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닷다의 목격』 최상희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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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06-02 16:46 조회 2,331회 댓글 0건본문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오롯이 마주하는 용기
여성지 기자에서 논술 강사로 전직하셨다가 청소년소설 작가를 꿈꾸게 되셨다고요.
서울에서 잡지 기자로 10년 정도 일했어요. 직장생활 3년, 5년, 10년 주기별로 찾아오는 무력감 같은 것이 있었고 더 다니기는 괴로워서 직장을 그만뒀어요. 그리고 한동안 남미 여행을 하다가 제주도에 정착하게 됐어요. 서울에서 제일 먼 곳이 제주도잖아요. (웃음) 어쩌다 보니 제주도에서 2년 정도 지내면서 우연한 기회로 중고생을 가르치는 논술학원 선생님이 됐어요. 논술학원을 다니는 학생 중엔 학업능력이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런데도 책 읽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왜 못 읽었어?” 하고 물어보면, “어려워서요.”라고 대답했어요. 신기하게도 커리큘럼에 있던 정유정 소설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학생들이 잘 읽더라고요. 학생들과 함께 그 책을 읽으면서 청소년소설 특유의 힘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독서의 기쁨’이 오랜만에 되살아났고 나도 이런 청소년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재도 다양하고 쓰는 방식도 자유로운 청소년소설의 넓은 스펙트럼이 좋았어요. 그때부터 청소년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도 하고 공모전에 응모도 했어요.
출판사 '해변에서랄랄라'를 운영하며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내는 일을 하셨다고요. 책 만드는 일은 어쩌다 시작하게 되셨나요?
사실 저는 청소년소설 작가보다 여행작가가 먼저 됐어요. 아는 선배가 제주도에 2년이나 있었으면 뭐라도 하나 써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셔서 『제주도 비밀코스 여행』을 썼는데 뜻하지 않게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어요. 당시에는 제주도가 인기 없는 여행지였는데 책이 나올 때 올레길과 저가항공이 생긴 거예요. 그러면서 제주도가 여행지로 매우 유명해졌고 덩달아 책도 잘 팔렸어요. 출판사의 요청으로 강원도, 전라도 등을 다룬 몇 권의 여행서를 더 내게 되었는데, 큰 출판사의 인프라가 좋긴 하지만 저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동생과 가끔 우리가 출판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어느 여름날 맥주를 마시면서 ‘해변에서랄랄라’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만들자고 즉흥적으로 결정했어요. 제주에서 살 때 집 밖으로 보이던 해변이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웃음) 동생이 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워서 실무를 맡고 있어요. 제목, 디자인, 편집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독립출판의 묘미를 잘 살린 출판사로 운영하고 있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혹독하고 흉포한 곳"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마음 한편에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으실 것 같아요.
청소년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항상 밝은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지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깃든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희망을 이야기하는 청소년소설이 좋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써야만 하는 이야기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면하고 싶고 피하고 싶은 폭력과 차별, 혐오에 대해서요. 청소년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1차 독자가 어른들이라는 점이에요.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하는 순서인데, 어른들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둡고 슬픈 이야기는 청소년소설에 별로 없어요. 하지만 슬픔을 위로 하는 건 슬픔일 수 있고 힘든 상황일수록 도움이나 연대 같은 가치들이 빛나니까요. 그리고 따져 보면 제 소설들은 대체로 희망을 주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독자들이 제 소설을 읽고 위안과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전혀 친절한 곳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댈 구석이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튤리파의 도서관」에서 오우나가 키우는 고양이 로라, 「여름의 고양이」에서 문여름이의 목에 착 달라붙는 고양이, 『마령의 세계』에서 마령이 키우는 고양이 만옥 등 작가님의 작품에는 참 많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요. 작가님께 고양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3~4년 전에 치앙마이에서 매일 보던 길고양이에게 밥을 줘 본 게 인연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고양이를 귀여운 존재, 길고양이는 애처로운 존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으로 고양이가 제 무릎으로 올라왔을 때는 신기하고 놀라웠던 것 같아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와 보니 길고양이가 정말 많았어요. 가끔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매일 주게 되고 그러다 보니 고양이가 제 인생에서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작년 8월부터 마당에 있던 고양이 중 한 마리를 중성화해서 집에 들였어요. 이제 고양이는 제 삶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가 됐어요. 「튤리파의 도서관」에서 우나가 고양이 로라는 자신의 삶이고 가족이고 친구고 우주라고 말하는 독백을 쓸 때만 해도 제 상상이었는데, 직접 키워 보니 ‘정말 그렇구나’ 싶었어요. 고양이가 제 인생을 정말 많이 바꿔 놓았어요.
작가의 작업실을 자유롭게 누비는 고양이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소수자들의 내밀한 이야기
청소년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청소년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요. '요즘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계신가요?
『바다, 소녀 혹은 키스』 사계절, 2017 |
요즘 십 대들이 어떤지 너무 궁금해요. 뉴스 같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십 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긴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쓰는 유행어나 좋아하는 트렌드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제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 어요. 여고생 조카가 있거든요. (웃음) 조카에게 궁금한 걸 다 물어봐요. 이 번에 동아리를 주제로 쓴 소설이 있어서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어떻게 하 는지, 요즘 동아리는 어떤지도 물어봤어요. 십 대들이 하는 고민이나 무슨 일로 힘든지도 아이 엄마로부터 전해 듣고 있어요. 코로나 전에는 학교에 강연을 가기도 했었는데, 그때 학생들을 보며 사랑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 했던 적이 있어요. 『바다, 소녀 혹은 키스』가 그때 쓴 소설이에요. 당시는 세 월호 참사가 있었던 해였고 작가들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휩싸였던 때였어 요. 그런데 작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사랑, 연애, 고백 같은 이야기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사랑 이야기에 변함없이 큰 에너지를 쏟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열정을 잊고 있다가 사랑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 소설을 썼어요. |
『닷다의 목격』에 수록된 단편들을 읽다 보면 소수자, 부조리한 현실, 차별과 혐오, 사회 적 고립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돼요. 작가님은 평소에 세상을 어떤 렌즈로 보시나요?
오늘날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주제들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차별과 혐오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사회가 차별과 혐오를 계속 부추기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사회가 조금 진보했다가 다시 퇴보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예전에 어떤 독자가 왜 제 소설 의 주인공들이 다 남자인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걸 깨달았어요. 깨닫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2017년에 3개월간 스웨덴에서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참여했는데요. 그곳에서 성별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교통 인프라를 보고 정말 놀랐어요. 제가 스웨덴에 있었을 때 한 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사회운동이 크게 일 어나요. 두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어요.
닷다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너구리, 바닐라빈과 학교에서 조우하고 몰카 범죄를 목격하는데요. 이처럼 판타지에 사회문제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신 이유는요?
은유가 두드러지는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잘 와닿기도 했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쓰면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뉴스처럼 그대로 보여 주면 ‘나랑 상관없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인가 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오히려 작품이 판타지나 SF의 형식을 띠면 ‘나’와 연결되는 이야기, 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이야기가 돼요. 판타지 요소가 소설에 들어가면 ‘타인의 이야기’로 쉽게 여겨지지 않고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더욱 북돋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써 보고 싶었어요. 「닷다의 목격」을 만약 ‘타인에게 무관심하면 할수록 몰카 범죄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세지를 드러내서 썼다면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닷다를 판타지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들이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닷다의 능력을 초능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의 개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독자들 이 제가 판타지나 SF라고 의도하지 않았던 작품들까지 판타지로 해석하는 건 의외여서 재밌어요. (웃음)
왜 주인공의 이름이 닷다가 되었는지, 왜 바닐라빈은 너구리인지 궁금해요. 작가님에게 등장인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서울에서 살았을 때 새벽 산책을 자주
했어요. 새벽에 상암 월드컵경기장 쪽 천변
산책을 하면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좋았어요. 거기는 도시 한복판인데요. 하루는 거기서 너구리 한 쌍과 마주쳤어요. 만화에서 봤던 것처럼 두 발로 서서 저를 빤히 쳐다보는데, 무겁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어요. 인터넷
으로 도심에서 너구리가 나오는 이유를 찾아
보니 먹이가 부족해서 내려온다고 하더라고
요. 그 이후로도 간간이 마주쳤어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너구리를 지나치는데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운 존재들이 주변에 많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이 바닐라빈을 너구리로 만든 것 같아요. 교복 입은 너구리가 느닷없이 학교에 등장하면 웃길 것
같지 않나요? (웃음) 닷다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빌려 와서 쓴 건데요.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닷다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면 흥미로운 소설이 나올 것 같았어요. 저는 캐릭터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름만 등장하는 인물이더라도 저는 그 아이가 주말에는 무얼 하면서 놀고 교우 관계는 어떻고 어떤 옷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 특징들을 종합할 수 있는 이름이 생기면 그때부터 그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여요. 저는 결말을 모르고 쓰기 시작하고 캐릭터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요.
세상은 사소한 것들로
건강하게 유지된다
2011년에 출간된 첫 장편 소설 『옥탑방 슈퍼스타』부터 최근작 『닷다의 목격』까지 작품 들의 기조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쓰고 싶은 주제를 썼다면 이제는 써야만 하는 주제에 좀더 주력 하는 것 같아요. 점차 제 관심을 소수자, 소외 계층 문제에 두게 되었고요. 제 작품에 남자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다가 이제는 대부분 여자 주인공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고요. 『하니와 코코』가 본격적으로 여성 화자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아이가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해 편의점에서 구조 요청을 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보면서 이 소설을 구상했는데요. 조사해 보니 아이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 소외된 아이들을 대대적으로 전수조사했어요. 『하니와 코코』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더 많이 가지면서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옥탑방 슈퍼스타』 한겨레틴틴, 2011 |
뜨거운 여름날, 청량음료를 마시며 학교도서관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읽기 좋은 작품을 두 권만 추천해 주신다면요?
켄 리우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과 제가 참여한 앤솔로지 『웃음을 선물할게』를 추천해요. 켄 리우는 주로 SF소설과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예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인데요.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은 ‘아, 내가 이걸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정도로 근사하고 아름다운 소설이에요. 『웃음을 선물할게』는 다양한 결을 가진 작가들의 웃음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서 읽는 재미가 큰 작품이에 요. 저도 「여름의 고양이」라는 단편으로 집필에 참여했답니다. 올여름 학교도서관에서 다 함께 읽어 보시길 바라요.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가 얼핏 비치기도 한다는 작가님의 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은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소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가족들과 나누는 카톡이라든가 어린 조카들과 보내는 시간, 겨울 지나 어김없이 움트는 새싹과 어느 봄날 툭툭 터뜨리듯 피어나는 꽃망울, 한여름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차가운 수박 한 쪽, 소박하지만 든든한 밥 한 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는 사과 같은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제게 작은 기쁨을 주고 그로 인해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역시 제가 작가가 된 순간이겠죠. 그리고 여전히 작가로 살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매일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