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품 검색

장바구니0

작가/저자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책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7 21:43 조회 6,223회 댓글 0건

본문



소년 시절, 나는 독서보다는 노는 데 더 바빴던 개구쟁이였다.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중국집 아들로 태어난 나의 유년 시절은 자장면 냄새와 밀가루 반죽 튕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수타手打로 자장면을 만드는 주방장이었다. 아버지가 두 손 가득 커다란 밀가루 반죽을 번쩍 들어서 반질반질한 나무판 위로 ‘텅’ 소리 나게 치면 반죽의 틈이 벌어지면서 여러 가닥의 면발이 나타나곤 했다. 그 모양이 신기해서 오래도록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날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시장 근처에 있는 농협 소장님이 손님으로 자주 들렀는데 탕수육, 자장면 등을 시켜 먹은 뒤 외상을 걸어놓고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소장님께 외상값 청구서를 보냈는데, 하루는 글을 모르는 아버지가 ‘농협 송장님께’라고 써서 보냈더니 소장님은 한글을 모른다고 아버지를 놀렸고 나는 어린 마음에 그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다. 이 일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시골이라서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노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책벌레’라는 별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마음에 무학인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는 교과서를 읽고 또 읽는 데 열중했고 덕분에 반에서 늘 상위 그룹에 속했다. 영어 선생님이 없어 교장 선생님이 가끔 영어 수업을 해주시던 중학교를 마친 후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 생활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독서클럽에 가입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면서 현실에 눈을 떴다. 전공서적보다 더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키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눈을 돌렸고, 더 많은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나의 대학 생활은 무수한 이념서적 독파, 현실 상황에 대한 끝없는 토론, 대안 마련과 실현을 위한 열렬한 행동으로 집약되었다. 나는 어느덧 최루탄을 마시며 가두투쟁을 벌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유신정권은 급기야 10.26으로 마침표를 찍었고,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1980년 봄, 대학생과 시민들은 계엄 해제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갈망했다. 하지만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의 밝은 길을 저버린 채 독재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등사판에 먹지를 대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희생된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교정에 뿌렸고, 그 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현상 수배자가 되어 1년여 동안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 와중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전기 공사 기사 1급 등 자격증 여러 개를 따면서 5년 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 생활은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면서 마무리되었다.

‘시국사범’이라는 딱지를 지닌 채 수감된 나는 일명 ‘징벌방’으로 불리는 0.75평의 독방에 수용되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공간, 어둡고 답답한 관 속 같은 그곳에서 나의 청춘은 시름시름 말라갔다. 그 지옥 같은 독방에서는 독서를 할 수도 없었고, 편지를 쓸 수도 없었으며, 면회는 더더욱 안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면 바깥 세상에 나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음습한 독방의 기운을 단전호흡으로 토해내고,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드높은 하늘의 기운을 명상을 통해 빨아들였다.

징벌방에서 나간 후에는 감옥에서 20개월여를 살면서 하루 온종일 책 읽는 데만 열중했다.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나를 인위적으로 가둔 정치 세력에 대한 항의였고, 나의 존재 의의를 되새기게 해주는 징표였다. 쇠창살 너머로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면 고향 생각이 간절해지곤 했다. 아버지의 수타 면 두드리는 소리, 정이 듬뿍 실린 어머니의 잔소리, 고향 마을 입구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무논을 꽉 채우는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쟁이 친구들과 떠들며 놀던 정겨운 웃음소리……. 나는 그 모든 소리들을 내 안에 채우며 감옥 안에서 시를 습작했고, 출소한 뒤에는 조태일 시인이 운영하던 「시인」지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15년 만에 치과대를 졸업한 나는 치과 의사를 잠깐 한 뒤 정치인이 되었다. 3선 의원이 된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수많은 일정을 모두 처리하고 집에 오면 밤 12시를 넘길 때가 많지만 이동하는 차 안에서라도 꼭 책을 읽는다. 또 몇 년째 불면증으로 시달렸을 때는 잠을 억지로 청하기보다는 책을 읽음으로써 불면증과 친구가 되었다. 기차 안에서든 비행기 안에서든 책을 읽으면서 나를 바로 세우려 애쓴다. 민심을 읽는 일, 민생을 이해하는 일, 바른 정치를 펴는 일이 책에 다 나와 있다. 또 책을 통해 나는 올곧은 시를 쓸 수 있다. 책이 나의 스승인 셈이다.
목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개인정보 이용약관 광고 및 제휴문의 instagram
Copyright © 2021 (주)학교도서관저널.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