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교사 녹색성장 교육의 시대, ‘살림의 경제학’ 어떻게 가르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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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3 16:59 조회 6,261회 댓글 0건본문
‘성장’을 극복하는 ‘자율’
이 수 종 먼저 녹색성장의 개념과 문제점, 녹색성장 교육의 문제점 등을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발제하겠습니다.
발제문 제목은 ‘어느 것이 구원의 밧줄인가?’입니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저탄소 녹색성장 위원회’는 녹색성장의 개념을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이고 녹색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新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新국가 패러다임’이라고 합니다. 녹색성장은 경제성장의 지속성과 환경의 시장가치화라는 두 가지 전제를 내포하고 있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환경규제 완화나 4대강 정비사업으로 둔갑한 한반도운하 사업 등으로 토목건축을 통한 경제성장을 포기하지 않고 복지지출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돈만 되는 녹색’만 쫓아 결국 더 많은 환경 파괴와 저소득층, 사회적 약자의 고통만 심화되는 ‘저탄소 녹색성장이 아니라 고탄소 회색성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오성규(2009), 「저탄소 녹색성장인가? 고탄소 회색성장인가?」, 월간 <말> 2009년 2호(통권 272호), p. 240). 최근 연구에서 녹색성장 교육을 ‘환경 및 경제의 상호보완의 융합적 창조 교육’,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을 하나의 개념으로 승화시킨 창조 교육’, ‘미래 녹색기술, 산업의 창의적 사고 및 도전의식 및 직업 개척능력 향상을 위한 미래지향 교육’, ‘국제기구와의 협력과 선진녹색교육의 선도적 지위 확보를 위한 글로벌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개념 정의에는 교육의 대상인 학생은 없습니다.
교육은 빠지고 산업만 들어 있어요. 교육의 대상은 학생인데 학생의 인지적, 정의적, 심체적 발달은 어떻게 할 것인지, 창조, 창의적 사고, 도전의식이라는 단어는 들어가 있으나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죠. 둘째로, 교육을 편향적으로 경제발전 도구로 이용하려 합니다. 교육을 경제적 효율성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인데요. 사교육 문제를 방과후 학교로 해결하려는 단기적인 MB정부의 해법에서 이런 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살림의 경제학』에서 지적하는 교육의 문제는 경쟁입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교육은 이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데 그 당위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행복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속기도 합니다. 대안이 별로 없으니까요. 이 자리는 그 혼돈속에서 밧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가 끝날 때 어떤 것이 구원의 밧줄이고 어떤 것이 썩은 밧줄인지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확실한 이유와 대안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미리 질문지를 주신 분들이 계셔서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김 정 숙 공부와 경쟁을 강요하는 부모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 아이들에게 ‘같이’ 행복해지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만,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강수돌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또,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는데, 동시에 ‘일하는 않는 자는 먹지 마라’고 배워 왔잖아요. 저도 이 말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삶과 노동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고 정책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강 수 돌 부모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학교에서 느낄 수 있게 선생님이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네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내면의 욕구에 솔직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어요.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거죠. 경쟁 사회에 길들여진 부모, 그것을 넘어 경쟁을 재생산하고 강조하는 부모도 있겠죠. 아이가 그런 부모를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경우에는 다른 데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워 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자는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말씀하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는 말에서 글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보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죠.
그런데 이말이 공식화된 사회적 맥락을 보면 자본가, 기득권층이 자본주의 규율노동에 길들여지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데 쓰는 말이거든요. 자본주의 규율노동을 ‘살림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동트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질 무렵 보금자리에 깃드는 자연스런 삶의 형태, 자연스런 노동의 형태, 자연스런 시간의 리듬을 알람 소리에 일어나 주어지는 노동 속도와 노동량에 맞추기 위해 강제로 수행해야 하고 그 결과물도 자기 것이 되지 않는 기계적, 강제적, 억압적 맥락 속으로 집어넣는 ‘훈육 매커니즘’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을 엄밀히 적용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 하고 비틀어서 생각하면, 국회의원들이나 자연 생태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먹을 자격이 없는 거죠. 마지막으로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위한 정책적 방법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에 관련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현재의 시장 패러다임이나 그것과 공생하고 있는 국가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 나름대로 ‘자율 패러다임’을 구상해 본 겁니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하는 건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율의 패러다임은 함께 토론하고 깨지고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춧돌은 필요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도기적 과정으로서 사다리 질서 속 기득권 경쟁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공생하면서 각자의 발전을 도모하고 그 실력 양성과 발전의 결과들을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틀로 가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네 가지를 짚어 보았습니다.
첫째, 개성 있는 평등화를 정책적,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그 개성을 살리는 공부나 직업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진학하거나 직업 선택할 때 갈등을 별로 안 해도 되죠. 이때 갈등의 핵심은 ‘난 뭘 하고 싶지?’가 될 거예요. ‘부모님이 뭘 하라고 하는데’. ‘어디 가야 대우받지?’ 이런 갈등은 더 이상 안 해도 되잖아요.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입니다. 자본주의 노동 과정에서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생산성이 향상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승자 독점식으로 빼앗아가니까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하죠. 그 결실들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려면 노동시간 단축 패러다임밖에 없어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삶의 여유가 생기고 책 읽거나 산책하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NGO 활동을 하거나 하는 다양한 창조적 활동을 할 여지가 생기죠. 일터로 돌아갔을 때 그 각성과 학습의 결과가 질적 고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의 차원과 땅의 차원 두 가지 대안밖에 없다고 봅니다. 시간을 줄여서 일을 나누는 거예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삶의 질 차원, 실업 대책 차원, 창의력 증진 차원 등에서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 주거, 교육, 의료 문제는 사회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20년 전보다 열 배 이상 월급을 받고 있는데도, 실질임금이나 가처분 소득을 보면 빚이 자꾸 늘고 있죠. 그 빚은 주거가 대부분이고요. 교육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찮아요. 삶의 양식이 바뀌어 의료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암에 걸리거나 하면 큰돈이 필요해요.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돈이 드는 세 가지 부문입니다.
주거에서는, 더 궁극적인 해결 방안으로 땅과 집의 탈상품화를 정책적으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게 먼 이야기라면, 최소한 공공임대주택을 보편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보다 급하게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이나 싱가포르처럼 땅은 공공의 것으로 해서 사고팔지 못하게 하되 주택만 사고팔게 하는 거죠.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이야기하지만, 누군가 비용 부담을 해야 하죠. 그게 사회적 재분배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벌면 많이 내고 탈루세 잡아내고 4대강에 쏟아 붓는 수십 조 혈세를 돌려 이 세 가지 분야만이라도 공공적으로 해결해 낸다면 생활비 때문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줄일 수 있어요.
넷째, 유기농 농민들을 공무원이나 준공무원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이 온집안 식구를 살리듯이 사회적으로 바탕을 살리는 분은 유기농 농민입니다. 물론 농민 일반이 중요하지만, 점차 농약이나 제초제 안 뿌리는 유기농법을 장려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 농사짓는 것도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같아요. 그렇다고 채집 경제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유기농법으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겠지요. 그것을 제도적으로 안착시켜 유기농 농민의 자부심, 땅을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 살림살이 경제를 세우는 기초라는 의미 부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 구조를 만드는 기본 틀을 갖추어 나가면서 생태적 공동체 논의가 활성화되어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그런 틀의 내용을 만드는 노력들이 내부에서 나와 토론되고 실현되고 커져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수 진 선생님께서 모델로 생각하시는 것을 ‘자율적 생태공동체’라고 하셨는데, 그런 공동체로 가려면 세밀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비전을 제시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책 제목처럼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 대안이 빠지면 자본주의를 지양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죠.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생각해 오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국가에 의한 복지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보시는 것 같은 느낌은 받았는데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국가에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국가의 복지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강 수 돌 이론적으로, 시장 패러다임과 국가 패러다임에 대한 안티테제 또는 제3의 길로 자율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설명드린 네 가지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복지의 최대치죠. 시장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하는 지금과 같은 최소한의 복지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돼요. 그 이상 세밀한 전략은 모르겠습니다. 한살림, 대안교육 운동, 마을공동체 운동에서 민중무역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우리 영혼까지 살리는 살림의 경제를 제 나름대로 찾아보고 정리해서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실천들을 책에 제시했습니다.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방법은 소통과 연대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하는 북유럽의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같은 나라들을 보면 노동조합 조직률이 56~79퍼센트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은 민주노총, 한국노총 합해서 10퍼센트예요. 소수 활동가들이 건강과 생활을 해쳐가면서 억지로 지켜내는 거죠. 만약 100명 중 60명이 똘똘 뭉쳐 사회적인 꿈을 공유한다면 어느 정치가가 감히 이 사람들을 무시하겠습니까. 사회적인 꿈을 공유하기 위해서도 소통과 연대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도 그 꿈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역, 마을, 일터에서 작은 풀뿌리 같은 다양한 소모임들이 왕성하게 생겨야죠. 제가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이게 정답이라는 건 아니고, 빠진 것, 부족한 것, 보태야 할 것은 없는지, 앞뒤가 안 맞는 건 없는지 하는 논의를 하는 모임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이런 모임 조직률이 60퍼센트 이상 될때 비로소 이런 구상들이 현실화할 수 있겠죠.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기댈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가지 중요한 기준을 꼽은 것입니다.
녹색성장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엄 은 희 ‘녹색성장’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래 ‘녹색’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진보의 의제였는데, 이 정권 들어 빼앗겼다고 볼 수 있죠. 개념을 탈취당했을 때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 잘못도 있잖아요. 단어의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면, 기의를 채우는 작업들을 소홀히 했을 때 기표를 탈취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공정한 사회’라는 말도 있죠. 공정, 얼마나 아름다워요. 발제에서 말씀하신 창조, 상호보완, 융합……. 이런 중립적 말들의 기의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필요해요. 또 하나, 우리 사회가 유행에 민감하잖아요. 한번 유행이 지나면 잘 안 쓰고 새로운 개념들을 계속 발굴하려 하고, 사람들도 쉽게 새로운 개념 쪽으로 기울죠.
저는 ‘녹색’이라는 단어를 되찾아 와야 하고, 그러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을 보면 돈벌이 패러다임과 살림살이 패러다임을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강하게 비판하시고 후자의 가능성에 대단히 주목하시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요.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는 설명력은 분명히 높일 수 있지만 설득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이를테면, 이렇게 선을 그어 놓는 흑백논리로 개인의 각성이 개인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복잡한 관계에 얽혀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줄 수도 있는 화법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처방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강 수 돌 ‘녹색성장’이나 ‘공정한 사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껍데기가 아니라내용을 들여다봐야죠. 내용과 실체를 짚어 저들 주장이 오히려 덫으로 작용하도록 전략을 세우는 거예요.
기의를 채우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씀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일관된 실천을 해 나가는 게 중요해요. 녹색성장 교육에 온갖 좋은 이야기를 다 써 놓고 있지만, 바로 그 기준을 들여다보면 내용에서 앞뒤 일관성이 없거나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한 거죠. 돈벌이와 살림살이에 대한 지적에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흑백논리라는 말씀에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가운데에 교집합으로 있는 것이고 자본과 생명이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과는 다르죠. 노동은 생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가변 자본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이 포함된 생명 세계를 자본이 갉아먹는 데 중간에 노동이 매개해 주는 거죠. 그 노동은 돈벌이 패러다임에도 속해 있지만 살림살이 패러다임에도 속해 있어요. 노동편이냐 자본 편이냐 이러면 흑백논리가 될 수 있죠. 그런데 노동은 자본의 일부이면서 생명의 일부거든요.
우리가 강자와 동일시하고 자본과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부터 발을 빼기 시작하는 작업을, 이를 테면 밥상과 아이들 교육 문제와 마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다리 구조 대신 원탁에서 이야기하면서 생명의 세계로 같이 옮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운데 끼어서 노동 중독과 소비 중독이라는 두 굴레에 갇혀 뭔가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은 치는데 그 틀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노력하는데도 희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자본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비로소 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하나씩 실험하면서 발을 뺄 수 있어요. “일류 대학 안 가도 돼, 너 좋아하는 거 하면서 인생을 멋지게 한번 살아봐.” 이렇게 말하는 게 벌써 교육의 관점에서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생명교육의 관점인 거죠. 부모나 선생님들이 그런 관점을 가질 때 희망이 있어요. 아까 좌절감과 상처를 강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에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스스로는 그렇게 정리했어요.
아이들한테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일류 대학이나 일류 직장이 아니라 일류 인생을 살아라. 일류 인생의 핵심은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네가 하고 싶은 것 열심히 해서 네 실력을 내면으로 키우는 것,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제 실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것. 그러면 네가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런 관점을 부모와 선생님이 공유할 때 비로소 자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날 노력해도 똑같을 거예요.
박 혜 경 저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이끄는 건 정말 어려워요. 중학교에 있을때 중고품을 모아 축제에서 장터를 열고, 지금 일하는 고등학교에서는 중고가게를 조그맣게 열었는데, 아이들이 창피해 하는 거예요. 물건을 팔지도 못하고 거기서 있는 것도 부끄러워해요. 책에서 ‘빈곤이 대안’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본의 논리가 내면화되어 있어요. 말로 가르치긴 부족하고. 제 생각이나 여러 선생님들 생각을 함께 나누는 교육의 장이 필요해요. 그런데 사실 학생과 교사는 굉장히 불편한 관계예요. 학교는 자본주의의 첨병을 만들어 내는 공장 같은 것이라, 교사는 사실 주구走狗예요. 저희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스템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아이들도 저희를 그런 눈으로 보고요.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공간이 없어요.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어떤 식으로 살림의 경제를 가르치시는지 궁금합니다.
강 수 돌 굉장히 어렵다는 건 저도 알지요. 인간적으로 교육하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시도하다가 좌절하고 상처받고 포기하지 말고 학교 밖에 대안적 공간을 마련해 그 속에서 만들어나가면 어떨까요? 제도권 안에서 시달리다가 포기하는 그 열정을 제대로 쏟아부으면 훨씬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어요. 우리 힘이 더 세져서 교육 당국을 바꾸고, 서울시 교육감, 경기도 교육감을 바꾸고, 더 성숙해서 장학사나 교육청을 바꾸고, 평교사들이 교장이나 교감을 뽑고, 교과 내용이나 학교 운영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한다면 답이 나오겠지요. 그런꿈도 버리지 말아야죠. 그런 사회적 꿈도 가지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실천을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입장을 과목에 맞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가르친다면, 노사관계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노동시장, 노동과정, 생활과정 세 영역에서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파생되는 이슈들을 제시해 모둠별로 발표하고 제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식으로 하죠. 학생이 교육의 대상이라고 하지만, 저는 공동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좀 먼저 태어나고 조금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선생 역할을 하지만, 결국은 같이 배우는 과정이죠.
엉뚱하거나 엉터리일지라도 어쩌면 또 다른 의미로 가르침이 될 수 있거든요. 제가 이장을 하기 전에도 마을에 관심은 있었지만, 아파트 싸움하면서 마을 주민이 됐는데요. 대학생들이 마을 도서관을 중심으로 마을 공부방을 해요. 다음 주에 2학기 개강합니다. 마을 아이들이 대학생을 만나고 대학생들이 마을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새로운 문화가 되는 거예요. 학생들은, 부모 되기를 준비할 수도 있고, 공부한 것을 돌아볼 수도 있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다시 바라보는 눈이 생길 수도 있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릴 적 마을에 대학생들이랑 놀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했던 공동의 체험이 되겠죠. 학생들과는 주로 강의실에서 만나지만, 졸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점차원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디자인하는 데 새로운 주춧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교육의 함정
이 수 종 아까 교사가 자본주의의 주구라고 하셨는데, 부모는 자본주의의 트레이너예요. 요즘 부모들은 일류 입시 전문가보다 더 상세히 알고 자기 아이들을 트레이닝시키거든요. 아이들이 비교적 큰 정진영, 남궁효 선생님이 경험하셨을 것 같아요. 자식이 이런 것을 벗어나도록 어떤 관점에서 교육을 하고 계신가요? 그것이 결국 학생들에 대한 교육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정 진 영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공동육아를 알게 됐어요. 초등학교 때 공동육아 방과후 학교를 보내 행복하게 살았죠. 그러다가 중학교를 보낼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들이 학원을 떠돌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대안학교에 보냈죠. 아이가 들어간 대안학교는 실험을 많이 하는 학교였어요. 1, 2, 3학년 때 모습이 다 달랐던 것 같아요. 2학년 때 대대적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냥 안 가르치는 거였죠. 안 가르치고 아이들 개성을 탐구하면서 그 개성에 따라 길을 제시하려는 거였는데, 거의 실패했죠. 학교가 완전히 깨지고 선생님들이 새로 오셨어요. 저는 아이가 공부 잘하고 성공하는 건 애초에 바라지 않고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요새 보면 아이도 아주 소극적인 것 같아요. 뭔가 열심히 해 보려는 생각이 없고, 그저 편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아이한테는 대안학교가 잘 맞을 수 있겠지만, 어떤 아이한테는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학교에 있으면 힘들죠, 사실. 담임을 하면 공부하라고 해야 하잖아요. 놀라고 하고 싶은데. 아이들 데리고 농촌봉사활동이나 텃밭 가꾸기 같은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시간도 없고 재미있어 하지도 않아요.
아이들이랑 소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일하는 학교 부모들도 아이들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기만 바라지,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용납하지 않아요. 공교육이 아주 힘들어요. 그럼 뛰쳐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도 합니다. 저는 학교에 논이나 텃밭도 만들면서 가급적현장하고 연결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교육에 있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환경반에 아이들을 모으려면 대학갈 때 도움이 된다고 해야 돼요.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지원하죠. 지금 상황이 그래요. 고민이 많아요.
강 수 돌 아까 말씀드린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를 공교육에 적용하면 답이 있어요. 한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소양이 있죠. 소위 국민 공통교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한글이나 기초적인 셈은 알아야하니까. 그런데 그건 매일 네 시간씩만 해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유기농으로 무상급식 한 시간 하고, 좀 졸리니까 학교 텃밭 체험 한 시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하세요.” 개성 교육, 맞춤형 교육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학교 안팎에 다양한 프로그램의 장을 만들어 주고. 물론 공적으로 만들어야겠죠. 시 쓰고 싶은 아이, 뮤지컬 하고 싶은 아이, 악기 다루고 싶은 아이, 노래하고 싶은 아이, 농사짓고 싶은 아이, 진짜 공부가 미치도록 좋은 아이…….
그 욕구를 맞춤형으로받아 줄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주면 아이들이 얼마나 신바람 나겠습니까? 그런 꿈을 가진 교육감을 뽑고, 그런꿈을 가진 교장, 교감이 나오면 돼요. 비판하고 욕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잠입해 그 자리에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런 맥락에서 대안교육과 공교육이 만나게 되겠죠. 저는 공교육을 옹호하지만, 공교육 내용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재정 부담을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자는 뜻입니다. 그 교육 내용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짧게 공부하면서도 즐겁게 자기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하고요. 개성 있는 평등화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 비슷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때 비로소 완결되겠죠.
이 수 종 자기 아이는 뒤에서 엄청나게 과외시키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너 공부하지 마, 너는 행복해야 돼’이럴 수는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 여기 오신 선생님들은 그런 부분이 일치하도록 노력하시는 분들이거든요. 결국 개인적인 실천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남 궁 효 예전에 선생님이 번역하신 줄은 모르고,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을 봤어요. IMF 직전에 20대 80 사회를 상상하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더라고요.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살림의 경제학』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실천에 대해서는 전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큰아이가 대학교 2학년이고 작은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집사람이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참교육 학부모 모임을 했어요. 학교 교육이 너무 한쪽 방향으로 쏠리니까, 학부모들이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큰아이는 잘 자란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딱 1년 학원 다니고 저 혼자 공부했어요. 작은아이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전혀 공부를 안 해요. 이중적인 것이, 자식들이 잘하고 있으면 ‘학원을 왜 보내, 집에서 하면 되지’ 이런 소리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바뀌는 거죠. 알고 봤더니 얘가 형하고 경쟁관계가 내면화돼 있는 거예요. 뭐든지 형이 앞서고 상장도 형이 다 타고 그러니……. 저는 그걸 몰랐어요. 중 3때 크게 화를 냈더니, 관계가 아주 나빠졌어요.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기타를 치고 싶대요. 그런데 기타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단순히 공부는 하기 싫고 그냥 놀고 있을 수는 없고. 4년째 기타를 뚱땅거리고 있는데, 형이 더 잘 쳐요. 작은 녀석에게 어떻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신감을 갖게 할 것인가가 제 화두입니다.
강 수 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형과 비교하지 않는 게 좋아요. 언젠가 실력이 확 늘어서 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거라고 격려해 주면 그만큼 행복하게 살 거예요. 이 길이다 싶으면 계속 갈 거고,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바꾸게 돼요. 부모가 미리 이게 너의 길 맞다, 아니다 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느끼는 대로 가면 되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자식들과 인연을 맺고 만난 사이잖아요. 부모가 부모 욕심이나 걱정을 아이들에게 심어서 이룰 수 있는 게 없어요. 아이가 자기 인생을 사는데 스스로 행복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 기준이 자기 속에서 나와야죠. 어찌 보면 해법은 단순해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고속도로를 닦아놨으니 이길로 가면 네가 행복해진다’고 그어줄수록 불행해져요. 나도 불행해지고, 아이도 불행해지고. 투자한 만큼 본전찾을 생각하게 돼서 불안한 거예요. 나중에 배신하면 원수가 되고,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억지로 부모 뜻에 맞추면 자식이 불행해지고. 우리가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함께 사는 친밀한 시간을 따져 보면 몇 년 안 됩니다. 함께 사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존중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면 새로워질 것 같아요.
변화의 물꼬를 틀면
이 수 종 행복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 행복해지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고등학교에서 행복과 관련된 정치경제 과목을 가르치시는 신성호 선생님은 고민이 있으실 것 같아요. 자본주의적인 내용을 가르치시는데…….
신 성 호 요즘 애들이 경제 과목을 많이 선택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6차 교육과정에서는 의무 과목이었는데, 그때 내용이 오히려 나았어요. 노동 문제도 다루었고 지금처럼 편파적이지 않았죠. 7차 교육과정 때 악화됐다가, 이번 개정에서 더 악화됐어요. 이번 입시 체제를 보니까 경제만 별도 과목으로 떼어 놨더라고요. 요즘 테샛(TESAT: Test of Economic Sense And Thinking, 경제이해력 검증시험, 한국경제신문 주관)이 거의 장악을 했잖아요. 학교에도 거기서 내는 작은 신문(생글생글, 아하경제)이 계속 와요. 지금 교과과정에 너무 충실하게 따르면 교사들이 정말 주구가 되겠죠. 사회 선생님들이 그걸 깨뜨릴 수 있다고 봅니다. 교과 모임하고 공부하고 학습지도안도 같이 만들고……. 그러면 비록 저쪽에서 독을 주었지만, 독 있는 물을 정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에는 비관적이었지만, 지금은 선생님들의 주체적인 생각에 달렸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수 종 저도 동의합니다. 녹색성장 교육에 관해서 대통령 대면 보고를 하기 위해 급조된 프로젝트팀의 연구에 조언을 한 적이 있어요. 연구책임자가 교육학자가 아니라 나노공학을 하는 교수였죠. 처음에는 공학적으로 접근을 하더니 차츰 관련 학자나 교사들에게 자료를 받아 연구를 하면서 입장이 교육적으로 바뀌더라고요. 아마 공학자 이전에 교육자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정책이 비교육적이어도 교사가 제대로 성찰을 하고 가르치면 해결의 실마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과정에 저에너지나 유기농 같은 내용을 가미해서 가르치면 되거든요. 그 밖에 개인적 실천 차원에서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가정을 꾸리고 있거나 앞으로 결혼하실 분들은…….
이 인 문 사회적인 인식이,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결혼식을 해도, 가족이나 결혼 상대자와 그 가족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풀뿌리, 끝에서부터 해 나가야 한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실천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학교는 공교육의 기본만 유지하고 학교 제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살림의 경제학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요?
강 수 돌 문제의식 있는 사람이 학교를 들여다보면 고통스럽지요.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아이디어, 사례들을 발굴하고 해서 선생님이 대안적인 교과서를 만들 수도 있고, 풀(pool)을 만들어 그때그때 끌어내어 쓴다든가하는 창의적인 노력을 해 볼 수 있죠. 아이들에게 현실경제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가려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게 중요해요. 물 한 방울도 아껴 쓰고 지우개 하나라도 친구와 나눠 쓰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 불켜 놓지 않고……. 살림의 관점에서 아이들에게 물 부족 사태나 지구온난화, 화석연료의 문제를 가르칠 수 있죠. 현실적인 자료와 사례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어떤실천을 해야 할지, 사회적으로 어떤 비전을 만들어가야 할지 접근하는 것이 진짜 참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사회구조를 바꾸는 건 우리가 할 일이죠. 사회를 바꾸는 데 동참해서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비로소 같이 사회가 바뀌어요. 그래야 조그만 변화라도 가능하죠. 교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김 버 들 학교에서 독서토론 모임을 하면, 선생님들이 책은 잘 읽었지만 결국은 불의한 사회에 대한 반감만 느끼게 된다고 하세요. 교사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막상 실천하는 게 어렵네요. 사회구조를 바꾸려면 기본적으로 권력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 움 학교에서 살림의 경제학을 각 과목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서 교사라 아이들과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게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예전에는 싸고 양 많은 걸 좋아했는데, 생협을 알게 되면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이제 슈퍼에서 1,000원이면 살 수 있는 양조식초 대신 9,000원짜리 생협 감식초를 사요. 그런데 학생들은 진심으로 환경을 생각하고 나부터 실천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할 수 없는 게 있잖아요. 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경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 지금 공부해야 한다, 지금 당장 공부하면 배우자가 바뀐다더라……. 저 스스로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게 고민스러워요.
강 수 돌 생협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사례같네요. 2,000원밖에 없는데 1,000원짜리 두 개 사는 게 낫지, 빚내서 9,000원짜리 한 개를 살 수는 없잖아요. 당장은 어쩔 수 없이 1,000원짜리를 사더라도 나중에 알바를 해서라도 9,000원짜리가 먹고 싶다는 작은 목표를 가질 수는 있죠. 어쩔 수 없이 천 원짜리를 사지만, 몸에 나쁘다는 걸 알고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구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인 대화가 될 수 있어요.
개인이 행복한 사회
정 수 진 핀란드에서 학업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별도로 교육시켜 일정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하잖아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학력을 갖추는 것이 가능한지, 그래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갖추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학업 능력을 갖추어야 할지는 그 사회의 현실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일까요?
강 수 돌 공교육의 탄생을 보면, 프로이센에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었어요. 학교의 기본 모델이 공교육인데, 국가가 요구하는 인적자원을 길러낸다는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 아이디어가 거기에 맞닿아 있죠.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같이 책임지자고 하는 것은, 재주를 살려 무언가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는 경제력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거예요. 바람직한 이상을 제시하자면, 공교육뿐만 아니라 홈스쿨링, 대안 교육 같은 틀들이 자유롭게 열리되 재정적인 부담은 사회가 담당해야 합니다.
그 부분에서 복잡한 이야기들이 나오겠죠. 기본적으로,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경제사회적인 재생산에 동참하는 게 주된 흐름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살림살이가 꾸려지죠. 그런 모델 가운데 하나가 생애 노동시간이에요. 한평생 살면서 4만 시간 노동한다고 보면, 이 4만 시간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초반에 열심히 일하고 노후를 여유 있게 보낼 수도 있고, 잘게 쪼개서 죽을 때까지 일할 수도 있겠죠. 평생생애 노동시간을 두고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자는 아이디어예요.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두 측면에서 다 존중받을 수 있는 교육과 직장에 관한 아이디어를 열린 토론을 통해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 수 종 결국 나 자신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아무리 녹색성장을 이야기해도 틈새는 있고 그걸 세력화했을 때 해결될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연수, 다양한 교육운동으로 전파하고 교사들을 의식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 정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 수 돌 소통, 연대, 단결, 희망 등 온갖 이야기를 다 했지만, 결국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거죠. 그러려면 만드는 주체의 하루하루 생활도 행복해야 하거든요. 선생님들이 교실에 가시든 가정에 가시든 스스로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사시고 그러면서도 공동의 사회적인 비전에 대해 넓혀 나가는 작업들을 천천히 행복하게 하시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 종 먼저 녹색성장의 개념과 문제점, 녹색성장 교육의 문제점 등을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발제하겠습니다.
발제문 제목은 ‘어느 것이 구원의 밧줄인가?’입니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저탄소 녹색성장 위원회’는 녹색성장의 개념을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이고 녹색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新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新국가 패러다임’이라고 합니다. 녹색성장은 경제성장의 지속성과 환경의 시장가치화라는 두 가지 전제를 내포하고 있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환경규제 완화나 4대강 정비사업으로 둔갑한 한반도운하 사업 등으로 토목건축을 통한 경제성장을 포기하지 않고 복지지출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돈만 되는 녹색’만 쫓아 결국 더 많은 환경 파괴와 저소득층, 사회적 약자의 고통만 심화되는 ‘저탄소 녹색성장이 아니라 고탄소 회색성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오성규(2009), 「저탄소 녹색성장인가? 고탄소 회색성장인가?」, 월간 <말> 2009년 2호(통권 272호), p. 240). 최근 연구에서 녹색성장 교육을 ‘환경 및 경제의 상호보완의 융합적 창조 교육’,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을 하나의 개념으로 승화시킨 창조 교육’, ‘미래 녹색기술, 산업의 창의적 사고 및 도전의식 및 직업 개척능력 향상을 위한 미래지향 교육’, ‘국제기구와의 협력과 선진녹색교육의 선도적 지위 확보를 위한 글로벌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개념 정의에는 교육의 대상인 학생은 없습니다.
교육은 빠지고 산업만 들어 있어요. 교육의 대상은 학생인데 학생의 인지적, 정의적, 심체적 발달은 어떻게 할 것인지, 창조, 창의적 사고, 도전의식이라는 단어는 들어가 있으나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죠. 둘째로, 교육을 편향적으로 경제발전 도구로 이용하려 합니다. 교육을 경제적 효율성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인데요. 사교육 문제를 방과후 학교로 해결하려는 단기적인 MB정부의 해법에서 이런 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살림의 경제학』에서 지적하는 교육의 문제는 경쟁입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교육은 이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데 그 당위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행복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속기도 합니다. 대안이 별로 없으니까요. 이 자리는 그 혼돈속에서 밧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가 끝날 때 어떤 것이 구원의 밧줄이고 어떤 것이 썩은 밧줄인지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확실한 이유와 대안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미리 질문지를 주신 분들이 계셔서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김 정 숙 공부와 경쟁을 강요하는 부모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 아이들에게 ‘같이’ 행복해지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만,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강수돌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또,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는데, 동시에 ‘일하는 않는 자는 먹지 마라’고 배워 왔잖아요. 저도 이 말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삶과 노동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고 정책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강 수 돌 부모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학교에서 느낄 수 있게 선생님이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네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내면의 욕구에 솔직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어요.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거죠. 경쟁 사회에 길들여진 부모, 그것을 넘어 경쟁을 재생산하고 강조하는 부모도 있겠죠. 아이가 그런 부모를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경우에는 다른 데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워 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자는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말씀하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는 말에서 글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보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죠.
그런데 이말이 공식화된 사회적 맥락을 보면 자본가, 기득권층이 자본주의 규율노동에 길들여지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데 쓰는 말이거든요. 자본주의 규율노동을 ‘살림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동트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질 무렵 보금자리에 깃드는 자연스런 삶의 형태, 자연스런 노동의 형태, 자연스런 시간의 리듬을 알람 소리에 일어나 주어지는 노동 속도와 노동량에 맞추기 위해 강제로 수행해야 하고 그 결과물도 자기 것이 되지 않는 기계적, 강제적, 억압적 맥락 속으로 집어넣는 ‘훈육 매커니즘’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을 엄밀히 적용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 하고 비틀어서 생각하면, 국회의원들이나 자연 생태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먹을 자격이 없는 거죠. 마지막으로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위한 정책적 방법은,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에 관련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현재의 시장 패러다임이나 그것과 공생하고 있는 국가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 나름대로 ‘자율 패러다임’을 구상해 본 겁니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하는 건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율의 패러다임은 함께 토론하고 깨지고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춧돌은 필요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도기적 과정으로서 사다리 질서 속 기득권 경쟁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공생하면서 각자의 발전을 도모하고 그 실력 양성과 발전의 결과들을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틀로 가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네 가지를 짚어 보았습니다.
첫째, 개성 있는 평등화를 정책적,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그 개성을 살리는 공부나 직업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진학하거나 직업 선택할 때 갈등을 별로 안 해도 되죠. 이때 갈등의 핵심은 ‘난 뭘 하고 싶지?’가 될 거예요. ‘부모님이 뭘 하라고 하는데’. ‘어디 가야 대우받지?’ 이런 갈등은 더 이상 안 해도 되잖아요.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입니다. 자본주의 노동 과정에서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생산성이 향상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승자 독점식으로 빼앗아가니까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하죠. 그 결실들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려면 노동시간 단축 패러다임밖에 없어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삶의 여유가 생기고 책 읽거나 산책하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NGO 활동을 하거나 하는 다양한 창조적 활동을 할 여지가 생기죠. 일터로 돌아갔을 때 그 각성과 학습의 결과가 질적 고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의 차원과 땅의 차원 두 가지 대안밖에 없다고 봅니다. 시간을 줄여서 일을 나누는 거예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삶의 질 차원, 실업 대책 차원, 창의력 증진 차원 등에서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 주거, 교육, 의료 문제는 사회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20년 전보다 열 배 이상 월급을 받고 있는데도, 실질임금이나 가처분 소득을 보면 빚이 자꾸 늘고 있죠. 그 빚은 주거가 대부분이고요. 교육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찮아요. 삶의 양식이 바뀌어 의료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암에 걸리거나 하면 큰돈이 필요해요.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돈이 드는 세 가지 부문입니다.
주거에서는, 더 궁극적인 해결 방안으로 땅과 집의 탈상품화를 정책적으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게 먼 이야기라면, 최소한 공공임대주택을 보편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보다 급하게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이나 싱가포르처럼 땅은 공공의 것으로 해서 사고팔지 못하게 하되 주택만 사고팔게 하는 거죠.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이야기하지만, 누군가 비용 부담을 해야 하죠. 그게 사회적 재분배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벌면 많이 내고 탈루세 잡아내고 4대강에 쏟아 붓는 수십 조 혈세를 돌려 이 세 가지 분야만이라도 공공적으로 해결해 낸다면 생활비 때문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줄일 수 있어요.
넷째, 유기농 농민들을 공무원이나 준공무원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이 온집안 식구를 살리듯이 사회적으로 바탕을 살리는 분은 유기농 농민입니다. 물론 농민 일반이 중요하지만, 점차 농약이나 제초제 안 뿌리는 유기농법을 장려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 농사짓는 것도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같아요. 그렇다고 채집 경제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유기농법으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겠지요. 그것을 제도적으로 안착시켜 유기농 농민의 자부심, 땅을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 살림살이 경제를 세우는 기초라는 의미 부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 구조를 만드는 기본 틀을 갖추어 나가면서 생태적 공동체 논의가 활성화되어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그런 틀의 내용을 만드는 노력들이 내부에서 나와 토론되고 실현되고 커져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수 진 선생님께서 모델로 생각하시는 것을 ‘자율적 생태공동체’라고 하셨는데, 그런 공동체로 가려면 세밀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비전을 제시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책 제목처럼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 대안이 빠지면 자본주의를 지양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죠.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생각해 오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국가에 의한 복지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보시는 것 같은 느낌은 받았는데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국가에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국가의 복지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강 수 돌 이론적으로, 시장 패러다임과 국가 패러다임에 대한 안티테제 또는 제3의 길로 자율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설명드린 네 가지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복지의 최대치죠. 시장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하는 지금과 같은 최소한의 복지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돼요. 그 이상 세밀한 전략은 모르겠습니다. 한살림, 대안교육 운동, 마을공동체 운동에서 민중무역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우리 영혼까지 살리는 살림의 경제를 제 나름대로 찾아보고 정리해서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실천들을 책에 제시했습니다.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방법은 소통과 연대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하는 북유럽의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같은 나라들을 보면 노동조합 조직률이 56~79퍼센트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은 민주노총, 한국노총 합해서 10퍼센트예요. 소수 활동가들이 건강과 생활을 해쳐가면서 억지로 지켜내는 거죠. 만약 100명 중 60명이 똘똘 뭉쳐 사회적인 꿈을 공유한다면 어느 정치가가 감히 이 사람들을 무시하겠습니까. 사회적인 꿈을 공유하기 위해서도 소통과 연대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도 그 꿈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역, 마을, 일터에서 작은 풀뿌리 같은 다양한 소모임들이 왕성하게 생겨야죠. 제가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이게 정답이라는 건 아니고, 빠진 것, 부족한 것, 보태야 할 것은 없는지, 앞뒤가 안 맞는 건 없는지 하는 논의를 하는 모임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이런 모임 조직률이 60퍼센트 이상 될때 비로소 이런 구상들이 현실화할 수 있겠죠.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기댈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 가지 중요한 기준을 꼽은 것입니다.
녹색성장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엄 은 희 ‘녹색성장’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래 ‘녹색’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진보의 의제였는데, 이 정권 들어 빼앗겼다고 볼 수 있죠. 개념을 탈취당했을 때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 잘못도 있잖아요. 단어의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면, 기의를 채우는 작업들을 소홀히 했을 때 기표를 탈취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공정한 사회’라는 말도 있죠. 공정, 얼마나 아름다워요. 발제에서 말씀하신 창조, 상호보완, 융합……. 이런 중립적 말들의 기의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필요해요. 또 하나, 우리 사회가 유행에 민감하잖아요. 한번 유행이 지나면 잘 안 쓰고 새로운 개념들을 계속 발굴하려 하고, 사람들도 쉽게 새로운 개념 쪽으로 기울죠.
저는 ‘녹색’이라는 단어를 되찾아 와야 하고, 그러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을 보면 돈벌이 패러다임과 살림살이 패러다임을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강하게 비판하시고 후자의 가능성에 대단히 주목하시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요.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는 설명력은 분명히 높일 수 있지만 설득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이를테면, 이렇게 선을 그어 놓는 흑백논리로 개인의 각성이 개인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복잡한 관계에 얽혀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줄 수도 있는 화법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처방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강 수 돌 ‘녹색성장’이나 ‘공정한 사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껍데기가 아니라내용을 들여다봐야죠. 내용과 실체를 짚어 저들 주장이 오히려 덫으로 작용하도록 전략을 세우는 거예요.
기의를 채우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씀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일관된 실천을 해 나가는 게 중요해요. 녹색성장 교육에 온갖 좋은 이야기를 다 써 놓고 있지만, 바로 그 기준을 들여다보면 내용에서 앞뒤 일관성이 없거나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한 거죠. 돈벌이와 살림살이에 대한 지적에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흑백논리라는 말씀에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가운데에 교집합으로 있는 것이고 자본과 생명이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과는 다르죠. 노동은 생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가변 자본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이 포함된 생명 세계를 자본이 갉아먹는 데 중간에 노동이 매개해 주는 거죠. 그 노동은 돈벌이 패러다임에도 속해 있지만 살림살이 패러다임에도 속해 있어요. 노동편이냐 자본 편이냐 이러면 흑백논리가 될 수 있죠. 그런데 노동은 자본의 일부이면서 생명의 일부거든요.
우리가 강자와 동일시하고 자본과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부터 발을 빼기 시작하는 작업을, 이를 테면 밥상과 아이들 교육 문제와 마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다리 구조 대신 원탁에서 이야기하면서 생명의 세계로 같이 옮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운데 끼어서 노동 중독과 소비 중독이라는 두 굴레에 갇혀 뭔가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은 치는데 그 틀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노력하는데도 희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자본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비로소 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하나씩 실험하면서 발을 뺄 수 있어요. “일류 대학 안 가도 돼, 너 좋아하는 거 하면서 인생을 멋지게 한번 살아봐.” 이렇게 말하는 게 벌써 교육의 관점에서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생명교육의 관점인 거죠. 부모나 선생님들이 그런 관점을 가질 때 희망이 있어요. 아까 좌절감과 상처를 강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에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스스로는 그렇게 정리했어요.
아이들한테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일류 대학이나 일류 직장이 아니라 일류 인생을 살아라. 일류 인생의 핵심은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네가 하고 싶은 것 열심히 해서 네 실력을 내면으로 키우는 것,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제 실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것. 그러면 네가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런 관점을 부모와 선생님이 공유할 때 비로소 자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날 노력해도 똑같을 거예요.
박 혜 경 저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이끄는 건 정말 어려워요. 중학교에 있을때 중고품을 모아 축제에서 장터를 열고, 지금 일하는 고등학교에서는 중고가게를 조그맣게 열었는데, 아이들이 창피해 하는 거예요. 물건을 팔지도 못하고 거기서 있는 것도 부끄러워해요. 책에서 ‘빈곤이 대안’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본의 논리가 내면화되어 있어요. 말로 가르치긴 부족하고. 제 생각이나 여러 선생님들 생각을 함께 나누는 교육의 장이 필요해요. 그런데 사실 학생과 교사는 굉장히 불편한 관계예요. 학교는 자본주의의 첨병을 만들어 내는 공장 같은 것이라, 교사는 사실 주구走狗예요. 저희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스템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아이들도 저희를 그런 눈으로 보고요.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공간이 없어요.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어떤 식으로 살림의 경제를 가르치시는지 궁금합니다.
강 수 돌 굉장히 어렵다는 건 저도 알지요. 인간적으로 교육하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시도하다가 좌절하고 상처받고 포기하지 말고 학교 밖에 대안적 공간을 마련해 그 속에서 만들어나가면 어떨까요? 제도권 안에서 시달리다가 포기하는 그 열정을 제대로 쏟아부으면 훨씬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어요. 우리 힘이 더 세져서 교육 당국을 바꾸고, 서울시 교육감, 경기도 교육감을 바꾸고, 더 성숙해서 장학사나 교육청을 바꾸고, 평교사들이 교장이나 교감을 뽑고, 교과 내용이나 학교 운영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한다면 답이 나오겠지요. 그런꿈도 버리지 말아야죠. 그런 사회적 꿈도 가지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실천을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입장을 과목에 맞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가르친다면, 노사관계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노동시장, 노동과정, 생활과정 세 영역에서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파생되는 이슈들을 제시해 모둠별로 발표하고 제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식으로 하죠. 학생이 교육의 대상이라고 하지만, 저는 공동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좀 먼저 태어나고 조금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선생 역할을 하지만, 결국은 같이 배우는 과정이죠.
엉뚱하거나 엉터리일지라도 어쩌면 또 다른 의미로 가르침이 될 수 있거든요. 제가 이장을 하기 전에도 마을에 관심은 있었지만, 아파트 싸움하면서 마을 주민이 됐는데요. 대학생들이 마을 도서관을 중심으로 마을 공부방을 해요. 다음 주에 2학기 개강합니다. 마을 아이들이 대학생을 만나고 대학생들이 마을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새로운 문화가 되는 거예요. 학생들은, 부모 되기를 준비할 수도 있고, 공부한 것을 돌아볼 수도 있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다시 바라보는 눈이 생길 수도 있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릴 적 마을에 대학생들이랑 놀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했던 공동의 체험이 되겠죠. 학생들과는 주로 강의실에서 만나지만, 졸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점차원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디자인하는 데 새로운 주춧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교육의 함정
이 수 종 아까 교사가 자본주의의 주구라고 하셨는데, 부모는 자본주의의 트레이너예요. 요즘 부모들은 일류 입시 전문가보다 더 상세히 알고 자기 아이들을 트레이닝시키거든요. 아이들이 비교적 큰 정진영, 남궁효 선생님이 경험하셨을 것 같아요. 자식이 이런 것을 벗어나도록 어떤 관점에서 교육을 하고 계신가요? 그것이 결국 학생들에 대한 교육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정 진 영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공동육아를 알게 됐어요. 초등학교 때 공동육아 방과후 학교를 보내 행복하게 살았죠. 그러다가 중학교를 보낼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들이 학원을 떠돌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대안학교에 보냈죠. 아이가 들어간 대안학교는 실험을 많이 하는 학교였어요. 1, 2, 3학년 때 모습이 다 달랐던 것 같아요. 2학년 때 대대적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냥 안 가르치는 거였죠. 안 가르치고 아이들 개성을 탐구하면서 그 개성에 따라 길을 제시하려는 거였는데, 거의 실패했죠. 학교가 완전히 깨지고 선생님들이 새로 오셨어요. 저는 아이가 공부 잘하고 성공하는 건 애초에 바라지 않고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요새 보면 아이도 아주 소극적인 것 같아요. 뭔가 열심히 해 보려는 생각이 없고, 그저 편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아이한테는 대안학교가 잘 맞을 수 있겠지만, 어떤 아이한테는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학교에 있으면 힘들죠, 사실. 담임을 하면 공부하라고 해야 하잖아요. 놀라고 하고 싶은데. 아이들 데리고 농촌봉사활동이나 텃밭 가꾸기 같은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시간도 없고 재미있어 하지도 않아요.
아이들이랑 소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일하는 학교 부모들도 아이들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기만 바라지,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용납하지 않아요. 공교육이 아주 힘들어요. 그럼 뛰쳐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도 합니다. 저는 학교에 논이나 텃밭도 만들면서 가급적현장하고 연결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교육에 있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환경반에 아이들을 모으려면 대학갈 때 도움이 된다고 해야 돼요.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지원하죠. 지금 상황이 그래요. 고민이 많아요.
강 수 돌 아까 말씀드린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를 공교육에 적용하면 답이 있어요. 한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소양이 있죠. 소위 국민 공통교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한글이나 기초적인 셈은 알아야하니까. 그런데 그건 매일 네 시간씩만 해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유기농으로 무상급식 한 시간 하고, 좀 졸리니까 학교 텃밭 체험 한 시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하세요.” 개성 교육, 맞춤형 교육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학교 안팎에 다양한 프로그램의 장을 만들어 주고. 물론 공적으로 만들어야겠죠. 시 쓰고 싶은 아이, 뮤지컬 하고 싶은 아이, 악기 다루고 싶은 아이, 노래하고 싶은 아이, 농사짓고 싶은 아이, 진짜 공부가 미치도록 좋은 아이…….
그 욕구를 맞춤형으로받아 줄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주면 아이들이 얼마나 신바람 나겠습니까? 그런 꿈을 가진 교육감을 뽑고, 그런꿈을 가진 교장, 교감이 나오면 돼요. 비판하고 욕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잠입해 그 자리에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런 맥락에서 대안교육과 공교육이 만나게 되겠죠. 저는 공교육을 옹호하지만, 공교육 내용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재정 부담을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자는 뜻입니다. 그 교육 내용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짧게 공부하면서도 즐겁게 자기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하고요. 개성 있는 평등화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 비슷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때 비로소 완결되겠죠.
이 수 종 자기 아이는 뒤에서 엄청나게 과외시키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너 공부하지 마, 너는 행복해야 돼’이럴 수는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 여기 오신 선생님들은 그런 부분이 일치하도록 노력하시는 분들이거든요. 결국 개인적인 실천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남 궁 효 예전에 선생님이 번역하신 줄은 모르고,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을 봤어요. IMF 직전에 20대 80 사회를 상상하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더라고요.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살림의 경제학』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실천에 대해서는 전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큰아이가 대학교 2학년이고 작은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집사람이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참교육 학부모 모임을 했어요. 학교 교육이 너무 한쪽 방향으로 쏠리니까, 학부모들이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큰아이는 잘 자란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딱 1년 학원 다니고 저 혼자 공부했어요. 작은아이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전혀 공부를 안 해요. 이중적인 것이, 자식들이 잘하고 있으면 ‘학원을 왜 보내, 집에서 하면 되지’ 이런 소리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바뀌는 거죠. 알고 봤더니 얘가 형하고 경쟁관계가 내면화돼 있는 거예요. 뭐든지 형이 앞서고 상장도 형이 다 타고 그러니……. 저는 그걸 몰랐어요. 중 3때 크게 화를 냈더니, 관계가 아주 나빠졌어요.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기타를 치고 싶대요. 그런데 기타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단순히 공부는 하기 싫고 그냥 놀고 있을 수는 없고. 4년째 기타를 뚱땅거리고 있는데, 형이 더 잘 쳐요. 작은 녀석에게 어떻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신감을 갖게 할 것인가가 제 화두입니다.
강 수 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형과 비교하지 않는 게 좋아요. 언젠가 실력이 확 늘어서 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거라고 격려해 주면 그만큼 행복하게 살 거예요. 이 길이다 싶으면 계속 갈 거고,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바꾸게 돼요. 부모가 미리 이게 너의 길 맞다, 아니다 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느끼는 대로 가면 되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자식들과 인연을 맺고 만난 사이잖아요. 부모가 부모 욕심이나 걱정을 아이들에게 심어서 이룰 수 있는 게 없어요. 아이가 자기 인생을 사는데 스스로 행복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 기준이 자기 속에서 나와야죠. 어찌 보면 해법은 단순해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고속도로를 닦아놨으니 이길로 가면 네가 행복해진다’고 그어줄수록 불행해져요. 나도 불행해지고, 아이도 불행해지고. 투자한 만큼 본전찾을 생각하게 돼서 불안한 거예요. 나중에 배신하면 원수가 되고,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억지로 부모 뜻에 맞추면 자식이 불행해지고. 우리가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함께 사는 친밀한 시간을 따져 보면 몇 년 안 됩니다. 함께 사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존중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면 새로워질 것 같아요.
변화의 물꼬를 틀면
이 수 종 행복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 행복해지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고등학교에서 행복과 관련된 정치경제 과목을 가르치시는 신성호 선생님은 고민이 있으실 것 같아요. 자본주의적인 내용을 가르치시는데…….
신 성 호 요즘 애들이 경제 과목을 많이 선택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6차 교육과정에서는 의무 과목이었는데, 그때 내용이 오히려 나았어요. 노동 문제도 다루었고 지금처럼 편파적이지 않았죠. 7차 교육과정 때 악화됐다가, 이번 개정에서 더 악화됐어요. 이번 입시 체제를 보니까 경제만 별도 과목으로 떼어 놨더라고요. 요즘 테샛(TESAT: Test of Economic Sense And Thinking, 경제이해력 검증시험, 한국경제신문 주관)이 거의 장악을 했잖아요. 학교에도 거기서 내는 작은 신문(생글생글, 아하경제)이 계속 와요. 지금 교과과정에 너무 충실하게 따르면 교사들이 정말 주구가 되겠죠. 사회 선생님들이 그걸 깨뜨릴 수 있다고 봅니다. 교과 모임하고 공부하고 학습지도안도 같이 만들고……. 그러면 비록 저쪽에서 독을 주었지만, 독 있는 물을 정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에는 비관적이었지만, 지금은 선생님들의 주체적인 생각에 달렸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수 종 저도 동의합니다. 녹색성장 교육에 관해서 대통령 대면 보고를 하기 위해 급조된 프로젝트팀의 연구에 조언을 한 적이 있어요. 연구책임자가 교육학자가 아니라 나노공학을 하는 교수였죠. 처음에는 공학적으로 접근을 하더니 차츰 관련 학자나 교사들에게 자료를 받아 연구를 하면서 입장이 교육적으로 바뀌더라고요. 아마 공학자 이전에 교육자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정책이 비교육적이어도 교사가 제대로 성찰을 하고 가르치면 해결의 실마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과정에 저에너지나 유기농 같은 내용을 가미해서 가르치면 되거든요. 그 밖에 개인적 실천 차원에서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가정을 꾸리고 있거나 앞으로 결혼하실 분들은…….
이 인 문 사회적인 인식이,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결혼식을 해도, 가족이나 결혼 상대자와 그 가족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풀뿌리, 끝에서부터 해 나가야 한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실천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학교는 공교육의 기본만 유지하고 학교 제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살림의 경제학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요?
강 수 돌 문제의식 있는 사람이 학교를 들여다보면 고통스럽지요.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아이디어, 사례들을 발굴하고 해서 선생님이 대안적인 교과서를 만들 수도 있고, 풀(pool)을 만들어 그때그때 끌어내어 쓴다든가하는 창의적인 노력을 해 볼 수 있죠. 아이들에게 현실경제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가려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게 중요해요. 물 한 방울도 아껴 쓰고 지우개 하나라도 친구와 나눠 쓰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 불켜 놓지 않고……. 살림의 관점에서 아이들에게 물 부족 사태나 지구온난화, 화석연료의 문제를 가르칠 수 있죠. 현실적인 자료와 사례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어떤실천을 해야 할지, 사회적으로 어떤 비전을 만들어가야 할지 접근하는 것이 진짜 참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사회구조를 바꾸는 건 우리가 할 일이죠. 사회를 바꾸는 데 동참해서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비로소 같이 사회가 바뀌어요. 그래야 조그만 변화라도 가능하죠. 교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김 버 들 학교에서 독서토론 모임을 하면, 선생님들이 책은 잘 읽었지만 결국은 불의한 사회에 대한 반감만 느끼게 된다고 하세요. 교사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막상 실천하는 게 어렵네요. 사회구조를 바꾸려면 기본적으로 권력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 움 학교에서 살림의 경제학을 각 과목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서 교사라 아이들과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게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예전에는 싸고 양 많은 걸 좋아했는데, 생협을 알게 되면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이제 슈퍼에서 1,000원이면 살 수 있는 양조식초 대신 9,000원짜리 생협 감식초를 사요. 그런데 학생들은 진심으로 환경을 생각하고 나부터 실천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할 수 없는 게 있잖아요. 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경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 지금 공부해야 한다, 지금 당장 공부하면 배우자가 바뀐다더라……. 저 스스로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게 고민스러워요.
강 수 돌 생협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사례같네요. 2,000원밖에 없는데 1,000원짜리 두 개 사는 게 낫지, 빚내서 9,000원짜리 한 개를 살 수는 없잖아요. 당장은 어쩔 수 없이 1,000원짜리를 사더라도 나중에 알바를 해서라도 9,000원짜리가 먹고 싶다는 작은 목표를 가질 수는 있죠. 어쩔 수 없이 천 원짜리를 사지만, 몸에 나쁘다는 걸 알고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구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인 대화가 될 수 있어요.
개인이 행복한 사회
정 수 진 핀란드에서 학업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별도로 교육시켜 일정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하잖아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학력을 갖추는 것이 가능한지, 그래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갖추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학업 능력을 갖추어야 할지는 그 사회의 현실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일까요?
강 수 돌 공교육의 탄생을 보면, 프로이센에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었어요. 학교의 기본 모델이 공교육인데, 국가가 요구하는 인적자원을 길러낸다는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 아이디어가 거기에 맞닿아 있죠.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같이 책임지자고 하는 것은, 재주를 살려 무언가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는 경제력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거예요. 바람직한 이상을 제시하자면, 공교육뿐만 아니라 홈스쿨링, 대안 교육 같은 틀들이 자유롭게 열리되 재정적인 부담은 사회가 담당해야 합니다.
그 부분에서 복잡한 이야기들이 나오겠죠. 기본적으로,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경제사회적인 재생산에 동참하는 게 주된 흐름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살림살이가 꾸려지죠. 그런 모델 가운데 하나가 생애 노동시간이에요. 한평생 살면서 4만 시간 노동한다고 보면, 이 4만 시간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초반에 열심히 일하고 노후를 여유 있게 보낼 수도 있고, 잘게 쪼개서 죽을 때까지 일할 수도 있겠죠. 평생생애 노동시간을 두고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자는 아이디어예요.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두 측면에서 다 존중받을 수 있는 교육과 직장에 관한 아이디어를 열린 토론을 통해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 수 종 결국 나 자신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아무리 녹색성장을 이야기해도 틈새는 있고 그걸 세력화했을 때 해결될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연수, 다양한 교육운동으로 전파하고 교사들을 의식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 정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 수 돌 소통, 연대, 단결, 희망 등 온갖 이야기를 다 했지만, 결국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거죠. 그러려면 만드는 주체의 하루하루 생활도 행복해야 하거든요. 선생님들이 교실에 가시든 가정에 가시든 스스로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사시고 그러면서도 공동의 사회적인 비전에 대해 넓혀 나가는 작업들을 천천히 행복하게 하시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