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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옛 애인을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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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20:10 조회 7,40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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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밑천은 동화책 백 권에서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인 데다 책을 매우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백 권의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은 힘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대로 발휘되었다. 받아쓰기, 비슷한 말과 반대말 찾기는 내게 식은 죽 먹기였다. 주제 파악하기, 요점 정리, 낱말 하나를 주고 그 말이 들어가는 문장을 만드는 짧은 글짓기 같은 것은 누구보다 빨랐다. 이것은 학교생활에서 자신감의 초석이 되었다.

내가 동화책을 읽던 시절에는 책에 그림이 거의 없었다. 내용이 동화라는 의미에서 동화책일 뿐 지금처럼 좋은 종이에 원색 그림이 새겨진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덕에 나는 기억력과 표현력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과거의 기억이나 어떤 상황을 설명할 때 내 머릿속에는 동영상이 먼저 돌아간다. 그것을 보면서 보이는 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림 없는 동화책을 읽으며 상상하다 보니 내 뇌에 영상 기능이 발달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가 집 가까이에 있지 않아서 1학년들도 보통30분은 걸었다. 나는 길거리의 변사였다. 책으로 읽는 것보다 내가 이야기로 해주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말에 신이 나서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내가 읽은 온갖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친구들은 내가 어느 날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단다. 처음 텔레비전 방송을 할 때 나는 카메라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카메라 너머에서 내 말을 들을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강연도 그렇다. 남녀노소가 몇 백 명씩 모여 있는 앞에 서서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 하는 일을 3,500번 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어려서부터 말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해지는 경험이 쌓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25년 만에 중학 시절 단짝친구를 만났다. 그는 초등학교교사로 2년 후에 퇴직할 계획이라고 했다. 정년까지는 10년 가까이 남았는데 앞당겨 퇴직한다기에 이유를 묻자 그의 답은 간단했다.
“보고 싶은 책 좀 실컷 읽으며 살려고.”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리맡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읽자며 미뤄놓은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다. 사서 읽겠다고 제목을 적어놓고는 묵히고 있는 책도 벌써 몇 권인지. 그걸 만성 치통처럼 느끼면서도 게으름으로 속수무책인 게 언제부터인지.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친구의 입에서는 본격적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들이 이어졌다.

“내가 어릴 때 너한테 열등감 느꼈던 거 아니? 우리 집은 가난해서 부모님은 책값을 너무 아까워하셨어. 책을 읽으면 돈이 나오느냐, 밥이 나오느냐고 빌려온 책도 못 읽게 하셨지. 방학이 끝나고 나면 너는 새로운 책을 읽고 우리에게 말해줬지. ‘우리 아버지가 이 책은 중학생이면 꼭 읽어야 한다고 하셨어’라고 하면서. 그 말이 얼마나 내 가슴에 상처가 되었는지 몰라.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어. 그때 내 소원은 눈치안 보고 돈 걱정 없이 책을 실컷 읽는 거였단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꿈을 이뤄야지. 틈틈이 한두 권씩. 너는 여전히 책 많이 읽지?”

토끼와 거북이가 생각났다. 부모 덕에 손쉽게 책 밑천 잡은 걸 믿고 이제는 게으름에 빠져 있는 내가 토끼라면, 어린 시절의 갈증을 잊지 않고 책에 대한 열정을 태산처럼 키워 온 친구는 거북이였다. 따져보면 나와 책의 밀착 관계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입시가 우리사이에 끼어든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대학과 대학원은 읽어야할 책에 치여 읽고 싶은 책은 마음도 못 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책은 연애가 아닌 의무가 되어갔던 것이다.

봄,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나도 연애를 소생시켜야한다. 4반 세기 만에 만난 친구는 내 뜨겁던 연애 시절을 상기시키는 메신저였을지 모른다. 그 시절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조각을 발목에 묶고 애인의 간절한 기다림을 전하러 날아온 비둘기일지도 모른다. 이제 일상의 바쁜 일들은 모두 꽃샘추위라 여기고 가슴 깊이 간직해온 사랑의 열정으로 이겨내야 하리라. 다시 가슴이 뛴다. 그대 품으로 달려간다. 내 애인이여, 나의 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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