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재영 책수선 대표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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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05-02 16:13 조회 2,070회 댓글 0건본문
오랜 친구의
옷과 구두를 고치는 마음
올 칠월까지 책 수선 예약이 꽉 차셨다고요. 출간 인터뷰와 수선 의뢰가 많아 바쁘실 것 같은데, 요즘 하루는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밥 먹고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에 가서 밥 먹어요. (웃음) 제가 하는 일이 워낙 집중을 요하는 일 인 데가 시종일관 작업실에서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하다 보니 운동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요즘엔 일 의 강도가 세서 예전처럼 독서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쉽지 않아요. 가끔 <프렌즈>나 <굿 플레이스> 같은 시트콤을 보면서 긴장을 풀고 운동한 뒤 작업실에서 일을 계속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책 수선 의뢰를 이메일로 받는데, 메일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의뢰인이 직접 책을 들고 작업실을 방문해 주시거나 고칠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저는 그 책을 꼼꼼히 점검하고 반드시 수선해야 하는 부분과 같이 수선 하면 좋을 부분 등에 관하여 의뢰인과 상의를 해요. 모든 논의가 끝나면 본격적인 책 수선에 들어가요. 의뢰인이 맡기는 책마다 파손의 정도가 다르다 보니 수선 과정도 다른데, 아무리 빨리 작업해도 일주일 정 도 걸려요. 경우에 따라 넉 달까지 걸리는 책도 있고요. 수선 전 책 사진을 촬영하고 수선이 끝나면 의뢰 인에게 작업이 완료됐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종종 멀리 사시는 의뢰인에게는 제가 직접 책을 보내드리기도 해요.
미국에서 북아트와 제지를 전공하고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셨어요. 상사가 꽤 무서웠다고 하셨는데, 동고동락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나 배움도 있으실 것 같아요.
제게 일을 가르쳐 준 분은 완벽주의자셨어요. 책 수선 일의 특성상 그런 성격이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그럴수록 작업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니까요. 제가 봤을 때는 이 정도면 결과물이 충분히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다시”라는 말을 계속하셨어요.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고 가끔 화를 내시기도 했어요. 그곳에서 일했던 인턴들이 일을 빨리 그만두곤 했는데, 저는 아무리 뭐라도 해도 강하게 단련 된 무언가(?)가 있어서인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도 버텼어요(편집자 주: 책 보존 연구실은 대표가 재학했던 학교 지하에 있던 도서관으로, 대표는 3년 6개월 동안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연구실에서 제가 가장 오래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분에게 철두철미함을 배웠어요. 책 수선 작업만큼은 실수를 줄이는 게 몸에 밴 것 같아요. 애증의 관계이긴 하지만 저한테 책 수선 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상사는 같은 학교의 같은 학과를 졸업한 높은 선배이기도 해요. 제가 책 수선을 할 때 모토로 여기고 생각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상사가 하신 이야기예요. “모든 종이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 번 접히거나 스크래치가 나면 아무리 감쪽같이 복원해도 종이의 접힌 자국은 영원히 남기에 언제든 똑같이 파손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 하셨던 말이에요. 상사가 하셨던 말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에요.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차리셨는데, 세무서에서 사업을 등록할 때 업종을 무엇으로할지 공무원들이 난감해했다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어요. 창업 뒤 일 년 동안 어떻게 버티셨어요?
재영 책수선의 로고 | 출판업으로 분류할지 서비스업으로 분류할지 아니면 예술 업종에 속하는지를 놓고 세무서 직원들끼리 의견이 분분하더라고요. 최종적으로는 서비스업으로 결정됐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 결정이 맞는 것 같아요. 책 수선을 구두 수선이나 옷 수선과 같은 카테고리로 엮는 게 맞으니까요. 작업실을 내고 난 다음에 책 의뢰가 과연 들어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의뢰를 해 주셨어요. 사람들 마음속에 한 권쯤은 고쳐서 간직하고 싶은 책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오히려 보통의 초보 사장이 겪는 난관에 많이 부딪혔던 것 같아요. 책에도 썼듯이 작업실 계약을 하거나 임대보증금 보 호를 받는 법을 알아보거나 미팅하고 정산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
작업실을 찾으러 다닐 때도 애먹으셨을 것 같아요. 수선하는 책을 잘 보존하려면 작업 환경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습도가 높은지 체크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어요. 책 수선 작업실의 특성상 해가 많이 들면 안 되기 때문에 작업실이 위치한 방향도 북향이어야 했어요. 작업에 필요한 환경적 요건을 모두 따지느라 아예 습도계를 들고 작업실을 구하러 다녔죠. 매물을 볼 때마다 실내 온도를 확인하느라 조금 힘들었어요. 이전에 머물 던 작업실도 그렇고 이번에 옮긴 작업실도 좋은 공간으로 잘 구한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어요.
대표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국에선 '책 보존가(Book Conserva-tor)'로 불린다고 하셨어요. 화려한 수식 대신 '수선'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는요?
책 수선가를 가리키는 정확한 명칭은 ‘책 보존가’ 혹은 ‘지류 보존가’예요. 제 브랜드 간판에는 ‘책’ 이라고 명시돼 있지만, 실제로 제가 배운 일은 지류 전반에 관련된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 이 책 보존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낯설고 어렵게 느 껴지실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보존이라는 단어보다 친근하고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단어를 고민 하다가 ‘수선’이라는 말을 생각해 냈어요. 제 브랜드를 ‘재영 책수선’이라고 지은 건 책 수선도 옷이나 구두 수선처럼 우리 일상에 자연스레 스미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우) 한 의뢰인이 맡긴 성경책이 재영 책수선 대표가 맞춤 제작한 프레스 사이에 끼워져 있다. 프레스는 종이나 책을 눌러 고정시켜 놓는 도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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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새로운 책으로 만듭니다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책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희귀서적이라는 긴장감으로 일한다고요. 수선에 앞서 의뢰인과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맡기는 책을 얼마나 자주 펼쳐보실지, 오랫동안 소장하실지, 아니면 수선해서 다른 분에게 선물로 드릴 것인지 등의 질문을 통해 의뢰인의 수선 의향을 아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래야 저도 의뢰인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수선 방향을 제시할 수 있거든요. 방향이 결정되고 나면 작업할 책의 외형과 내형 디자인, 관련 구조를 제가 제시해 드려요. 간혹 알아서 해 달라는 의뢰인들도 계시는데요. (웃음) 엄청 떨려요. 제가 제시해 드린 수선 방향이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뢰인들에게는 제가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 거기서 제일 마음에 들어 하시는 안을 택하게 해서 수선을 진행해요. 혹은 노파심에 작업하는 중간중간 상황 전달을 통해 의뢰인이 원하는 책 수선 방향이 맞는지 점검해요. 수선에 들어가기 전에 책 사진을 찍는 이유는 수선을 맡긴 책이 어떤 상태였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사진이 증거가 되어 주기 때문이에요. 나아가 수선을 하면 책의 이전 모습이 사라 지는 것이 아깝더라고요. 저는 책의 수선 전 모습에 매력을 느껴요. 그래서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으로 기록해요. 의뢰인에게 책을 돌려 드릴 때 수선 이전의 책과 수선 이후의 책의 모습까지 모두 전해 드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고요. (우) 『망가진 책의 기억을 되살리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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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차린 후 처음 수선하신 책이 『89 시행 개정 한글 맞춤법 수록 국어대사전』이라고 하셨는데, 첫 작업 책이라서 잔상이 진하게 남으셨을 것 같아요.
특히 NT cutter 브랜드의 칼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썼던 데다 워낙 아끼거든요. 미대생들은 도구를 험하게 써야 할 때가 많아서 칼 하나는 반드시 저만 쓰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에게 빌려 주는 용도로 쓰기 위해 칼만큼은 두 개를 소장하고 있어요. 이젠 쓰지 않지만 여전히 애정하는 붓은 제가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연구실에 출근한 날 상사로부터 받은 선물이에요. 그 붓은 제가 일할 자리에 배정되었을 때 “최고령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는데, 오히려 새 붓보다 일하기에 더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상사는 제가 왜 그 붓을 원하는지 아셨을 것 같아요. (우) 책 수선 도구 중 하나인 본폴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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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생을 넘어 인생의 온기를 더하는 일
책 군데군데 "테이프를 쓰지 마세요!"라고 강조하셨는데, 첨엔 유머러스했다가 정말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종종 책 보수 작업을 하시는 사서샘들을 위한 깨알 팁을 전하신다면요?
책을 수선하면서 종종 그 안에 낀 벌레들을 만나요. 이 친구들은 아늑한 공간을 찾아 들어왔을 뿐인데 책 틈에 껴서 죽고 만 거잖아요.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개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틈틈이 모으고 있어요. 자수를 넣어 베드를 제작하는 등 벌레들의 유골함을 정성 들여 만들고 있지요. 의뢰로 받은 책들을 수선하면서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자투리들도 꽤 되더라고 요. 그걸 한 권 한 권마다 아카이빙 해 두 고 있어요. 전시의 형태가 될지 또 한 권의 책이 될지 모르지만 암암리에 준비하는 것이 있답니다. (웃음) 다양한 분야와 협업해 보고 싶은 마음도 커요. ‘월간 윤종신’과 함께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 본 일도, 책 수선가가 나오는 드라마에 자문을 해 준 일도 책 수선을 잘 모르는 분들을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에요. 책 수선가가 하는 일을 소개할 수도 있고, 저 역 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들을 올해 초입에 많이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 같아요. 작업실에서 일에만 매달 리다 보면 외골수가 되는 것 같아서, 해소가 필요할 때마다 제 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들을 두루 살피고 있어요.
재영 책수선 작업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