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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책으로 말걸기]항상 우울한 진아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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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0-06 17:21 조회 6,09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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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진아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아버지도 술을 줄이시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아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우울하고, 갑자기 날카로워져서 아이들과 말다툼은 계속 되었다. 이런 진아의 기분에 나 역시 진아와 이야기를 나누기가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라도 좋지 않으면 진아의 기분은 더 우울해져 아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진아 주위에만 가도 ‘어둠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였다. 1년 이상을 만나면서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그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먼저 신청하거나 하지 않았고, 항상 친구들이나 교사가 권하면 마지못해 하는 척 하였다. 그게 마음에 걸려 이번 여름 캠프를 권하지 않았더니 자신이 얼마나 여름 방학 때 할 일이 없는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한 권씩 빌려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이들과 책을 빌려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지 일 년만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책을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진아였다. 물론 진아가 바로 책을 빌려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아침마다 10분 독서를 하라고 하시는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실마다 책 있잖아. 거기 재미있는 책 많은데…”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고요. 다 별로에요.”

이 정도면 내게 책을 추천해달라는 이야기인데 괜히 장난 걸고 싶어서 도서실에서 빌려 보는 건 어떤지 물었더니 이상하게 도서실에서만 빌리면 연체가 된다고 했다. 진아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이야기하게 하고 싶은 욕심은 이쯤에서 양보하고 요즘 연애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한 것이 생각나서 『호기심』을 빌려주었다. 단편이라 아침독서에서 짧은 시간에 읽기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자세히 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줄거리 이야기도 들려주고, 작가 이야기, 이 책을 읽은 다른 아이들의 반응까지 이야기해주었다.
진아가 책을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그 다음 날 방과 후였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창밖에는 곧 비가 올 것 같은 우울한 날씨였는데도 표정이 밝았다.

“다 읽었어요. 재미있어서 수업시간에도 몰래 읽었어요.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어요. 이런 책으로 또 추천해주세요. 저 책 한 권 다 읽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뿌듯해하는 진아만큼이나 나 역시 뿌듯했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바로 일어나서 책꽂이로 갔다. 진아도 옆에 따라왔고, 한 권 한 권 꺼내서 책 소개를 해주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장편이야. 좀 두꺼워 보이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사실 무척 우울한 이야기거든. 어떤 집에 아버지가 크게 빚을 지고 도망가고, 엄마랑 딸이랑 아들이랑 하루아침에 살 집도 없이 쫓겨나게 되지. 엄마한테는 차가 있어서 3명은 그때부터 차에서 생활을 하게 돼. 딸이 주인공인데 어떻게 하면 먹고 살지 고민하다가 부잣집 개를 훔친 후 사례금이 걸리면 돌려주는 방법을 생각해 낸 거야. 그리고 ‘개를 완벽하게 훔치는 방법’을 고민한다는 이야기야. 정말 우울한 이야기인데 읽고 있으면 유쾌해져.”

진아는 이 책을 빌려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돌려주지 않았다. 일부러 읽고 있는지, 다른 책으로 바꿔줄지 물어보지 않았다. 진아가 고르더라도 좀 더 쉬운 책으로 권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아 앞에서 좀 더 아이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권해주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조금 지나서 진아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제게는 무리였던 것 같아요. 너무 길었어요. 전 짧은 책이 맞나 봐요. 그래도 이렇게 긴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니 좋아요.”

이번에는 진아와 책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우울한 기분은 항상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주변도 같이 우울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아는 우울증도 전염병인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은 두 동생들도 같이 우울해져 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열네 살』이었다. 조금 쉬운 책으로 권해달라고 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림이 정말 여느 만화책 같지 않게 정교하며 예술적이지 않느냐며 그리고 간단한 줄거리를 호들갑스럽게 보여주었고, 진아는 나의 그런 책 추천방법이 싫지 않았는지 내게 책장사를 해도 되겠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그리고 며칠 뒤, 늦은 밤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저도 절 위해 살아보려고요. 싫다는 거 싫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아이들과는 이 책을 읽으며 보통 아들의 심정으로 읽게 되는데 진아는 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했다고 했다. 집이 너무 싫고 무섭고 감당하기 힘들어서 집을 나가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첫째라서 아버지도, 엄마도, 두 살, 열 살 차이 나는 동생들을 다 이해하려고 했다. 아니, 이해라기보다는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이 심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은 진아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자기주장이 강한 둘째에게는 아무 것도 맡길 수가 없었다.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고 그냥 자신이 참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진아는 무척 많이 참고 한 번씩 터트린 것이다. 그냥 이유 없이 화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요즘 계속 어떻게 죽어버릴까 고민 중이었다. 인생이 전혀 좋아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진아가 예전과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계속 새로운 책을 추천해주고 있다. 그리고 읽은 책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 흥분하며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도 예전보다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진아는 다른 사람을 비추어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도 싫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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