고 한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여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인지 대체로 운전 중에 이별을 말하곤 하더라. 드라이브 도중에 남자가 느닷없이 헤어지자기에 이유가 뭐냐고 여자가 물었다. “이제 너를 보기만 해도 역겹기 때문”이란다.

이런 남친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들은 “흠씬 두들겨 팬다”며 흥분으로 난리 법석이다. 그렇다. ‘성격이 안 맞아서’처럼 우회하지도 않고 ‘다른 여자가 생겨서’처럼 솔직하지도 못하면서, ‘너를 보기만 해도 역겨워 토할 것 같다’는 모욕은 아이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시 속의 여성 화자는 그런 남자를 축복하기 위해 꽃까지 뿌려주겠단다. 잠깐 차를 세우라 하고 가까운 가게에서 꽃을 한아름 사서, 떠나려는 남자에게 쿨하게 꽃을 건네며 축복까지 해주겠단다. 아이들은 “헐~ 미쳤어. 말도 안 돼! 죽여 버려야 해!” 등 온갖 험한 말을 쏟아내며 야유를 보낸다. 그런데 이 시의 표면적 의미는 꽃을 뿌려가며 축복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꽃이 시적화자의 분신이라면 시는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상상력이 변혁의 힘일 수 있다

다시 상상해보자. 자신을 보기만 해도 역겹다는 남자에게 꽃을 갖다 바칠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화가 난 여자는 차를 세우라 하고, ‘이 나쁜 자식, 갈 테면 나를 죽이고 가라!’며 차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선다. 꽃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 자신이 길바닥에 드러눕는 것이다. 이때 남자가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아 여자를 뭉개고 간다면?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남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나를 배신하고 떠나려는 너는 정말 죽일 만큼 나쁜 놈이다’라는 1920년대의 우아한 버전이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변용한 이 시에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생명은 읽는 자의 상상으로 채워지는 것이니까, 시에 정답은 없다. 시는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다. 배반당한 그 여자가 바로 ‘나’가 되고, 그 시적 상황을 ‘지금-나’의 상황으로 불러와야 그 시를 느낄 수 있다고, 그것이 곧 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아이들에게 예시해준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시를 어려운 말로 분해하며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해왔다. 학교에서 시를 배울수록 시는 재미없어졌고, 결국 학교가 시를 죽여버렸다. 학교는 우리가 상상하는 법과 공감하는 능력을 죽여버렸다. 그래서 학교에서 시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단언해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시를 직접 써보라고 권한다. 학교에서 배웠던 시는 잊어버리고, 너희가 느끼는 그 감정을 그냥 써내려가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시에 욕을 써도 되느냐고 묻는다. 하긴,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솔직한 표현수단은 욕일 게다. 그러면 나는, 욕도 시가 될 수 있으니 당연히 된다고 상상력을 제한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예를 들어 교사인 나를 욕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머뭇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학교를 폭파하자’처럼 써도 된다고 하면, 아이들은 와 하고 폭소를 쏟아내며 그때서야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말’을 써내려간다. 그렇게 제목도 주제도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한 편씩 써서, 아이들 모두의 시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의 시는 놀랍게도, 힘으로 번뜩인다. 이제껏 백일장이나 경시대회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아이들의 살아 있는 감정과 만나게 된다. 고생하는 부모님께 느끼는 절절한 부채감이나 공부만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미움, 학교와 교사와 공부에 억압당한 자신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솔직해서 공감이 가고, 편하게 썼기에 더 진실한 시를 만난다. 우리는 그런 시를 함께 읽으며 깔깔대고 또 처연해지며, 그렇게 즐거움과 슬픔으로 교실은 기운생동氣運生動한다. 아무도 시를 분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함께 느끼는 것으로 충분했다.

공짜밥 논쟁도 상상력 문제 아닐까
무상급식 논쟁이 온 나라를 달구고 있다. 각자의 이유와 주장이 분명한 만큼, 토론이라기보다는 분열 그 자체다. 무상급식은 공짜심리를 키워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고 국가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거나,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의 급식은 당연히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 공동체 정신이라며, 양측 모두 윤리담론을 내세운다. 그런데 무상급식은 결국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 역시 때로 윤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윤리가 약자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강자를 압박하기 위해 윤리를 내세우지만, 강자는 윤리가 아니라 현실을 말한다. 강자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자세라며 언제나 ‘지금 이대로’를 말해왔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대로의 현실보다는 다른 현실을 상상하기에, 무상급식에 찬성하고 나아가 무상의료까지 상상한다. 더 많은 세금과 더 많은 복지를 상상하며,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이는 내가 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무상급식이 공짜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성실하게 세금을 냈고 간접세까지 하면 나보다 가난한 자들도 세금을 냈듯, 한국사회 구성원은 모두 납세자다. 무상급식 논란에서 나는, 내가 국가에 낸 돈으로 우선 내 아이 밥부터 먹이겠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뿐이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이 무한경쟁에서 나도 탈락할 수 있고, 그러면 실직한 아빠를 두게 된 내 아이가 내일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슬퍼지는 것이고, 내 아이가 큰 병에 걸리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낸 세금이 더 많은 복지로 돌아오기를,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 이대로’의 세상과는 다르기를 상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내가 낸 세금을 우선 내 아이 밥값으로 사용하자는데, 누군가는 이를 공짜라고 한다. 더구나 부자들은 자기들에게까지 공짜밥을 주면 안 된다며, 급기야 약자의 논리인 윤리를 들고 나왔다. 나는 부자들도 세금을 냈기에 당연히 무상급식의 권리가 있다고 보지만, 그들은 그것이 비윤리적이란다. 언제부터 한국사회의 부자들이 윤리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자들이 진정 국가재정을 염려한다면 부자감세 60조를 반납하는 것이 더 윤리적일 테다. 또 무상급식을 정말 거지근성으로 여긴다면 자신들도 누리는 무상교육을 거부해야 마땅할 테다.

그런데 부자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한다. 그들이 약자들의 언어인 윤리를 내세울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윤리가 어떤 상상력에 의한 것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궁금해졌다. 말하자면 그들이 개인의 부富가 그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힘에 따른 노동임금의 비대칭적 결과라고 상상해본 적은 있을까? 누군가의 부란 또 다른 누군가의 협력과 희생과 그리고 착취에서 발생한 것임을 그들이 상상이라도 해봤을까? 그래서 무상급식과 무상의료를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하는 것은 약탈도 징벌도 아닌 교정일 뿐이라는 것을, 거기까지도 윤리라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상력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그들이 타인의 권리마저 자기의 이익에 먼저 맞추어 계산하는 뻔뻔함을 어디에서 익혔을까 하는 것이다. 헤어지는 이유가 네가 역겹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여자가 뿌려준 꽃을 짓밟고 갈 수 있는 그 뻔뻔함이 궁금했다. 각자 나름의 근거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4대강 사업이 녹색성장일 수 있을 테지만, 4대강 사업비 30조에는 무감한 자들이 아이들 밥값에는 어찌 그리 예민한지 궁금했다. 또 서울시도 시드니처럼 멋진 오페라 하우스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5천억 세금이 내 아이 밥값보다 문화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내 삶에 더 이익이라면, 비록 오페라를 즐기지 않더라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수준 높은 국립오페라 합창단을 해체시킨 바로 그들이 오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뻔뻔함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가난한 사람들조차 그것을 무감하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궁금했다. 가난한 자들이 윤리를 내세워 누구보다 먼저 무상급식을 비판하고 나설 때, 나는 그들 가난한 자들의 윤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매번 궁금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를 가르치다가, 이는 어쩌면 자기를 버리는 남자(지배권력)에게 꽃을 갖다 바치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암기’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미학을 내 것으로 암기해온 사회에서,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자기 미래로 상상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을까? 지배권력(남자)의 뻔뻔함을 아름다움으로 단순 암기했기에, 말하자면 그들이 제시해준 대로만 세상을 암기했기에, 상상력을 잃어버린 자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었고, 이것이 ‘역겨운’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무상급식에 대한 나와 당신의 다툼이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어쩌면 상상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고 주문한 그날, 15살 아이는 두려움 없이 자기의 상상력을 펼쳐보였다. 상상력이 변혁의 힘일 수 있다고 느낀 것은 아이들의 시를 보면서부터였다. 그중 한 아이가, 「니가 뭔데」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었다.

니가 뭔데 우리 보고 / 청소하라는데? / 우리가 청소부가? // 니가 뭔데 우리 보고 / 교복 입으라는데? / 우리는 자기만의 개성이 있거든! // 니가 뭔데 우리한테 / 벌점 주는데? / 우리 부모님도 나한테 / 벌점 안 주거든! // 니가 뭔데 우리 보고 / 자지 말라고 하는데? / 우리는 한창 성장기거든! // 니가 뭔데 우리 보고 / 시를 쓰라고 하는데? / 나는 장래 희망이 시인이 /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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