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동화라는 틀에 담은 치열한 역사의식 동화작가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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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5:12 조회 9,442회 댓글 0건본문
작가가 되다 _ 우연, 필연, 혹은 운명적으로
김하늘 선생님 고향인 하양도 현대사에서 지리산만큼 자유롭지 못한데, 그런 배경이 작가가 되는 데 동기부여가 되었나요?
김정희 상당히 동기부여가 됐죠. 외할머니가 손자들을 다 껴안고 살았어요. 어릴 때 항상 “너희는 공무원이 되면 안 되고 남자는 육사가면 안 되고…….” 하셨어요.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는데 서른 살 넘어서야 알았죠. 철저하게 비밀이었으니까.
김하늘 가족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었나요?
김정희 엄마, 외삼촌, 이모네 가족도 다 포함됐죠. 사회주의도 있었고, 한쪽은 미군 CIC쪽이었고요. 미국 문제는 내가 나중에 문학 공부를 하면서 잠깐 중학교 때 지리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6.25전쟁 때 한 마을이 없어졌다고. 그때 국군이나 미군이 한 마을을 불태워서 없애기도 하고 사람을 죽여서 없애기도 했다고 아리송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에 대해 물으면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찾으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는 박정희 시대여서 그런 말을 전혀 할 수 없으니까요.
김하늘 어린 시절에 대한 그 부채의식이 계속 남아있었던 거네요?
김정희 남아있었다기보다는 문학 공부를 하며 역사에 눈을 떴죠.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거예요. 역사에 대해서 눈을 뜬 건 김하기의 『완전한 만남』 때문이었어요. 남아공의 만델라가 28년 동안 감옥 살이하고 출소했다는 사실이 매스컴에서 크게 다뤄졌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굉장히 놀라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장기수들의 실체를 몰랐잖아요. 『완전한 만남』을 읽으면서 처음 그런 사실을 접했죠.
김하늘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작가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김정희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중학교 때부터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요. 다른 것보다 글짓기를 좀 잘한 것 같아요. 책도 많이 읽고. 학교 공부보다도 밤마다 일기를 썼던 게 나중에 글 쓰는 데 밑바탕이 된 것 같아요. 남의 연애편지도 써줬죠.(웃음)
김하늘 일기를 열심히 쓴 것이 사람을 묘사하거나 서사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많이 되나요?
김정희 그렇죠. 고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단편 한 편을 써서 청소년 잡지에 투고도 했어요. 그런데 크면서 자신이 없어졌어요. 책 읽고 쓰고, 이러면 될 줄 알았는데, 20대들어와서는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어도 국문과를 다녀야만 글을 쓰는 줄 알았죠.
김하늘 작가가 되기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했다가 다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거네요?
김정희 만약 직장생활에 잘 적응했다면 그대로 살았을 텐데, 전혀 나하고 맞지 않았어요. 그 후에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도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나도 사실은 꿈이 작가였다, 우리 같이 배우는 데 찾아가보자’고 했죠. 그때 간 곳이 동아일보 문화센터였어요. 그곳에 등록을 하면서부터 계속 본격적으로 습작을 한 것 같아요.
동화 작가가 되기 위한 걸음을 떼다
김하늘 선생님이 처음부터 동화를 쓴 건 아니신데요. 어릴 때도 동화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소설가가 되고 싶으셨던 거지요?
김정희 소설에 모든 장르가 다 포함되어 있는 줄 알았죠. 소설은 습작을 많이 했지만 발표는 동화를 먼저 한 게, 작품을 배운다고 여기저기 발을 들여놓다 보니까 인권이나 역사에 눈을 뜨게 됐어요. 91년에 같이 문학했던 사람이 농민신문을 만들면서 나한테 “정희 씨가 아이들을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동화를 써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쓴 작품이 『금지된 장난』이었죠. 걸프전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때는 동화라는 개념도 없었고, 동화 흉내를 냈죠. 그게 출판사 몇 군데에서 나왔어요.
김하늘 동화작가가 되기 위해서 수련 과정을 거치셨을 것 같은데요.
김정희 동화 쪽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건 역사 때문에, 민중사나 소외된 사람들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걸 동화로 써달라는 부탁 때문에 동화를 썼기 때문에 처음부터 누구한테 배우거나 그런 건 없었지요. 그게 산하에서 나온 책 몇 권이에요. 그리고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재복 선생님 만나면서 다시 동화를 쓰게 됐어요.
김하늘 역사 관련된 글 말고도 생활 동화도 쓰셨지만, 작가 이미지는 역사소설가로 굳어져 있는데요.
김정희 너무 손해에요.(웃음) 다른 책이 훨씬 더 잘 팔리는데. 해외에 나간 네 권도 다 다른 책인데요. 작가들은 한곳에 집중하는 사람들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잖아요. 동화 쪽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역사를 다루니까 독자들에게 강하게 인식이 되어서 역사 소설가로 자리매김 된 것 같아요.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그려내다
김하늘 역사소설가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이 싫다고 하셨지만, 『국화』, 『야시골 미륵이』, 『노근리, 그 해 여름』, 『대추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네 작품이 순서대로 ‘발단-전개-절정-아직 끝나지 않은 결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국화』를 쓰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김정희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서양 것을 차용하지 않고 우리 판타지로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계절 편집장을 만났는데, 어떤 작품을 쓰고 싶으냐고 묻기에 사실 야시골 미륵이를 쓰고 싶다고 했어요. 동화쪽에서는 이런 작품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해방공간의 역사, 그게 6.25전쟁이고 우리나라를 갈라놓은 것이니까. 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역사쪽으로 잡고 가면 어떠냐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거쓰고 난 다음에 쓸 거라고 했더니 나한테는 판타지가 안맞는다고 하더라고요.
김하늘 그럼 『야시골 미륵이』를 쓰고 나서 『국화』를 쓰신거네요?
김정희 『야시골 미륵이』는 책 출간까지 12년이 걸렸어요. 중편소설로 시작해서 장편으로 고치면서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쓰면서 사실 피하고 싶었어요. 혼자서 계속 써놓고는 내놓기가 싫었지요. 그런데 소설 쓰는 선배가 나한테 『야시골 미륵이』를 써야만 그 다음 작품을 자유롭게 쓴다고 하더군요.
김하늘 맞아요. 며칠 전에 후배 작가가 80년 광주 이야기를 써서 5.18 문학상을 받았는데, 그걸 쓰면서, 그리고 상을 받고 난 후에 심하게 아팠대요. 그런걸 보면 작가가 겪고 가야하는 어떤 것, 글을 써놓고 열병을 앓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정열을 다 쏟아냈으니 몸이 아픈 건 당연하다고 말해줬어요. 『야시골 미륵이』를 쓰고 나니 『노근리, 그 해 여름』이나 『대추리 아이들』이 잘써지던가요?
김정희 『야시골 미륵이』를 끝내고 나서는 내가 다시는 이런 작품 안 쓴다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 작품을 쓰면서도, 교정 작업을 하면서도 계속 울었으니까. 그런데 노근리 학살 사건을 보면서 왜 또 이런 이야기를 아무도 안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 한 명만 썼어도 내가 안 썼을 텐데. 소명의식이 강했죠.
김하늘 내가 아니면 이 역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을 감당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네요. 그런데 보통사람이 생각할 때는 주제 넘는 일인데,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소명인 거죠. 아프면서도 울면서도 그것을 써내야 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소명인 거겠죠. 『대추리 아이들』 쓸 땐 어떠셨어요?
김정희 사실 『노근리, 그 해 여름』을 쓰고 난 후에도 역사이야기는 그만 쓸까 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그런데 대추리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전에 매향리를 여러 번 갔는데 대추리도 매향리처럼 되나 싶었죠. 그런데 도서관을 만든다고 책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노근리, 그 해 여름』 나오고 나서 여유가 있어서 대추리를 갔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주민들이 속상해하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가슴에 들어왔어요. 두 번째 갔을 때 노인정에 갔는데, 노인분들께서 나를 잡고 이 마을을 지켜달라고 하셨어요. 전 그냥 온 거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네’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러고 돌아서면 양심에 찔려서 안 될 것 같았어요. 미군 기지가 밀고 들어온다니까 주민들만남겨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노인정 가서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지냈죠. 그 마을에 들어가서 며칠 머물면서 자고 오기도 하고. 그래서 ‘아, 주민들이 여기 머물 때까지는 나도 함께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마지막까지 대추리 사람들과 함께하게 됐죠.
김하늘 그러니까 『국화』, 『야시골 미륵이』, 『노근리, 그해 여름』이 김정희의 과거라면, 『대추리 이야기』는 현재군요. 현장에서 직접 겪어낸 이야기를 쓴 거니까요. 직접 겪은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어떻던가요? 앞의 세작품과 비교해 본다면요?
김정희 많이 다르죠. 왜냐하면 그냥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데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그 군인들 3,500여 명이 들판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무기 들고 대추리로 들어가자 했다더라고요. 거기서는 아무리 두려워도, 감옥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안 그러면 더 후회할 것 같아서. 나중에는 마을에 철조망이 둘러쳐졌어요. 그 철조망 속에 사람들을 가둬놓은 셈이지요. 약한 농민들이라고 공권력이 함부로 짓밟았어요. 그들과 함께 눈물과 절망을 겪었기 때문에 분노가 앞서서 작품을 쓰기 힘들었어요.
21세기 대한민국과 미국
김하늘 대추리 상황을 밖에서 지켜보면서, 미국이란 존재를 21세기 대한민국이 이렇게 극복하기 힘들구나 했지요. 김정희 그렇죠. 수도 한복판에 있는 미군 기지를 빼내서그걸 어딘가로 갖다 놓아야 하는데, 원래 대추리 주민들은 미군 기지와 공존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미군들이 원하는 영토가 넓어졌죠. 그러니까 주민들은 갑자기 쫓겨나는 입장에서 나갈 것인가 지킬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어요. 거기는 항상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투표를 하더라고요. 일단 지키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죠. 왜냐하면 대추리는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곳이잖아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들한테 쫓겨났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들한테 쫓겨났고, 이번에는 그 땅을 미군들한테 갖다준다면서 한국 정부에서 쫓아낸 거잖아요. 그리고 그 넓은 벌판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 곯아가면서 일궈낸 개간지에요. 갯벌을 손으로 하나하나 다 메워서 옥토로 만들었죠. 그래서 그 아픔이 너무 큰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면서, 주민들을 배제하고 한 순간에 빼앗으려 한 거죠.
김하늘 안에서는 정권에 대한 분노, 밖에서는 우리 현대사가 미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 앞으로 미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절실히 느끼셨겠네요. 그러면 미래, 작가 김정희가 생각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어떻게 작품으로 형상화하실 생각이신지요?
김정희 그래서 지금도 그걸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개개인이 분열된 우리나라를 보면서 고민을 했지요. 항상 작가는 여기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작년부터 시작한 게 원효 공부, 원효의 화쟁사상 공부에요. 분열된 것을 하나로 모아야 돼요. 여태껏 내가 운동하고 작품을 써왔던 것보다 한 단계 앞서가 보자고 생각했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계속 따지다 보면 계속 싸우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합의해 낼 것인가, 그건 우리가 통일을 어떻게 합의해낼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요즘 원효의 화쟁사상 공부를 계속 하고 있어요.
김하늘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 선생님은 오래된 미래에서 답을 얻겠다고 하시는 거네요.
김정희 원효를 공부하면서 알았어요. 원효 때도 삼국이 계속 싸웠잖아요. 그 시대에도 원효를 그 길로 가게 했던 여러 스승들이 있어요. 그걸 보면 삼국시대 때도 계속 전쟁이 있었고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였죠. 원효가 살았던 1,500년 전과 지금이 똑같았던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건 원효가 기가 막힌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다는 점이예요. 원효 공부를 계속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분열된 마음을 통합할 것인가, 라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어요. 원효설화를 다 모아놨어요. 500매 정도 되는데 굉장히 재미있어요. 설화라는 게 황당무계한 부분이 많은데, 그런데 그 속에 민중의 소망이 있고 우리 삶의 방향이 다들어있어요. 그래서 지금 원효를 만난 게 참 좋아요.
김하늘 전에 어떤 모임에서 제가 “작가는 이 세상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그 대안을 작품에서 직간접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니까, 어떤 분께서 “작가는 대안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라고 말해서 논쟁을 했던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정희 작가가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답을 얻어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 작가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죠. 어쨌든 작가는 반 보라도 앞서서 가야 하는 사람이에요. 세상에 대한 고민이나 삶에 대해서.
김정희에게 동화란, 그리고 작가로 산다는 것
김하늘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해볼게요. 작가 김정희가 생각하는 좋은 동화란 어떤 동화인가요?
김정희 나는 문학작품을 두고 어떤 게 좋고 나쁘다는 구분을 짓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떤 소재를 놓고 주제를 잡아가는 것은 작가지만, 그 작품이 세상에 나와서 독자 손에 들어가면 그걸 받아들이는 건 독자 개인의 몫이지 거기까지 작가가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김하늘 역사소설을 쓰면 이 이야기를 꼭 어린이에게만읽히려고 쓰는가 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을 생각하고 쓰는데요. 요즘 아이들, 작가로서 어떤 것 같습니까?
김정희 어떤 아이들은 굉장히 생각이 깊어요. 어른 뺨칠정도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공부가 되어 있는 아이들도 있고. 그런 아이들을 만나면 부모가 왜 그렇게 공부를 시켰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내 역사소설이 아이들에게 강요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역사,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온 역사라고 생각하고 함께 가야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굉장히 격앙이 되어있어서 내가 미안해요.
김하늘 왜 미안하신지요?
김정희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분노의 감정을 가지면 안되니까. 강연 가서도 ‘어떻게 읽히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내 책이 두꺼워서 읽기 힘든 아이들에게는 옛이야기를 해주듯 자연스럽게 읽히면 좋겠다고 대답해요. 그 속에 평화, 인권, 폭군, 독재자가 다 들어가 있으니까요. 그건 부모님이 깨어 있어야 돼요. 똑같은 소재를 열 사람한테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 한 명 한 명이 수용할 수 있는 포즈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지요.
김하늘 자연과학으로 증명되는 지식 정보로 역사 공부를 해왔지요. 그런데 그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탐구해가는 것이 역사입니다. 설화, 민담, 신화, 전설도 역사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팥죽할머니와 호랑이」도 역사입니다. 밤송이와 절구통, 맷돌 등 힘없는 것들이 거대한 호랑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도 뭉치면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그 시대 사람들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자란 아이들은 『대추리 아이들』을 읽어도 막연한 분노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요.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역사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인가를 객관적으로,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할 것이고요.
김정희 『대추리 아이들』에서 주인공 한솔이를 통해,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겠다고 하는 건 우리나라의 염원이죠. 아무리 친미주의자라고 해도 그것조차 없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김하늘 선생님 작품을 읽고 동화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동화작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다면요?
김정희 아이들이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다면 부모들이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해요. 물고기도, 지렁이도, 도마뱀도 자기 손으로 잡아봐야 돼요. 산과 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친구들하고 부딪히면서 싸워도 보고 눈물도 흘려보고 상처도 받아봐야 나중에 극복도 할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상처를 다 포장해버리면 나중에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상처를 극복할힘이 없어요. 그래야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갔을 때 강하게 이겨낼 수 있어요. 온실 안에 모든 조건을 다 갖춰주고 자란 화초는 밖에 놔두면 빛에, 바람에 금방 쓰러지잖아요. 물론 실제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기는 말처럼 쉽지 않지만, 아이들은 많이 부딪혀봐야 돼요.
김하늘 자, 이제 정리하는 질문을 드려야겠네요. 김정희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하늘이 준 형벌인가요, 하늘이 준 축복인가요?
김정희 당연히 하늘이 내게 준 축복이죠. 50이 넘은 지금 생각해볼 때 이 길을 선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할 거 없겠냐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너무나 큰 축복이라고 여겨져요.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나를 초청해줄 때, 내 이름이 나올 때였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들은 별의미가 없어요. 이제는 들판으로 산으로 가면 마음이 굉장히 평온한데, 그럴 때 야, 이거 작품으로 써도 되겠다, 싶을 때는 작가가 된 것이 축복이라고 느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