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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공자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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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17:53 조회 6,30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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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공자의 삶을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반응이 어땠을까요? 여러분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자면 썰렁했더랬습니다. 일단 옛사람 이야기를 하면 흥미롭지 않은 모양이에요. 거기다 답답하고 고리타분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봉건적, 가부장적이라는 말에 딱 맞는 인물이 공자라 여겨온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듯합니다.

당연히 공자가 비판받을 부분은 많습니다. 그의 말을 모아놓은 『논어』를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식에 비추어보면 많이 모자라고 시대에 뒤쳐진 면이 있지요. 그렇다고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살아 움직여 우리를 일깨우는, 참으로 훌륭한 말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하는 것이잖아요.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그 무엇이 담긴 책이니까요.

『논어』는 제법 두꺼운 데다 일관성 있고 체계 있게 쓰인 글이 아니라 읽기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물론 청소년도 읽어낼 수 있도록 잘 번역하고,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해설한 책이 있다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으니 기회 닿는 대로 한번 도전해보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는 『논어』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 나온 한 구절을 바탕으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가
책 많이 읽은 친구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이지요. 우리말로 풀이하면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랴.”가 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논어』의 중심이라 여깁니다. 『논어』를 해설한 책을 여럿 읽어본 나도이런 주장에 동의합니다. 배움과 익힘, 그리고 기쁨이 『논어』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라는 뜻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배움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지요. 청소년 시절은 배움의 시기니 더 그럴 겁니다. 아니라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침 일찍 밥도 못 먹고 학교에 가서 네다섯 시까지 공부하고, 타율학습인데 자율학습이라 부르는 이상한 공부를 하고, 편의점에서 김밥으로 대충 때운 다음 학원에 가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쁘니 어찌 기쁨이 있겠어요. 이게 다 학벌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어느 나라나 입시는 있고 좋은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으로 나뉘는 현상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강고하여 사회생활 할 적에 차별받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우리나라만큼 심한 곳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특정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현실은 빨리 고쳐야 할 나쁜 사회현상입니다. 그러니 배움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나 한번 같이 고민해보도록 합시다.

일단, 공자는 무엇을 배우고자 했을까요? 요즘말로 하면 특목고나 유명 대학에 가려고 공부했을까요? 그러니까 삶의 목적이 소수의 엘리트층에 속하기 위해 현실을 희생하며 오로지 교과서와 학습참고서만을 읽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부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출신 성분이 보잘것없던 공자가 나중에 고위공무원이 되는 것을 보면, 입신과 출세를 위한 공부를 등한히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공자가 말한 군자가 전문가이면서도 도덕적 완성자를 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전문가이기만 한 것이지, 전문가 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춘추시대에 공무원이 되는 과정이나 출세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시험이 있는지, 그때 교재는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하였든 현실 욕구에 충실한 공부를 등한히했다고 할 수는 없을 터입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공자는 어떤 공부를 했을까요. 배병삼 교수가 쓴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에 보면 그 내용이나옵니다. ‘육예六藝’라 하여 예(禮, 예절)와 악(樂, 노래와 춤), 활쏘기(射), 마차 몰기(御), 글쓰기(書), 셈하기(數)를 배운 것이지요. 오늘날로 치면 여섯 개 과목을 충실히 배웠다는 것이고, 이것은 공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 일반적으로 이런 과목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보면 될성싶습니다. 지은이는 육예를 다음처럼 분류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예와 악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 것이고, 활쏘기와 마차 몰기는 국토방위에 필요한 기술이며, 글쓰기와 셈하기는 관리나 지식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쓰이는 것이니, 모두 고대에 지식인이자 무예를 겸비한 성인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기예들이다.”

그렇다면 육예를 익히는 데 쓰였던 교재는 무엇일까요. 배병삼 교수는 “첫째, 중국 고대의 시집인 『시경詩經』, 둘째, 중국 고대의 정치와 역사를 서술한 『서경書經』, 셋째, 국가와 계급 간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규정한 『예기禮記』, 넷째, 음악에 대한 이론서인 『악기樂記』, 다섯째, 점치는 책인 『역경易經』, 그리고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春秋』”라 말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문학과 역사, 그리고 윤리와 예술 과목을 중점으로 공부했다 여기면 되겠군요. 어때요? 옛 사람들도 만만찮게 공부했지요?

지금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입시제도가 있는 것도 무조건 없애고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성취했는지 측정하는 제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것만 위주로 공부하고 그것이 공부의 전부인양 여기며 한번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제도에 있지요.

공부하는 것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공자도 글쓰기와 셈하기를 공부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예와 악을 배우려고 애썼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시간을 내어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지요. 공자가 무엇으로 공부했겠습니까? 그렇지요, 앞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책을 텍스트 삼아 ‘열공’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군자가 전문가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참된 사람이라는 뜻도 품고 있으니, 공자 공부의 목적은 오늘과는 달랐던 것이지요.

이 점이 중요한 듯싶어요. ‘왜 공부를 해야 하나’에 대한 고민 없이 무작정 공부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꿈은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꿈이 이루어진다 해서 우리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는 바로 여기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습니다. 둘 다 이루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어느 것 하나를 무시하거나 놓치면 아니 된다는 뜻도 품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너무 독서를 통한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는 셈이지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쁨으로 익히고 실천하여 길에 이르다
더 큰 문제는 익힘에 있습니다. 학교공부하랴 학원공부하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며 공부를 하니,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지요. ‘공부의 신’들이 하는 말 가운데 공통점이 예습과 복습의 중요성이지요. 그럼에도 지금의 교육현실에서 복습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자꾸 자기주도적 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익힘의 문제와 긴밀히 관계가 있습니다. 책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무감이나 수행평가 때문에 진지하게 읽어보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읽은 것을 다시 살펴보는 익힘이 없으면 그 책읽기는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책을 읽긴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이 지긋하게 든 어른들만 하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청소년들도 자주 하는 말이지요. 익힘이 없기 때문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데다, 그러다보니 책읽기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경험을 하기 어려워지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책읽기의 익힘으로는 무엇이 가장 좋을까요? 역시 독후감을 써보고 토론해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익힘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머리로만 알지 말고, 직접 몸으로 해보아야 됩니다. 참된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아무리 읽어서 알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가능한 것부터 실천해나가며 자신을 성찰하고 고쳐나가려 해야 비로소 그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 흔히 길은 처음부터 닦여 있는 걸로 알지만, 가고 나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 길이지요. 참된 것에 이르는 길은 눈앞에 펼쳐져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학업을 위한 공부든, 참된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든 그것이 기쁨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지요? 정말 기쁨 속에서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반성하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답을 알고 있나요? 나는 『논어』에 나오는 세 번째 구절, 그러니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면 군자”라는 말에서 깨달을 바가 많다고 봅니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사람은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성낼 일이 없는 것이지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라야 기쁨이 됩니다. 부모님이, 사회가 가라고 억지를 부려 선택했다면 짐이 되고 말겠지요. 그 길은 가시밭길일 터이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까봐 안달을 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을 하든 깊은 성찰과 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 기쁨이 될 터입니다.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과 익힘의 길입니다. 부디, 이 길이 기쁨이 되길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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