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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도서관의 여러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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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18:17 조회 5,80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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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 거기 있다, 또.
“여기서 뭐해?”
“기다려.”
“또?”
“반드시 나타날 거야.”
벗의 의지가 사뭇 굳다. 나는 그 의지가 다다를 수 있는 높이를 능히 짐작한다. 나타날 것이다. 실은, 그건 벗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 그 여자의 의지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공부를 엄청 했으니까. 그리고 공부를 엄청 하는 여자가 갈 데는 별로 없다.

도서관!
내 벗은 짝사랑하는 여자가 달리 어디 갈 데가 많지 않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그리고 정작 그 여자를 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벗이 학교에 와서 해야 할 일은 끝나는 것.
“나 갈게.”
“응? 봤어?”
“응. 봤어.”
벗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갔다. 그게 다였다.

나는 그 벗이 커서 장차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슨 기여를 할지, 아니, 조국과 민족은 다 놔두고 제 한 몸 무엇이든 해서 먹고는 살지, 조금 걱정이긴 했다. 하지만 절대 썩은 짚뭇처럼 호락호락한 벗이 아니었다. 학교에 와서 하루 종일 그 여자애가 갈 만한 곳을 뒤쫓는 게 일이던, 그러다가 결국 도서관 앞에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게 마련인 그 벗은 번번이 나를 좌절시키곤 했다. 그것도 도서관 안팎에서 두루!

도서관 ‘밖’에서 그 벗처럼 기다릴 여자애 하나 없던 나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가서는 두터운 독일어 원서 한 권을 신청한다. 『Die Theorie des Romans』.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영어 판본도 아니고, 15세기에 불탄 수도원 지하실에서 가까스로 건져낸 듯한 이 두터운 독일어 원본을 누가 감히 봤으랴. 자못 우쭐한 심정으로 슬쩍 주변을 돌아본다.
멍청한 인간들!

역사 이래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 어떤 체계를 지니고 면면히 이어져 오는지 단 한번 생각이나 해봤을까, 저 인간들? 도서관에 책 빌리려고 오는 게 아니라 토플 공부 하러 오는 인간들, 쪼잔한 호모 토플리쿠스들!
어쨌든 나는, 그런 인간들하고 유전자부터가 다른 나는 이윽고 책에서 도서 대출카드를 꺼내든다. 거기에 이름을 적을 차례다. 나는 아무도 걷지 않은 흰 눈벌판을 떠올린다. 서설에 첫 발자국! 김구 선생이 즐겨 인용한, 그리하여 해방공간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위해 삼팔선을 넘을 때 다시 인용한 서산대사의 시도 절로 떠오른다.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눈앞이 캄캄해진다. 거기에 한 이름이 적혀 있으되, 다른 누구도 아닌, 그건 바로 벗의 이름이다. 매일같이 공부는 안 하고 짝사랑 여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줄 알았던 바로 그 벗!-그 벗이 걸어간 발자국이 뒤에 온 나의 ‘길잡이’가 돼버린 것이다!

오오, 백범 선생님!
나는 어쨌든 빌려서는, 아마 두어 장도 채 읽지 못한 채 반납하고 말았을 그 책,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의 책 첫머리에 우울해진 마음을 의탁한다. 그 대목은 아직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 중 하나다.
Selig sind die Zeiten, fr die der Sternenhimmel die Landkarte der gangbaren und zu gehenden Wege ist und deren Wege das Licht der Sterne erhellt.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29쪽)

도서관에 가면 남는 게 많다.
좋아하는 여자를 볼 수도 있고(만일 똑똑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이 세상의 지적 재산권을 저 혼자 죄 가진 양 우쭐거릴 수도 있으며(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참 험한 것이니 호모사피엔스는 죽을 때까지(J. P.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독학자처럼 A부터 Z까지 시립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무서운’ 꿈을 갖고 사는) 다른 호모사피엔스에 대해 더 더 더 겸손해야 하며(나만 보더라도, 가장 절친한 벗이 가장 무서운 적이지 않았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별이 빛나는 창공”과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떠올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므로.



참, 벗은 그 여자를 끝내 보내주었다. 별이 빛나든 말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가 있건 없건,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시절, 5월 광주가 젊디젊은 우리들의 가슴을 스위스 치즈처럼 온통 숭숭 빈 구멍투성이로 뚫어놓았던 그 시절,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무엇을 하더라도 쉽게 채워질 리 없던 우리들의 그 빈 구멍투성이 가슴에 도서관의 추억마저 없었다면, 대체 어찌 견뎠을지…… 벗 또한 나 못지않게 세상에 대해 몹시 허기지고 허망했을까. 이듬해, 벗은 밤새워 16절지 갱지에 볼펜으로(복사기도 드물었지만 등사기마저 고장 났단다!) 당시 새로 등장한 독재자의 이름만 잔뜩 써서 만든, 참으로 기막힌 유인물을 뿌리고 기어이 감옥으로 갔다. 하필이면 그 유인물을 뿌린 데가 또 도서관이었다. 하긴, 그 시절 도서관의 또 다른 용도는 바로 그렇듯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대를 향해 꽃다운 청춘들이 제 한 몸을 기꺼이 날리던 곳이 아니었던가!
한 여자 후배는 도서관 4층 난간에서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다가 쫓아오는 형사들을 피해 몸을 날렸다. 온몸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죽었다는 소문도 들렸지만 다행히(?) 전치 8개월의 중상이었다. 나는 그 후배가 나중에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몹시 걱정했다. 다행이었다. 지금, 그 여자 후배는 강남에서 시의원에 거푸 당선되었다. 물론 아이도 잘 낳아 잘 기른다.(모 개그우먼의 친언니라고 신문에도 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무식한’ 영혼들이 참으로 고맙다. 루카치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가리켜 행복한 시절이라 했지만, 내게는 그 시절이 그런 것 같다. 영혼은 세계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또 영혼의 윤곽을 이루고 있는 경계선도 본질적으로는 사물들의 윤곽과 다를 바가 없다.(35쪽)

사물의 윤곽과 제 영혼의 그것을 이루는 경계선을 명백히 구분했다면, 도서관을 차마 그런 용도들로 사용했을까. 오, 무식했던,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영혼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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