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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사 나는 교사다]아이들… 저‘생명의 나무’앞에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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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9-05 21:13 조회 6,18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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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턱 막혔다, 가슴이 떨렸다
내게 올봄은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아니었다. 우울하고 캄캄했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니더라(春來不似春)’는 옛말이 이토록 실감난 적이 있었던가? 왜 그랬을까…?
올해 나는 난생처음으로–선생 노릇 시작한 지 25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 처음으로–학년 부장이란 직책을 맡았다. 1학년 부장. 해서 3월이 다 가고 4월이 오도록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학교에 묶여 있었는데, 좀 늦게 출근하게 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우리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내가 사는 9동부터 8,7,6,5동 할 것 없이 20년 이상 자란 은행나무들과 꽃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마구 잘려져 그 대부분이 아주 전봇대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산채만 한 괴물이 무자비한 큰 칼로 눈 아래로 우뚝 자란 여린 나무의 머리와 목과 가슴과 팔을 뭉텅뭉텅 쳐버렸다고나 할까. 작년까지만 해도 탐스럽게, 아름답게 수십 송이 흰 꽃을 피워 올린 목련나무들까지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부랴부랴 관리소장에게 전화했더니 아파트 동 대표자 모임에서 ‘적법하게’ 결정해 맡긴 조경회사에서 전지를 한 것이라고 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무 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건 전지가 아니라 벌목이었다. 학교에 출근해서도 가슴이 떨려 수업까지 갈팡질팡할 지경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아파트 대표자들의 대다수가 나무의 전지를 결정할 때 나무야 때가 되면 한번씩 ‘시원하게’ 쳐야 하며 치고 나면 다시 자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 대표자 회의 회장도 관리소장도 전지에 대해 전혀 무지할 뿐 아니라 나무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아파트 대표자 회의에서 무슨 이사를 맡고 있다는 50대 아주머니는 ‘저렇게 나무를 함부로 칠 수 있느냐, 저 불구의 나무가 보이지 않느냐’는 내 항의(거의 절규)에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면 다시 나듯이 나무도 몇 년 지나면 그대로 다시 자랄 건데 뭘 그러세요’라고도 말했다!

마침 학교 출근 않는 토요일이 왔기에 마지막 남은 11동 나무만이라도 손 못 대게 하기 위해 나와 아내(그리고 둘째 딸 친구의 어머니)가 톱을 든 일꾼들을 막고 나섰을 때 (‘더 자른다면 드러눕겠다’고 나는 말했다) 지나가던 주민 몇몇이 동조도 하고 같이 항의도 해 줘서 결국은 막아내긴 했지만 이미 처형당해 흉측한 몰골로 서 있는 나무들을 출퇴근길에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화가 치밀어 올랐고 연신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 무지한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 이런 아파트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하긴, 딴은, 이 정부 들어 가슴 미어지고, 화가 치밀고, 한숨이 푹푹 터져 나오는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멀쩡한 4대강이 유린당하고,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제주도 강정 구럼비 너른 바위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핵발전소의 폭력과 맞물려 있는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나선 70대의 한 어르신은 분신까지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내 코앞에 벌어진 게 아니라서 내겐 절박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걸 강 건너 불처럼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아파트의 은행나무와 꽃나무 몇 그루의 참사 앞에 더 분노하고, 더 절망하고, 더 가슴이 아파 몸살이 난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3,4,5월 봄 내내 말이다.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올봄이 봄이 아니었던 이유는 학교에서도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니 우리 반 아이들에 대한 나의 마음의 태도 때문이라 해야겠다. 문제의 발단은 야간 자습이었다. 대한민국 인문계 고교의 ‘야자’만큼 힘센 것도 있을까? ‘야자’는 단순한 강제 야간자습이 아니다(문제가 적잖게 복잡하다). 그러기에 당장 없애버려 마땅하다고도 할 수 없다(철폐론자인 내가 경험하기에 그러기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왜? 이를테면 동굴 밖으로 나와 있는 야자라는 괴물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치자. 그러면 뭐가 줄줄이 딸려 나올까? 생각나는 대로 꼽아 본다면, 갈수록 강화되는 경쟁지상주의와 학벌주의,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시인이 죽어버린 사회, 민주주의의 실종, 감옥으로서의 학교, 전인격적 교육의 고사枯死, 학생인권의 사각지대, 학교 폭력의 난무, 생명의 나무인 아이들의 신음소리, 한숨소리…라는 무수한 문어발을 가진, 그런 괴물이 아닐까? 과장이 심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모순을 집약해 놓은 곳이 바로 야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그놈의 야자 때문에 학기 초부터 봄 내내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거의 전쟁을 치렀다. 나로 말하면 전통적으로(!) ‘잘 보내주는(야자를 잘 빼주는) 선생’이다. 말하자면 야자라는 부조리한 관행을 나름 탄력적으로 운용해 왔다는 거다. 아프다는(혹은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아이를 우격다짐으로 잡아 놓지 않았고 때론 내가 나서서 반 전체를 야자에서 빼 가지고선 ‘문화 활동(연극이나 영화보기)’하러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 소문을 들어서였겠다. 3월 중순경엔가 우리 반 녀석들이 내게 한다는 말이 걸작이었다. “선생님은 천사라든데요.” 기분 나쁘지 않은 말이었지만 수상쩍은 말이기도 했다. 나를 무골호인형의 몰랑몰랑한 천사로 낙인찍어 놓고선 제멋대로 해볼 심산이 없지 않았을 것이니까! 과연 그런 혐의는 날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야자, 가능한 한 빼먹지 말고 한번 견뎌봐라. 고등학교 1학년 3,4월 시작이 중요하니까 괜히 마음 헐렁하게 가지지 말고 일단 중간고사까지 긴장해서 생활해보자. 그러면 내가 적절하게 보내 줄 때 보내 주고 우리 반 전체 야자 찢고 야구도 보러 가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일제히 박수까지 쳤는데, 동상이몽이었을까? 예닐곱 명이 한 그룹이 된 녀석들은 가히 고삐 풀린 망아지에 마이동풍, 한마디로 제멋대로였다. ‘오늘은 좀 남아서 공부해라. 가봤자 니네들 피시방으로 직행할 게 뻔하니까. 그렇지? 남아 있어라.’ 하면 ‘예, 예.’ 대답은 잘도 했다. 그러고는 핑 말도 없이 가 버리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벌을 주고 야단을 쳐도 니는 지껄여라 나는 간다, 일단 도망가고 벌은 나중 생각한다는 식이었다. 그놈들만 그러면 이럭저럭 반이 망가지지는 않도록 조절이 가능했겠는데, 녀석들과는 또 다른 그룹이 있었으니, 나는 거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아이들은 대책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이토록 소통이 안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곰곰 궁리하다가 결국 문제는 그놈의 야자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칠 때면 절로 한숨이 나왔고 야자 감독을 할 때면 자신이 한없이 싫어졌다. 부조리한 관행이라는 현실(저소득층 자녀가 많은 학교에서 야자는 보호소나 탁아소 구실을 한다)과 당장은 불가능한 교육적 이상(그야말로 자율 학습)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신이 미워졌다는 말이다. 아침 7시 50분부터 밤 9시까지 두 번 밥 먹는 시간을 제하면 내내 좁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열여덟 살 청춘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강제 야자 시간의 정숙 지도)은 애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정신적・육체적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선생 노릇 당장 그만두고만 싶어졌던 것이다. 나쁜 ‘교사–정원사’인 나는 저 ‘생명의 나무–아이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손발을 잘라버리고는, 혹은 푹 재워버리고는 아, 참 조용하고 평화롭구나 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그렇게 학교에서의 봄도 캄캄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게 묻는다
이제 곧 여름이다. 녹음은 더욱 우거질 것이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싱그러운 바람도 불어 올 것이다. 그러나 봄이 간들, 여름이 온들 무엇 하는가? 나는 어제도 오늘도 우리 아파트의 불구의 은행나무 아래를 걸어 다녔다. 또한 오늘도 나는 야자라는 괴물의 그림자에 속수무책이다. 놈은 아이들과 나를 이간질하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한데!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있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생명의 나무라는 것, 누구도 함부로 자르고 재단하고 죽여선 안 된다는 것, 비록 야자 때문에 나와의 관계가 가끔 엉망이 되고 마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생명의 나무인 한 무언가 ‘시원하게’ 정리 혹은 전지하고(잘라버리고) 싶은 악마적・폭력적 유혹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게 물어본다.

‘아이들… 저 생명의 나무 앞에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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