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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교사 딜레마 우리의 왜곡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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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3 22:53 조회 5,90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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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학생들을 위한다면
오래전부터 나를 심각하게 괴롭혀온, 앞으로도 나를 심각하게 괴롭힐 게 분명한 딜레마는 이것이다.
‘수업은 나의 존재 이유다. 그리고 의무다. 그런데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이 학생들에게 더 이익인 것 같다. 수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참 해괴한 말로 들릴 수 있다. 자칫하면 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말이다.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국어 < 영어 < 수학 < 사회 < 과학… 무엇인가? 학교 수업(학원 수업도 포함해서)이 학생들의 수능시험 성적 향상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순서대로 표현해본 것이다. 수업이 수능시험 성적에 도움을 주는 정도는 국어(언어영역)가 가장 작고 과학(과학탐구)이 가장 크다.

왜 그런가? 국어(언어영역)는 지식을 묻는 시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어(언어영역) 시험에선 암기하고 이해해야 할 지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특정한 지식에 대해선 조금도 묻지 않는다. 답의 단서는 모두 지문 속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언어영역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주어진 글을 이해하는 독해능력이다. 언어영역에선 결국 독해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수능 언어영역을 위한 공부는 당연히 독해능력을 기르는 공부여야 한다. 그런데 독해능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이다. 학생의 타고난 지능을 무시한다면, 독해능력은 상당부분 독서의 양에 비례한다. 수업, 특히 강의식 수업과의 연관성은 매우 적다. 교사의 설명과 해설은 독해력을 기르는 데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영을 가르치는 강사가 설명을 많이 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수영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수능시험 성적을 올리려면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문제풀이 기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익히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웬만큼 공부를 한 학생들이라면 그들의 문제풀이 기술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큰 차이는 결국 독해능력에서 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풀이 기술 자체도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능력이므로 교사의 강의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훈련에 의해 길러지는 측면이 더 크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강의가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풀이의 방법론이랄까 하는 것을 학생들이 충분히 알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스스로의 훈련만이 최선이다. 따라서 강의를 통해 진행되는 교사의 문제풀이 수업은 그야말로 일정한 기간 동안만 유효하다. 나는 그 기간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서너 달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사회는 국어와는 많이 다르다. 수능시험의 과학탐구와 사회탐구에서는 상당한 지식이 요구된다. 과학과 사회라고 해서 단편적 지식만을 잔뜩 암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험에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오는 지식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면 시험에 크게 유리하다. 반면에 그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암기하지 못하면 많이 불리하다. 그래서 교사의 해설과 설명이 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학생들은 강의를 원하지 않고, 교사는 수업해야 하고
교사가 되기 전, 한동안 나는 학원 강사였다. 대학 때의 민주화 운동 경력으로 인해 교사 임용을 받지 못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대입 종합 재수학원인 종로학원에서 몇 년 동안 강의를 했다.

당시 국어강사인 내가 가장 부러웠던 과목은 과학이었다. 왜? 과학은 가장 늦게까지 강의실이 학생들로 붐비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빨리 강의실이 비기 시작하는 과목은 국어와 영어였다. 수능시험이 다가오면 국어와 영어 강사들의 마음은 상당히 불편해졌다. 국어와 영어의 경우엔 일주일 정도 되는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급격히 강의실이 비기 시작했다. 강사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강사 개개인의 편차보다 더 큰 것은 과목별 편차였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수험생이라도 그 때쯤이면,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국어와 영어의 경우엔 더 이상 수업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수능시험을 위한 입시수업을 하면서 매번 내가 절망하는 것은 국어 수업이 시험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그야말로 얼마 안 되는)가 지나면 나의 강의가 시험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나의 강의를 듣는 시간에 차라리 독서를 하거나 혼자 문제집을 푸는 것이 입시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절망감에 입시 수업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겹쳐지는 날은 하루 종일 우울하다.

이제 곧 3학년 2학기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아지는 때이다. 그동안 제법 열심히 수업에 참여해왔던 학생들조차도 더 이상 수업을 원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국어 과목이 가장 심하다. 학원에선 학생들이 강의를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학원 강사는 강의를 원하는 소수의 학생들만을 상대로 강의를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학교는 상황이 다르다. 학생은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아도 교실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는 수업을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를 원하지 않지만 교사는 수업을 해야 한다. 교사는 수업을 해야 하지만 학생들은 강의를 원하지 않는다. 딜레마다. 수능시험을 생각하면 학생들에게 하루빨리 자습 시간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교사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다. 몸은 좀 편해지겠지만 마음의 괴로움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은 다른 교사들, 예컨대 일본어나 중국어 교사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수 있다.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은 일본어 수업 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지만 일본어 수능시험을 보는 학생은 없다. 그러니 교사가 열심히 수업을 하면 학생들의 입시공부에 부담을 주게 된다. 열심히 일본어 수업을 하는 게 학생들의 입시공부를 방해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입시공부를 하라고 학생들에게 자습시간을 줄 수는 없다. 몸이야 편하겠지만 그 자괴감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교사가 학생들의 입시공부에 지속적으로 부담을 줄 수도 없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다.

물론 소수의 과단성 있는 교사는 열심히 강의를 한다. 입시에 부담이 된다는 학생들의 항의가 있어도 무시하고 나간다. 또 다른 소수의 과단성 있는 교사는 용감하게 자습시간을 준다. 입시에 자신의 수업을 과감히 양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중간에서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 교사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과연 내 영혼의 에너지를 어디에 바쳐야 하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처한 딜레마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여러 개의 딜레마 속에 내가 처해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최근 들어 부쩍 나를 괴롭히는 딜레마에 관한 얘기다.

개인의 성실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교육의 문제점은 교사 개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버렸다. 제도와 시스템 차원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제도 개혁을 위한 교사들의 사회적 참여는 바람직하다. 모두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교육을 소홀히 한 채 사회적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더 중요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나는 내 영혼의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둘 모두에 집중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배분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시간이야 쪼개 쓰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몰입의 문제다. 영혼의 에너지를 어디에 바칠 것인가의 문제다. 인간의 정신은 이질적인 두 가지의 일에 동시에 몰입하게 되어 있지가 않다.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것엔 그만큼 몰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여러 개의 일에 동시에 몰입하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하나에 대한 몰입은 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둘 다에 몰입해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것에는 몰입이 안 된다. ……. 최근 나는 내가 이러한 딜레마에 처해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내가 처한 이런 딜레마를 최근의 저서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어찌하다 보니 교육개혁에 관한 책을 네 권이나 쓰게 되었다. 장한 일인가? 물론 장한 일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의식적인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어찌됐건 지금까지 나는 일종의 외도를 해왔던 것이다. 국어 공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 『국어공부 패러다임을 바꿔라』야 국어 선생인 나의 본분과 직결되는 책이라 해도 『학교개조론』,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 그리고 지금의 이 책은 아무튼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서 상당 부분 비껴나 있는 책인 것이다.

물론 나는 교육을 잘 하고 싶어 학교개혁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 교사들이 교육을 더 잘 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책을 쓰고 책의 내용을 실천하려 하면 할수록 내 영혼의 관심과 에너지는 가르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더 많이 집중되곤 한다. 모순이자 딜레마다. 아마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을 것이다. 성찰하고 고민하는 수밖엔.
마지막 문장은 사실 입바른 소리다. 성찰하고 고민한다고? 거짓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에 대해 내 스스로가 상당히 공허하게 느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딜레마가 어디 이것뿐인가? 수업 시간만 되면 엎어져 잠을 청하는 아이들…, 깨워야 하는가, 그냥 자게 두어야 하는가. 교육의 본질에 충실할 것인가, 입시에 충실할 것인가(예를 들면, 작문 시간에 글쓰기 수업을 해야 하는가, 수능 문제풀이 수업을 해야 하는가, 등등). 교사들이 처한 딜레마는 수없이 많다. 물론 인생 자체가 딜레마의 연속일지 모른다. 학교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왜곡된 교육은 교사가 처한 딜레마를 점점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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