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교사 나는 교사다 - 나는 올해 몇 점짜리 교사가 될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7 21:59 조회 6,752회 댓글 0건본문
평가의 계절
11월 말은 그야말로 교사가 완전 녹다운되는 시기이다. 2학기 말이라 풀릴 대로 풀린 아이들과 기말고사를 무기로 씨름하며 수행평가 채점과 기말고사 진도를 나가느라 온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학생들이나 동료 교사들과 트러블이 있으면 누구나 ‘학기 말이라 그래’라는 말을 한다. 이런 시기에 교사의 좌절을 더하는 것이 생겼다. 바로 교원평가이다.
교원평가의 무용성, 부작용 등이 언론에 나기도 하지만, 학교에서는 교원평가가 그야말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해진 질문에 답하도록 되어 있는 교원평가는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10% 미만의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학부모조차 이런 식의 교원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데도 교육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원평가 참여율이 낮은 학교의 관리자에게 경위서를 요구하는 등 교원평가 참여에 대한 고삐를 죄고 있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들은 컴퓨터 수업시간에 교원평가를 하도록 독려하고, 단위 학교에서는 이것은 수업권 침해라고 문제 제기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 학교도 교원평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교사들 몰래 수업시간에 동원했다가 교직원 회의시간에 교원평가를 강제한 사실에 대해 사과한 사건이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원평가가 올해도 실시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평균 미달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인천에서 교사로 일하는 남편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자기, 교원평가 결과 봤어?”
“아니, 왜?”
“나 봤는데 좀 충격받았어.”
“왜?”
“학교 평균보다 낮더라구.”
교원평가는 1,2,3,4,5 단계의 척도를 가지고 있고, 3이 보통이다. 학교 평균이 3.7 정도이고 자신이 그보다 0.2 정도 낮아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뭘 그리 못했을까? 말을 더듬었나? 목소리가 작았나? 수행평가를 짜게 줬나? 그때 애들 앞에서 소리 한 번 질렀는데 그게 애들한테 나쁘게 보였나?”
마치 오래 사귄 애인이 이별을 고한 상황에서 변심의 이유를 고민하느라 날밤을 새우는 청년처럼 남편은 계속 자신의 수업을 복기하고 복기했다. 나는 안타까웠다.
“낮게 나온 지표가 뭔지 봐봐. 그런 거 반성하라고 교원평가 있는 거 아니야?”
“낮게 나온 지표? 일정하지가 않아. 대부분 3점 보통이고 몇 항목이 4나 5인데… 내가 전반적으로 무능한 건가?”
“자기야, 자기 고등학교 3학년 수업했잖아. 요즘 수능 EBS 연계가 너무 심해서 고3은 무조건 EBS 연계 교재 풀어야 되고, 근데 그거 이해할 수 있는 애들 반에서 10명 이내고, 나머지는 수업 거의 이해 못했을 텐데, 강제로 컴퓨터 시간에 교원평가 하게 되면 다 보통으로 체크하고 딴 거 하게 되어 있지, 누가 성의 있게 4,5점 표시하겠어. 교사가 나름대로 학생이랑 소통하면서 교육과정을 꾸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다 3점 때릴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가?”
남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보다 내가 왜 더 낮냐구. 다른 사람들도 그런 구조에 있는 건 똑같잖아.”
“그럼 물어봐, 동일 과목 선생님들은 어떻게 맞으셨는지.”
“싫어, 자존심 상해.”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교원평가를 강제하는 정도가 세서 이미 교원평가가 들어와버린 학교의 풍경을 보고야 말았다. 교원평가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 남편에게 보통인 지표의 부분에 집중하며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새롭게 해야겠다 반성하고 새로운 수업을 만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원평가의 지표들은 읽어볼수록 공허하기만 하다.
이러한 평가 문항의 무엇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반성하라는 말인가? 교원평가가 전반적으로
들어와 있지 않은 서울의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남편의 일을 계기로 나의 평가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남편이 왜 학교 평균에 기초해서 자신의 점수를 가지고 자기를 평균 미달의 교사로 괴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우수 교사가 될 수 없는가?
사실 대부분의 교사가 우수한 교사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교육과정을 학생들과 호흡하며 만들 수 없는 현재의 시스템에 많은 부분 기인하고 있다. 학교선택제 이후 대부분 인문계고등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보다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의 비율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문장에서 동경의 뜻을 물어봤더니 ‘중국 수도 아니야?’라는 대답을 하고 다른 학생이 그걸 고쳐주겠다고 ‘일본 수도야, 바보야’라고 대답한 개그 아닌 개그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요즘 인문계고등학교의 현실이다. 수능 언어영역을 풀 수 있는 어휘력과 독해력을 가진 학생이 한 반에 5명에서 7명 정도인 상황에서 수능의 EBS 연계율은 날로 높아지고 EBS 교재 여섯 권을 몇 명이 이해하든 한 번 풀어줘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학생들 대다수가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을 하도록 만들면서 그것을 근거로 교사를 평가하게 하고, 공교육을 살린다는 지금의 정책이 만들어내고 있는 코미디인 것이다. 원래 수능은 암기식 교육을 탈피하고 탐구력을 키우기 위해 생겼고, 그러한 취지를 뒷받침하고자 국정교과서는 검인정으로 바뀌고 언어영역은 언어 텍스트를 독해하는 시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EBS 연계율이 높아지면서 다시 국정교과서보다 더 큰 권력의 EBS 교재가 교실을 장악하고 있다. 교육과정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2학년 수업에서 자서전 쓰기, 소설 쓰기, 책 읽고 작가와 인터뷰 하기 등 다양한 수업을 시도했던 나도 내년에는 EBS에 내 수업을 맡겨야 할 것이다.
기대를 배반한 현실
원래 교원평가의 취지는 ‘도가니’ 사태에서 엿볼 수 있듯 답답한 학교 현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 학생들에게 성추행이나 성적 조작 등 비리가 일어나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현실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학교에 뭔가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오히려 교사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협력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 교원평가가 일반화된 학교들은 같은 교과를 들어가는 선생님들끼리도 수업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숨어든 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고립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피해로 돌아간다. 실제 같은 교과를 배우면서 다른 학습지로 공부하고 혹시 시험에 서로 안 가르친 것이 나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교과서나 EBS 교재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근거로 시험에 내다보니 수업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더 소통해서 수업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난하게 큰 흠집 없이 학교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형적인 입시 시스템에서 망가져가고 있는 우리 교육의 무능을 교사 책임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 내가 잘하면 나는 우수 교사가 되고 우리 교육도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교사들에게 자극을 주고 격려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교원평가의 속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교원평가가 만들어내는 교사의 내면
학생에게든 교사에게든 평가는 소통의 도구일 뿐이다. 가르치는 학생에게조차 사실 가장 좋은 평가는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능력이 부족한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그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 결과가 입시에 반영되는 시스템이 되면서 숫자만의 평가가 남게 되었고, 수능이라는 평가가 거꾸로 교육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원평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교사에게 격려와 자극을 주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상실한 채 나는 몇 점짜리 교사인가를 되뇌게 하는 평가는 결국 또 다른 족쇄가 되어 교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새 학년을 준비하는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3학년 할 거니까 문제집 수업 해야 되는데 교원평가 점수 잘 받으려면 문제집 풀이 수업을 이해할 수 있는 애들이 많은 반을 맡아야 되는데, 그럼 문과 남자반은 피하고 이과 여자반으로 해야겠네. 특수학급 애들 없는 반이어야 할 텐데, 방과 후에 알바 하고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없는 반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평가를 잘 받을 텐데…. 그런 애들은 전학 안 보내나 몰라.’
이것이 교원평가가 만들어내는 지옥의 내면이다.
11월 말은 그야말로 교사가 완전 녹다운되는 시기이다. 2학기 말이라 풀릴 대로 풀린 아이들과 기말고사를 무기로 씨름하며 수행평가 채점과 기말고사 진도를 나가느라 온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학생들이나 동료 교사들과 트러블이 있으면 누구나 ‘학기 말이라 그래’라는 말을 한다. 이런 시기에 교사의 좌절을 더하는 것이 생겼다. 바로 교원평가이다.
교원평가의 무용성, 부작용 등이 언론에 나기도 하지만, 학교에서는 교원평가가 그야말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해진 질문에 답하도록 되어 있는 교원평가는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10% 미만의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학부모조차 이런 식의 교원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데도 교육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원평가 참여율이 낮은 학교의 관리자에게 경위서를 요구하는 등 교원평가 참여에 대한 고삐를 죄고 있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들은 컴퓨터 수업시간에 교원평가를 하도록 독려하고, 단위 학교에서는 이것은 수업권 침해라고 문제 제기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 학교도 교원평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교사들 몰래 수업시간에 동원했다가 교직원 회의시간에 교원평가를 강제한 사실에 대해 사과한 사건이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원평가가 올해도 실시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평균 미달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인천에서 교사로 일하는 남편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자기, 교원평가 결과 봤어?”
“아니, 왜?”
“나 봤는데 좀 충격받았어.”
“왜?”
“학교 평균보다 낮더라구.”
교원평가는 1,2,3,4,5 단계의 척도를 가지고 있고, 3이 보통이다. 학교 평균이 3.7 정도이고 자신이 그보다 0.2 정도 낮아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뭘 그리 못했을까? 말을 더듬었나? 목소리가 작았나? 수행평가를 짜게 줬나? 그때 애들 앞에서 소리 한 번 질렀는데 그게 애들한테 나쁘게 보였나?”
마치 오래 사귄 애인이 이별을 고한 상황에서 변심의 이유를 고민하느라 날밤을 새우는 청년처럼 남편은 계속 자신의 수업을 복기하고 복기했다. 나는 안타까웠다.
“낮게 나온 지표가 뭔지 봐봐. 그런 거 반성하라고 교원평가 있는 거 아니야?”
“낮게 나온 지표? 일정하지가 않아. 대부분 3점 보통이고 몇 항목이 4나 5인데… 내가 전반적으로 무능한 건가?”
“자기야, 자기 고등학교 3학년 수업했잖아. 요즘 수능 EBS 연계가 너무 심해서 고3은 무조건 EBS 연계 교재 풀어야 되고, 근데 그거 이해할 수 있는 애들 반에서 10명 이내고, 나머지는 수업 거의 이해 못했을 텐데, 강제로 컴퓨터 시간에 교원평가 하게 되면 다 보통으로 체크하고 딴 거 하게 되어 있지, 누가 성의 있게 4,5점 표시하겠어. 교사가 나름대로 학생이랑 소통하면서 교육과정을 꾸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다 3점 때릴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가?”
남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보다 내가 왜 더 낮냐구. 다른 사람들도 그런 구조에 있는 건 똑같잖아.”
“그럼 물어봐, 동일 과목 선생님들은 어떻게 맞으셨는지.”
“싫어, 자존심 상해.”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교원평가를 강제하는 정도가 세서 이미 교원평가가 들어와버린 학교의 풍경을 보고야 말았다. 교원평가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 남편에게 보통인 지표의 부분에 집중하며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새롭게 해야겠다 반성하고 새로운 수업을 만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원평가의 지표들은 읽어볼수록 공허하기만 하다.
이러한 평가 문항의 무엇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반성하라는 말인가? 교원평가가 전반적으로
들어와 있지 않은 서울의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남편의 일을 계기로 나의 평가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남편이 왜 학교 평균에 기초해서 자신의 점수를 가지고 자기를 평균 미달의 교사로 괴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우수 교사가 될 수 없는가?
사실 대부분의 교사가 우수한 교사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교육과정을 학생들과 호흡하며 만들 수 없는 현재의 시스템에 많은 부분 기인하고 있다. 학교선택제 이후 대부분 인문계고등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보다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의 비율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문장에서 동경의 뜻을 물어봤더니 ‘중국 수도 아니야?’라는 대답을 하고 다른 학생이 그걸 고쳐주겠다고 ‘일본 수도야, 바보야’라고 대답한 개그 아닌 개그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요즘 인문계고등학교의 현실이다. 수능 언어영역을 풀 수 있는 어휘력과 독해력을 가진 학생이 한 반에 5명에서 7명 정도인 상황에서 수능의 EBS 연계율은 날로 높아지고 EBS 교재 여섯 권을 몇 명이 이해하든 한 번 풀어줘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학생들 대다수가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을 하도록 만들면서 그것을 근거로 교사를 평가하게 하고, 공교육을 살린다는 지금의 정책이 만들어내고 있는 코미디인 것이다. 원래 수능은 암기식 교육을 탈피하고 탐구력을 키우기 위해 생겼고, 그러한 취지를 뒷받침하고자 국정교과서는 검인정으로 바뀌고 언어영역은 언어 텍스트를 독해하는 시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EBS 연계율이 높아지면서 다시 국정교과서보다 더 큰 권력의 EBS 교재가 교실을 장악하고 있다. 교육과정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2학년 수업에서 자서전 쓰기, 소설 쓰기, 책 읽고 작가와 인터뷰 하기 등 다양한 수업을 시도했던 나도 내년에는 EBS에 내 수업을 맡겨야 할 것이다.
기대를 배반한 현실
원래 교원평가의 취지는 ‘도가니’ 사태에서 엿볼 수 있듯 답답한 학교 현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 학생들에게 성추행이나 성적 조작 등 비리가 일어나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현실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학교에 뭔가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오히려 교사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협력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 교원평가가 일반화된 학교들은 같은 교과를 들어가는 선생님들끼리도 수업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숨어든 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고립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피해로 돌아간다. 실제 같은 교과를 배우면서 다른 학습지로 공부하고 혹시 시험에 서로 안 가르친 것이 나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교과서나 EBS 교재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근거로 시험에 내다보니 수업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더 소통해서 수업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난하게 큰 흠집 없이 학교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형적인 입시 시스템에서 망가져가고 있는 우리 교육의 무능을 교사 책임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 내가 잘하면 나는 우수 교사가 되고 우리 교육도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교사들에게 자극을 주고 격려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교원평가의 속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교원평가가 만들어내는 교사의 내면
학생에게든 교사에게든 평가는 소통의 도구일 뿐이다. 가르치는 학생에게조차 사실 가장 좋은 평가는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능력이 부족한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그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 결과가 입시에 반영되는 시스템이 되면서 숫자만의 평가가 남게 되었고, 수능이라는 평가가 거꾸로 교육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원평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교사에게 격려와 자극을 주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상실한 채 나는 몇 점짜리 교사인가를 되뇌게 하는 평가는 결국 또 다른 족쇄가 되어 교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새 학년을 준비하는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3학년 할 거니까 문제집 수업 해야 되는데 교원평가 점수 잘 받으려면 문제집 풀이 수업을 이해할 수 있는 애들이 많은 반을 맡아야 되는데, 그럼 문과 남자반은 피하고 이과 여자반으로 해야겠네. 특수학급 애들 없는 반이어야 할 텐데, 방과 후에 알바 하고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없는 반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평가를 잘 받을 텐데…. 그런 애들은 전학 안 보내나 몰라.’
이것이 교원평가가 만들어내는 지옥의 내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