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따뜻했던 기억,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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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3 16:39 조회 6,351회 댓글 0건본문
책은 늘 나를 구박했다. 국어는 문단 나누기로 괴롭혔고 산수는 산수대로 교묘
하게 나를 괴롭히는 방법이 있었다. 무덤에서 나왔다는 금관과 탑 몇 개, 비슷비
슷하게 생긴 지붕을 이고 있는 절의 사진 몇 개가 고작인 채로 암기해야 할 연도
만 수두룩하게 적혀 있는 역사책이나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
는 원소기호 투성이 화학책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책들이 내게 던지는
말은 ‘도대체 뭐가 되겠니?’였다.
책은 그렇게 늘 내게 불만이었다. 나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읽
은 책이 거의 없다. 바로 앞의 문장을 쓰는데, 거의 없는 게 아니라 한 권도 없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차에 치인 개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쨌든 책
은 그렇게도 오랫동안 나를 시험해왔으며 조롱했으며 못마땅해 했다.
책은 그렇게 나를 떠났다
그나마 책이 책다웠던 적은 아주 어렸을 적이다. 한글을 겨우 깨우쳤을 즈음,
버스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면 아나운서라도 된 양 차창에 스치는 약국 이름,
극장 간판, 양복점 이름을 되는 대로 읽곤 했다. 그때는 한 글자를 읽으면 다음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문장이 열리고 나면 글의 들판
이 펼쳐졌다. 그 들판에 나비를 쫓듯, 무지개를 쫓듯, 콩쥐도 만나고 심청이도
만나고 신데렐라, 피노키오도 만나고, 귀신도 만나고 도깨비도 보았다. 콩 줄기
를 타고 하늘도 올라가 보고, 머리카락을 길러 갇혔던 성에서 도망도 쳤다.
그러나 모년 모월 모일 그런 풍경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책상 앞에는 월
요일 국수영생지과, 화요일 수화국체영실, 수요일 역수생 어쩌고저쩌고……
책에서 나왔던 세상은 책으로 돌아가버렸다. 책은 그렇게 나를 떠났고, 그게 상
실인지도 모르는 채 수많은 계절을 보냈다.
누가 그 온기를 지워버렸을까
그리고 어느 여름날, 머리맡의 책들이 세무 신고 하려고 모아둔 영수증처럼 보이던 날, 내 방엔 밤늦도록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창밖에선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배고픈 속을 냉수로 채우고 불
던 내 어릴 적의 버들피리 소리를 닮았다. 가냘프긴 했지만 생명의 소리였고 그만큼 질기게 들렸다. 고양이 소
리가 칡뿌리처럼 뚫고 지나간 밤을 귀뚜라미 소리가 덤불처럼 덮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벌레 소리
를 재우지는 못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 방은 더 환해졌다.
창문 너머는 칠흑. 어둠을 닮은 나의 내일, 모레, 글피 그리고 남은 날들…….
나는 옆에 있던 통기타의 4번 줄을 공연히 퉁겨 보았다. 그리곤 이어서 1번 줄을 퉁겼다. ‘레’에서 한 옥타브
위의 ‘레’를 지나 ‘미’ 음이 울리니까 말꼬리가 올라가면 의문문이 되는 것처럼 뭔가를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심금?”
나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6번 줄을 퉁겼다.
둥~
낮은 ‘미’ 음이 울렸다.
“없다.”
나는 그 통기타를 내려놓고 전기기타를 집어들었다. 확성되지 않은 전기기타의 소리는 칠현금 같이 쇳소
리만 앙상하다. 6번 줄부터 1번까지 오른손 중지의 손톱으로 훑어내렸다. E 마이너 세븐의 소리가 울렸다. 2
번과 3번 줄의 음이 잘 안 맞았다. 조율을 하고 아리랑을 스케일 연습하듯 낮은 프렛에서부터 높은 쪽으로 다
시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하염없이 연주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연주가 끝나고 기타를 다시 기타 스탠드에 올려 놓으려고 기타의 몸통을 잡으니 내 몸과 닿아 있던 부분이
따뜻했다. 그러나 그 온기는 기타가 스탠드에 올려질 즈음에는 벌써 식어 있었다. 사라진 온기가 갑자기 안타
깝게 느껴졌다. 이별은 늘 그렇게 짧기만 한 건지, 내가 먼저 그 온기를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책만 읽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던 때가 있었는데……. 읽다 덮어둔지 반년이나 지난 『반 룬의 예술사』를 다시
펼쳐 보았다. 지나가는 기차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바이올린 가방을 든 빨간 목도리 아이와 화첩을 들고 있던
빨간 모자 아이를 위해 20년 동안이나 예술에 관한 글을 써서 위대한 저작물을 남긴 헨드리크 빌렘 반 룬. 1937년,
내 어머니 일곱 살 때 출판된 그 책에 손을 얹으니 세월을 넘어 저자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책은그렇게 다시 내게 돌아왔다
하게 나를 괴롭히는 방법이 있었다. 무덤에서 나왔다는 금관과 탑 몇 개, 비슷비
슷하게 생긴 지붕을 이고 있는 절의 사진 몇 개가 고작인 채로 암기해야 할 연도
만 수두룩하게 적혀 있는 역사책이나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
는 원소기호 투성이 화학책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책들이 내게 던지는
말은 ‘도대체 뭐가 되겠니?’였다.
책은 그렇게 늘 내게 불만이었다. 나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읽
은 책이 거의 없다. 바로 앞의 문장을 쓰는데, 거의 없는 게 아니라 한 권도 없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차에 치인 개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쨌든 책
은 그렇게도 오랫동안 나를 시험해왔으며 조롱했으며 못마땅해 했다.
책은 그렇게 나를 떠났다
그나마 책이 책다웠던 적은 아주 어렸을 적이다. 한글을 겨우 깨우쳤을 즈음,
버스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면 아나운서라도 된 양 차창에 스치는 약국 이름,
극장 간판, 양복점 이름을 되는 대로 읽곤 했다. 그때는 한 글자를 읽으면 다음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문장이 열리고 나면 글의 들판
이 펼쳐졌다. 그 들판에 나비를 쫓듯, 무지개를 쫓듯, 콩쥐도 만나고 심청이도
만나고 신데렐라, 피노키오도 만나고, 귀신도 만나고 도깨비도 보았다. 콩 줄기
를 타고 하늘도 올라가 보고, 머리카락을 길러 갇혔던 성에서 도망도 쳤다.
그러나 모년 모월 모일 그런 풍경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책상 앞에는 월
요일 국수영생지과, 화요일 수화국체영실, 수요일 역수생 어쩌고저쩌고……
책에서 나왔던 세상은 책으로 돌아가버렸다. 책은 그렇게 나를 떠났고, 그게 상
실인지도 모르는 채 수많은 계절을 보냈다.
누가 그 온기를 지워버렸을까
그리고 어느 여름날, 머리맡의 책들이 세무 신고 하려고 모아둔 영수증처럼 보이던 날, 내 방엔 밤늦도록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창밖에선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배고픈 속을 냉수로 채우고 불
던 내 어릴 적의 버들피리 소리를 닮았다. 가냘프긴 했지만 생명의 소리였고 그만큼 질기게 들렸다. 고양이 소
리가 칡뿌리처럼 뚫고 지나간 밤을 귀뚜라미 소리가 덤불처럼 덮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벌레 소리
를 재우지는 못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 방은 더 환해졌다.
창문 너머는 칠흑. 어둠을 닮은 나의 내일, 모레, 글피 그리고 남은 날들…….
나는 옆에 있던 통기타의 4번 줄을 공연히 퉁겨 보았다. 그리곤 이어서 1번 줄을 퉁겼다. ‘레’에서 한 옥타브
위의 ‘레’를 지나 ‘미’ 음이 울리니까 말꼬리가 올라가면 의문문이 되는 것처럼 뭔가를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심금?”
나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6번 줄을 퉁겼다.
둥~
낮은 ‘미’ 음이 울렸다.
“없다.”
나는 그 통기타를 내려놓고 전기기타를 집어들었다. 확성되지 않은 전기기타의 소리는 칠현금 같이 쇳소
리만 앙상하다. 6번 줄부터 1번까지 오른손 중지의 손톱으로 훑어내렸다. E 마이너 세븐의 소리가 울렸다. 2
번과 3번 줄의 음이 잘 안 맞았다. 조율을 하고 아리랑을 스케일 연습하듯 낮은 프렛에서부터 높은 쪽으로 다
시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하염없이 연주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연주가 끝나고 기타를 다시 기타 스탠드에 올려 놓으려고 기타의 몸통을 잡으니 내 몸과 닿아 있던 부분이
따뜻했다. 그러나 그 온기는 기타가 스탠드에 올려질 즈음에는 벌써 식어 있었다. 사라진 온기가 갑자기 안타
깝게 느껴졌다. 이별은 늘 그렇게 짧기만 한 건지, 내가 먼저 그 온기를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책만 읽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던 때가 있었는데……. 읽다 덮어둔지 반년이나 지난 『반 룬의 예술사』를 다시
펼쳐 보았다. 지나가는 기차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바이올린 가방을 든 빨간 목도리 아이와 화첩을 들고 있던
빨간 모자 아이를 위해 20년 동안이나 예술에 관한 글을 써서 위대한 저작물을 남긴 헨드리크 빌렘 반 룬. 1937년,
내 어머니 일곱 살 때 출판된 그 책에 손을 얹으니 세월을 넘어 저자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책은그렇게 다시 내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