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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흙과 더불어 책과 사람, 시대를 읽다 - 시인 이승하가 만난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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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1 19:25 조회 7,99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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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항하는가, 자연안에서
이승하 선배님, 몇 년 만에 뵙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강원도 춘천 근처 퇴골에서 사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쪽에 쭉 계시는지,아니면 서울에 왔다 갔다 하시는지요? 근황부터 좀 알려주시지요.

최성각 반갑습니다, 후배님. 그동안 후배님이 성실한 학자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중요한 주제를 외면하지 않는 한 문인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늘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서울과 시골을 왔다갔다 하는, 유랑 생활을 하고 있어요. 주중에는 시골에 있고, 주말부터 주초에는 서울에 있습니다. 2003년부터 벌써 7년째 이 생활을 지속하고 있으니 이런 떠돌이 생활이 이젠 장난이 아닌 셈이지요. 그렇다고 귀농이라 할 수는 없고, 엉터리 시골 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한두 해는 시골의 여러 표 안 나는 일들로 힘에 버거웠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졌어요. 조그마한 밭에는 이런 저런 작물을 키우고, 마당에서는 그림같이 유유자적하는 하얀 거위 일곱 마리와 놀고, 뱀을 출입금지 시키는 망을 치고, 겨울에 땔 땔감을 마련하고, 처마에 달린 말벌 집을 따고, 개울의 물을 마당에 끌어들여 친구들이 찾아오면 놀지요. 말해놓고 보니 실제 현실과 달리 일종의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셈인데, 일찍부터 시골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승하 나이가 들면 모두 시골 생활을 바란다고는 하지만 도시에 살던 사람이 시골 생활에 익숙해진다는 게실제는 어려운 일일 텐데, 선배님은 잘 극복하고 계시는군요. 선배님이 『달려라 냇물아』(2007, 녹색평론사)이후에 펴내신 『날아라 새들아』(2009, 산책자)의 작가약력을 보면, “세상을 망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굴러가는 주류 환경운동판과 신속하게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시골에서 거위를 키우고, 개똥과 닭똥을 모으고, 밭의 김을 매다가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를 망연히 바라보며 자신에게 허락된 신선놀음에 감사의 마음을 품는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골을 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최성각 서울에서 시민운동(풀꽃운동)을 할 때에는 새만금 살리기 운동에 특히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새만금이 끝내 메워지자 허탈해졌습니다. 환경단체들은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시민들이 모아준 에너지의 총량을 그 거대한 산천 파괴를 막는 데 아낌없이 다 썼는가?

혹시 시민단체마저 권력화 되어 본질적이지 않은 일에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나 않았는가, 그런 회의가 일었어요. 4년여 시민운동 동안 사실 좀 지치기도 했던지라단체를 깨끗하게 회원들에게 넘겨준 뒤, 풀꽃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풀꽃’ 천초영 양이 묻혀 있는 퇴골로 생활을 옮긴 것이지요. 시위도 중요하지만 세미나니 간담회니 여럿이 몰려서 만날 같은 소리니 해대면서 실의와 분노만 씹으며 자괴하며 사느니, 시골 밭고랑에 엎드려 김을 매고 땔감을 마련하고 짐승들과 같이 사는 것도 이런 생명 파괴의 시대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한저항의 몸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승하 시민운동이 시종일관 청렴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저도 몇몇 사례를 봐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경우지만, 허기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지방토호의 아들이 젊은 시절에 이론을 공부해 운동권이 되고 책도 여러 권 냈지만 결국은 기득권 세력으로 가더군요. 선배님이 이번에 내신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라는 책은 ‘독서잡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책의 외양은 서평 모음집입니다만 선배님의 과거와 현재, 생각과 생활, 희망과 절망, 한국 현대사와 세계역사 등이 함께 얘기되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책의 출간 배경이 궁금한데요




최성각 사실 저는 본성이 겸손해서(웃음) 드러내놓고 떠벌이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책벌레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책만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같은 솥의 밥을 먹고 같은 가정문화 속에서 자란 형제라도 책을 대하는 자세는 다릅니다. 제 형제들도 다 달랐고, 제 자식들도 다르더군요. 어떻게 그런 차이가 날까,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교육의 영향과는 상관없다고 봅니다. 저는 다행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잘났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어쩌다 그런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떤 계기를 만나 책읽기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의 삶이 풍요롭게 되리라 믿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대한 글도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특히 생명운동에 뛰어든 이래 서평 청탁을 거절하지 않고 쓴 데에는, 책방에서는 외면 받고 있지만 이렇게 절실하고 좋은 내용의 환경책을 왜 사람들이 읽지 않는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운동의식 같은 것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쓴 원고가 넘치다 보니 자연히 책을 묶을 기회가 온 것이지요. ‘책에 대한 책’이야 사실 넘칠 만큼 많지만, 저는 지은이들보다 다소 우월한 위치에서 이미 세상에 나온 책을 놓고 감 내놓아라 배 내놓아라, 그런 판관으로서의 글쓰기를 한 게 아니라 그 책이 내 삶을 어떻게 요동치게 했고, 그 책 덕분에 나는 어떤 빚을 지게 되었는가? 그런 마음으로 책에 대한 감사와 책을 읽을 때 일어났던 우리 시대의 사건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책 때문에 일어난 변화 등을 담담하게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서평집이 아니라 최성각의 에세이집이다, 혹은 사회비평서이다, 그리고 어떤 분은 가당찮게도 생태사상서다, 그렇게 말씀하는 분도 있더군요. 독자들이 어떻게 보시든 제가 다룬 책은 단지 매개일 뿐, 결국 제 삶의 이야기를 담았지요.
이승하 저 역시 ‘이것은 최성각의 문학이다’,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책의 내용과 거기 얽힌 삶을 함께 들려주시면서 특히 신경을 썼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결국 생태환경의 파괴를 가장 많이 걱정하셨는데요.

최성각 생태계 파괴야말로 가장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지요. 환경문제는 이 세계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맹신은 문명사에서 이미 엄청난 패착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구라는 행성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의 토대인데, 이 토대의 한정적인자원 속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질 운명인 인간종이 이행성의 주인인 양 오만하게 살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은 우리의 토대를 극한까지 소모하려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파멸할 것입니다. 산업사회의 끝은 자타공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구문명은 ‘과거’로 기술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의 미래를 회의하고 불길하게 여기기는커녕 파멸이 확실하게 예고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책속에서 구원의 빛을 찾다
이승하 선배님의 한결같은 마음과 지행합일에 늘 감동받습니다. 이야기를 교육으로 좀 돌려보지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일 중에 참 잘한 일이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는 체벌이 공공연하게 행해졌거든요. 게다가 선생님들은 말끝마다 서울대, 연·고대를 외쳤고요. 딱두 달 다니고는 김천에서 서울로 가출, 아버지께서 신문사로 찾아가 아들 찾아달라는 광고를 내 신문에 제사진도 나왔었지요. 이때 학업을 중단하여 검정고시를 거쳐 간신히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선배님도 상고를 나와 많이 헤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 얘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최성각 이승하 후배님이 유서를 남겨놓고 가출한 이야기는 참 유명하지요. 저 역시 자의와는 달리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당한(?) 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꿈도 품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이 좌절되었다고는 했지만 그런좌절의 의미도 잘 몰랐고, 사실 또 하고 싶은 일도, 잘 하는 일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너무나 심심하고,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자주 가출을 했었지요. 말하자면, 범생과는 거리가 먼 불량학생시늉을 좀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싫증이 나더군요. 그러는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은행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 준비할 때 저는 수업시간에도 세계문학전집, 사상전집, 묵은 「사상계」 따위의 잡지를 읽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고맙게도 그런 저를 젖혀놓았고요.
이승하 결국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고 책이 선배님의 스승이고 친구였군요. 독서광 소년은 나중에 소설가가 됩니다. 선배님의 대학시절은 어땠습니까? 유신 말기의 참 암울했던 시절에 대학을 다니셨는데요.



최성각 제 20대가 바로 70년대였습니다.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그 지도자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 지도자가 “나를 따르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말을 감금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독재자를 비판하고, 생각을 통제하는 시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염려하면 곧바로 흉악한 죄명을 씌워 잡아가곤 했습니다. 그 독재자 내면의 공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폭압정치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살았지요. 가장 밝고 활기차야 할 제 20대는 그렇게 정신질환을 앓듯 독재의 그늘에서 움츠리고 살았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지금 젊은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둡고 우울한 시대가 바로 70년대, 제 20대였지요. 책이 아니었으면 그 험악한 시절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책에서 위안을 받았고, 책에서 불확실하지만 희망을 찾곤 했었지요.

이승하 네, 그랬었군요.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누명을 쓰고 죽어갔습니까. 두 사람의 치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억울한 희생자가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데 어찌 암울한 시대가 아니었겠습니까.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민교육헌장’을 전교생이 다 외워야 했고, 그것을 확인하러 장학관님인가가 와서 시험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전형적인 경찰국가에서 우리는 30년을 살았는데 그 뒤에 이어진 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사실은 공수특전단)을 보내 진압한 군사정권이었지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선배님은 책을 읽으면서 버틴 셈이었군요.
최성각 참으로 끔찍한 세월이었습니다. 책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독재정권이 반드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겠어요. 책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항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겠어요.

이승하 그래요, 카타콤에 숨어든 교인들이 성경을 낭독하며 구원을 꿈꾸었던 것처럼 선배님은 책을 읽으며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갔던 것이로군요. 선배님은 1999년에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이단체를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여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까?

최성각 환경단체 풀꽃세상은 야생화동호회가 아니건만,단체명 때문에 그런 오해도 자주 받곤 했었지요. 1998년 겨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의 화재사고로 ‘풀꽃’(천초영)이라는 이름을 지닌 따님을 잃었습니다. 소방차가 왔건만 자기 땅이라고 소방도로를 내주지 않았던 이웃 때문에 물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따님을 잃었습니다. 그런 뒤 그분은 우리 사회의자기중심주의, 탐욕과 이기심의 실체를 직시하게 됩니다. 그분은 남은 생은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어둠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고 밝히는 일을 하고 싶다, 하시더군요. 환경문제 역시 끝없는 자기중심주의, 이기심,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지요. 그래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는가?”, 하시기에 “환경문제가 심각합니다, 환경운동을 하지요.”라고 답하고, 세상을 떠난 그 젊은이의 이름을 따서 환경단체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풀꽃상을 제정해 새나 돌멩이, 꽃이나 골목길, 갯벌의 조개나 지렁이 등, 사람이 아닌 자연물에게 상을 드리면서 감사와 참회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이승하 풀꽃세상 탄생에는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숨어있었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풀꽃운동이 바로 참회운동이었기에 결국 선배님에 의해 삼보일배 운동이 창발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최성각 온몸을 던져 참회운동을 보여주신 분들은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님 등 성직자들이었지요. ‘삼보일배’라는 말은 수경스님이 화계사에서 청와대까지 ‘1보1배’로 새만금 살리기의 몸짓을 표현하려고 하셨는데, 문규현 신부님이 동행하시는 바람에 시위의 출발지가 명동성당으로 바뀌게 되었지요. 그러자 집회 시간 안에 목적지까지 당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3보1배’를 제가 제안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단지 제안자일 뿐이고 몸을 직접 땅바닥에 던진 살신성인의 감동적인 실천은 그분들이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풀꽃운동 4년여 동안 “생명운동이 바로 종교인들의 본업이다.”, 그런 생각으로 종교인들이 환경문제에 뛰어드시기를 간곡하게 요청했고, 그런 노력을 다소 했을 뿐이지요.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시작된 풀꽃운동은 생명에 대한 감사와 우리 무례한 삶에 대한 참회의 정신이 깔려 있었으니 삼보일배 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승하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님은 그렇게 목숨 걸고 생태환경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우매한 우리들은 국가에서 하는 사업을 방해하면 그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분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천성산의 도롱뇽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나섰던 지율스님을 국민들이 얼마나 비난했습니까.

최성각 지난 정권이나 지금 정권이나 생명문제에 무심하기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의 주류들은 너무나 후 안무치하고 무례합니다. 순수한 이타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표할 줄을 모르지요. 비록 그분들이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그분들에게 갚기 힘든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하 맞습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측은지심과 보시,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원죄의식과 사랑이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의 종을 멸종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종교가 한국에서는 무척 세속화되어 있는데, 이런 분들이 있어 그래도 종교 본연의 순수성을 지키게 되었으므로 우리 모두 감사해야 할 분들입니다. 개발과 건설만이 대수인 양 60년대부터 50년을 달려오는 동안 전 국토의 반은 골프장이, 반은 아파트가 된 느낌이 듭니다. 아니, 여기에 덧붙여 해양지방은 공장으로, 내륙은 모텔로 뒤덮이게 되지요. 우리 국토가 이런 식으로 망가지지 않았다면 ‘풀꽃평화연구소’도 탄생하지 않았겠지요? 이 연구소는 또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셨는지, 선배님이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성각 2003년에 만들어지긴 했는데, 연구소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4년여 동안 여덟차례 풀꽃상을 드린 뒤, 단체를 회원들에게 넘겨드렸지요. 그리곤 단체를 같이 만드신 풀꽃어머니께서 풀꽃이가 영면하고 있는 시골에 먼저 들어가셨고, 저는 나중에 그 언저리 골짜기에 작은 건물을 짓고 밭도 가꾸고, 거위도 키우고, 시골의 이웃 분들에게 이것저것 도시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면서, 읽고 쓰는 제 본업에 충실하려고 애쓰고 있지요.



이 시대의 출판과 교육에 유감을 표한다
이승하 선배님이 근래에 『달려라 냇물아』, 『날아라 새들아』, 『거위 맞다와 무답이』, 그리고 최근에는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등 활발하게 책을 펴내시니 선배님의 삶을 오랫동안 지켜본 저 같은 후배로서는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이번 책을 보니 소설가 황석영 씨에 대해 독설을 퍼붓고 계시더군요. 황 작가를 선배님은 “최근에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따라붙었다가’ 개망신을 당한 황아무개(이젠 이름마저 적고 싶지 않구나)”라고 하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전설적인 작가가 어찌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망할 메시아사상에 젖어 하필 이 고약한 시대에 좌에서 우로 왔다리 갔다리 하다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작가의 정치 참여에 대해 말씀을 좀 해주시죠.

최성각 반권력이 곧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작가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지요. 70년대에 ‘황석영’은 당시 문학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전설이었고, 그가 쓴 단편은 바로 교과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권이 중도를 표방한다고 하자 나이 들어 취하게 된 자신의 중도와 부합된다고 어불성설을 하며 동행의 몸짓을 할 때, 그의 문학적 전력이 의심스러웠고, 정치적 선택이 경악스러웠고, 인간적 경망함이 경멸스러웠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 개인의 문학적 재능과 역사 앞에서 보여주는 삶의 일관성이 같은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야 말았습니다. 젊어서부터 아끼고 품어오던 큰 믿음이 깊은 혐오로 바뀌게 된 경우이지요. 그분에 대해선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이승하 이해가 됩니다, 선배님. 기왕 그런 이야기로 번졌으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우리 출판계에 대해서도 무슨 의견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최성각 펴내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책들이 너무 양산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들은 대개 쉽게 사라질 쓰레기들이기 일쑤이지요. 그런 책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보면 느낄 수 있지요. 옛 출판인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태였지만 출판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공들인 전집을 펴내고 값싼 문고를 꾸준히 펴낸 것만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출판계에도 꾸준히 양서를 펴내는 소수의 출판사들이 있으므로 싸잡아 말할 내용은 아니지요. 아무튼, 책을 사보는 계층에게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는 내용 없는 책들이 너무 양산되고, 몰역사적인 대단치 않은 작가가 과대포장 되는 상업주의 현상은 참으로 문제적인 현상이지요.

이승하 아무개의 소설이 수십 만 권 팔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너무 유행을 따르려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시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요즘 장안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두 명 젊은 시인에게 관심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 두 시인이 좋으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엉뚱하게도 유명하지 않냐, 평론가들이 다 인정하지 않냐, 아리송한 게 뭔가 있는 것 같지 않느냐고 합니다. 잘생겨서 좋다는 사람까지 봤습니다. 이 사람 시의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든다고 꼬집어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놀랐는데, 이것이 우리 문학의 현주소인가 싶어 답답하더군요. 이 얘긴 그만하고, 저는 이땅의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목고니 자율형 사립고니 하면서 고등학교를 서열화하고 있습니다. 귀족 고등학교의 등장은 공교육의 사교육화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잘살기에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절대로 날 수 없고, 국가가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성각 그런 소수의 귀족학교에서 배제된 다수 학생들 가슴에는 피멍이 들 것입니다. 젊은이들 가슴속에 맺힌 그상처를 우리 사회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육 현실을 생각하노라면,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희망이 안 보입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교육제도가 용인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좌절시킨 그 대가를 우리사회는 반드시 치를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승하 모국어를 등한시하고 영어와 수학에 집중하게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국사 과목을 선택으로 하여 극히 일부 학생만 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여름방학 때 최익현을 주제로 400매짜리 위인전기 동화를 썼습니다.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거두로 유명한 상소문 ‘시폐時弊 4조’를 써 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분이지요.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대마도에 끌려갔는데 일본 땅에서 난 쌀로 지은 밥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 끝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모 출판사에서 초등학생용으로 쓰지 않았다고 퇴짜를 맞아 원고가 사장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병자수호조약, 갑오개혁, 을사조약 등을 아주 쉽게 설명했는데 이런 역사적 사건을 거의 다 빼라고 합니다. 학생들이 모른다고. 모르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고 책의 역할인데, 이번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화책조차도 지나치게 재미 위주로, 상업적인 것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성각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제가 지금 출판인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후배님의 그 책이 꼭 좋은 출판사를 만나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국사 과목이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자기 나라 역사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인나라가 어디 있을까요? 지금 이 나라 교육제도를 좌지우지하는 자들은 모두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외면한다는 것은 오늘을 엉망으로 살겠다는 것이고, 내일을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이지요.

그것이 모두 나의 문학이다
이승하 선배님은 환경운동가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소설가라는 것이지요. 이 시대 이 땅의 작가로서 책 출간 계획이나 쓰고자 하는 소설이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최성각 저는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고지식한 장르의 틀에서 벗어난 지 오래됩니다. 우리 문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이 백화제방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은 70년대였습니다. 농업사회가 급하게 산업사회로 이행하던 70년대, 그때 선배작가들은 쓰는 족족 문제작이었고, 그만큼 좋은 작품, 좋은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가히 소설의 전성시대였지요. 하지만 80년 ‘광주’ 이후 시의 시대를 지나고 영상시대로 돌입한 지금은 장르가 해체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이미 당대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요. 저는 단지 제게 절박한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글로 쓸 뿐이고, 누가 뭐라하던 그것이 모두 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저더러 생태 에세이만 쓰고 소설은 안 쓰냐고 물어보는 이들일수록 제가 전에 펴낸 소설책들을 읽어보지도 않은 이들이곤 했습니다. 진심으로 제 작품을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습관처럼 내뱉는 질문들이기에 제가 그런 이들을 참으로 지겨워하지요. 문학의 장르에는 계급이 없건만 이 나라 글판에서는 소설 장르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힘으로 그런 고리타분한 장르 계급을 뜯어고칠 재간은 없지만 제가 그런 관행을 묵살할 수는 있겠지요. 소설이라는 형식이 주제에 맞으면 그 형식을 취할 것이고, 생태계 파괴 등 더 급한 일에는 또 다른 문학 형식을 빌려 쓸 따름입니다. 금년 말에 생태소설집이 한 권 나올 예정입니다.

이승하 선배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저야말로 기존 장르에 고착된 문학 선생이지 않나 싶어 다소 겸연쩍네요. 저도 독서체험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헌 책방에 얽힌 추억』이란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4대강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의견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역대 정권 중 환경에 대해 고민을 하고 뭔가를 실천한 정권이 있었나요?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녹화사업이나마 전개하지 않았습니까?

최성각 박정희는 산림녹화를 했지만 동시에 굴뚝에서 나는 시커먼 연기에 감동해서 울었던 분이지요. 생태계파괴는 그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 후 김대중 정권때의 그린벨트 해제, 노무현 시절의 새만금 죽이기, 그리고 지금 이명박 정권은 두 귀를 꽉 막고 잘 흐르는 강에 손을 대고 있지요. 발전 망상에 사로잡혀 생태계 파괴를 대단찮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독재정권이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생태계 파괴의 대가로 얻은 단기간의 가시적인 경제적 성취가 긴 시간으로 보면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성취를 위한 비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기후 변화 같은 것이 바로 가장 큰기회비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면적으로 총체적으로 우리네 물질주의적 삶을 반성할 때이고, 바로잡을 시간밖에 없는데, 이 정권 역시 예상했던 대로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소수의 지나친 부와 절대 다수의 항구적인 궁핍을 전제로 한 나라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증유의 파괴로 인해 그가 치를 정치적 대가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한번 파괴된 자연은 복구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승하 네, 나라의 앞날이 정말 많이 걱정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물장구 치고 놀았던 맑은 실개천이 다 사라지고 없는데 그나마 대단위 공사로 확인사살을 하고 있습니다. 시며 문학평론을 쓰되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만 그렇게 쓰면 이상하게 유행이 지나간 것을 갖고 뒷북친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서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하지만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의 불씨를 저는 평생 꺼트릴 생각이 없습니다. 아아, 장시간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출출합니다. 이 근처에 좋은 음식점이 있으면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떨지요?

최성각 이 동네에서 시민운동을 벌인 지 10년이 넘는데도 아는 밥집이 별로 많지 않아요. 할머니와 따님이 운영하는 ‘남촌’이라는 밥집이 있는데, 거기 음식이 10년 이상이나 한결같아요. 우리, 그 집으로 갑시다.
이승하 네, 선배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뭐 그런 노래가 있죠. 사실은 김동환의 시인데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최성각 후배님의 시도 언젠가 소월시처럼 노래로 불리기를 바랍니다.
이승하 하하, 예전에 ‘오선과 한음’이 만든 노래가 한 곡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식당에 가서 말씀드리지요.



최성각 1955년 강릉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같은 대학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강원일보>(1976), <동아일보>(1986)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1999년에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만들었고, 2003년에 강원도 산골짜기에 ‘풀꽃평화연구소’를 개설해 거위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그간 소설집 『택시 드라이버』, 『부용산』, 『거위 맞다와 무답이』 등과 생태에세이집 『달려라 냇물아』, 『날아라 새들아』 등을, 그리고 최근에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를 냈다. 현재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며 <프레시안> 서평위원이다. 제2회 교보환경문학상과 제2회 가천환경문학상을 받았다.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앙일보>(1984) 신춘문예에 시가, <경향신문>(1989)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학사상』, 『시안』, 『시로 여는 세상』 등의 편집위원을 거쳐 지금은 <문학나무> 편집위원으로 있다. 그간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등과 시론집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등을 냈다.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냈으나 지금은 소설을 안 쓴다. 현재 중앙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제2회 지훈상과 제13회 시와시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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