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작가가만난작가] 만화가 최규석, 변호사 이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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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4 22:50 조회 12,822회 댓글 0건본문
정의에 대한 막연한 호소 넘어서야
최규석 전공분야라고 해야 되나? 이 변호사님의 최대 관심분야가 이슈가 되고 있잖아요. 분위기에 대한 전반적인 어떤 소회 이런 거에 대해 말씀을 하시죠.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금년 최대의 이슈죠.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고, 새 책도 나오면서 이슈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만약에 저였다면 아쉽기도 했을 것 같아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분야,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게 갑자기 거대한 물결이 옆에서 밀려오고 있는 것에 김이 좀 빠지는 느낌도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이한 김이 빠지진 않아요. 제가 엄청난 물결을 주도할 능력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저는 한국 사회에서 기회가 생겼다고 봐요. 이전에는 사람들이 투표하는 국민을 소비자로 봐서, 마치 상품을 고르듯이 정치나 정책이 있으면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투표를 하고 합산을 해서 제일 많은 표를 받은 게 시행되고, 이렇게 하면 최대의 만족이 달성되니까 이게 민주주의라고 여겼어요. 그런 틀에서 보면 규범적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사실에 관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선호에 관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거든요. 무차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오페라하우스를 짓느냐 아니면 박물관을 짓느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지금 비정규직 법제도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이런 문제하고 거의 동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정치공간에서 수사로라도 규범적으로 자기들의 정책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정당화하려는 태도가 거의 없었던 거죠. 지금도 뭐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이야기의 수준이나 내용에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도 달라지고, 국민들이 원하는 이야기의 내용이나 수준에 따라서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달라지고 하는데, 그게 둘 다빠지다 보니까 우리 사회의 정치에서 규범적인 논의 자체가 아예 실종돼 버렸어요. 목표를 미리 전제하고 그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수단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목표 그 자체가 타당한가 하는 규범적 논의가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사람들이 아예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 그런 기회를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이 제공을 못해줬다. 그런 갈망이나 욕구들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기를 끄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규범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정당한 논의이고 주장인가를 설명하는 단계가 필요하게 되고, 그 단계에서 제가 할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생각해요.
최규석 근데 마이클 샌델의 책이 나오고 나서 그 뒤로 보이는 분위기들을 봤을 때,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그런흐름하고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요? (웃음)
이한 어떤 흐름인데요?
최규석 아까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이제 흔히 가지고 있는 기호의 문제, 정의라든가 도덕이라든가 규범이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이론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인습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덕이 중요해, 정의가 중요해, 근데 우리 사회는 정의가 실종됐어,그러니까 정의를 다시 불러와야 돼”라고 하는 그런 욕구하고 맞아떨어져서 오히려 정치철학이 얘기하고자하는 어떤 핵심부분이 빠진 채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받거든요. 그 이후로 나오는 칼럼들이라든가 대담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봐도 핵심적인 내용은 없고, 정의가 중요하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된다고만 하고, 구호만 남아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샌들 책 자체의 한계라는 생각도 들고, 중간에서 그걸 누가 제대로 번역해 줄 수 있는,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번역해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느낌도 많이 받고 해서 아쉽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셨던 취향만 남아 있고 머릿수만 세서의사결정을 하고 하는 그런 분위기, 이런 것들, 저도 사실 이 변호사님을 알기 전까지는 그게 항상 굉장히 갑갑한 부분이었거든요. 제가 심정적으로 그리고 나름 인맥적으로도(웃음) 진보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을 할수가 있는데 그분들의 글을 봐도 단순히 얘기하자면 그런 거죠. “계급에 투표하라,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냐?”, “가난한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게끔 투표를 해야지.”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부자가 되고 나면 부자를 위해 투표를 하는 건가? 이게 굉장히 일시적인 자기의 지금 처지에 맞게 뭔가를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저런 사람들의 주장이 가져올 진보적인 정책들이 이루어질 어떤 사회의 모습, 이런 거에 대해서는 지지를 하지만 그 논리자체가 너무 갑갑한 거예요. 분명히 다른 게 있는 것 같은데 잘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가 마침 이 변호사님 책을 보고 감동을 받은 거예요. 제가 깊이 있게 책을 읽지 않아도 나름 훑어서 보는 편인데 그런 식의 얘기를 하는 책을 그전까지 못 봤다고 하는 게 내가 무식해서 그런가? 아니면 한국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때 보고 굉장히 감동받고, 가장 필요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윤리학, 정치철학 이런 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한국에.
이한 정확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도덕은 중요하다, 이런 강조만으로 충분하려면 이미 탄탄한 도덕적 합의가 이사회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대단히 많은 도덕적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의견을 달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쟁점에 관한 여러 주장 중 어느 주장이 더 낫냐를 판단할 수 있는 논의를 도외시하고, 단순히 정의에 대한 막연한 호소만 반복하는 것은 분명히 현 상황의 한계라고 봅니다. 막연한 호소의 한계를 깨닫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그리고 계급적인 연대행동이라는 것도 결국 도덕적 관념 없이는 불가능한 거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상황이 같은 계급 내에서도 적용이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부당한 노동조건 개선을 한 사람만 나서서 얘기하면 그 사람만 잘리고 이러니까 이걸 집단으로 모아서 힘을 뒷받침하는 것이 노동조합이죠. 그런데 이 노동조합도 실제로 시작을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회사에 찍힌단 말이에요.
개인으로 보자면 안 하는 게 좋은 거죠. 그러니까 네가 너의 이익을 위해서 계급에 투표하라는 정신을, 그대로 자기 행동까지 들고 들어가면 결국 이 구조 내에서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벌고, 힘 있는 사람들한테 저항하지 말고, 누군가 피해를 보면서 저항해서 뭔가를 따내면 무임승차해서 가라는 논리가 되요. 이게 회사 차원의 노동조합 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거든요. 당신의 합리적 이익이 무엇이기 때문에 계급에 투표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달은 치워버리고 손가락만 보게 만드는 호소인 거죠. 그것은 심하게 말하면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능력을 모욕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는 거죠. 적어도 이렇게 말해야 되죠. 당신의 계급은 이런 계급인데 이계급의 객관적 위치는 이렇다. 그런데 지금 대우를 잘못 받는데 그것이 정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부당한 것이다.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행사하는데 연대하고 같이 노력을 해야된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가 결국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야 되지 않을까. 청중의 듣는 수준에 따라서 이야기 수준을 낮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수십년 동안 낮춰서 얻은 게 무엇이냐는 회의가 듭니다.
고민을 들추고 나누는 대중 예술을 바란다
이한 도덕 판단에도 두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측면은 인지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느냐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으로 내가 이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느냐고요.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이 사람이 나와 동일한 사람이냐?’ 말을 하라고 하면은 ‘아이 사람이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최근에 노동조합활동가를 자본가가 때렸을 때 같은 사람이라고 도저히 생각을 했을까? 아마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라고 언어는 말하지만, 감성적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 할 거예요. 그렇기때문에 애초에 실천적으로 자기한테 그 질문이 솟구치지 않는 거예요. 솟구치지 않는다고 보면 그런 솟구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롤즈를 들이대든 칸트를 들이대든 아니면 샌델 할아버지를 데려오든 소용이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돈이 아주 많은 우리 사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그 사람들을 몰아내면 되지만, 그게 점점 만연하고 뿌리박게 되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된다고 보는데, 저는 그 지점에서 만화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최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전망이나 작업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최규석 만화뿐만 아니라 예술의 특성인 것 같은데, 최근 최모씨가 탱크로리 기사를 팼단 말이죠.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비난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을 빼고 나면, 예술영역에서는 이런 것들을, 사람들을 맞는 사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의 입장에다가 집어넣을 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있게끔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죠. 그리고 실제 저는 그런 걸 보더라도 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잘 안돼요.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그게 허용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보니까, 누구라도 허용된다면 나빠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나빠질 수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반성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것 같고. 예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기가 하지 않은 행동, 자기가 해보지 않은 생각을 했다고 착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미리 반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봐요. 제가 지금까지 했던 작업들도 거의 대부분 윤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될 상황에 주인공들을 밀어 넣죠. 그리고 독자들이 주인공을 따라가게끔 만들고. 결국에 평소에 자기가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고, 별로 고민해보지 않은 사실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훈련이라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논리력을 필요로 하는 글을 별로 읽지도 않거니와 그걸 자기문제로 안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철학책에 나오는 문제들을 보면서 자기가 풀어야 될 문제, 내 문제,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이 사람은 아, 이런 고민까지 하고 사는 사람이구나, 거기서 끝이 난단 말이죠. 그 간격을 연결할 수 있는 역할이 가능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살면서 그런 작업을 하겠죠. 어릴 때 윤리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걸 알고 그거를 좀 열심히 찾아봤으면 작품이 어떻게 됐을까 가끔은 섬뜩한 느낌도 있어요. (웃음)
이한 그래요?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어떤 이유 때문에 섬뜩한 느낌을 받으시죠?
최규석 독자들이 따라오게끔 만드는 힘이 좀 더 약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죠. 왜냐 하면 결론이 나와있으니까. 어느 정도까지 결론이 나와 있는 상태니까. 나 스스로가 작품을 하면서 주인공의 고민에 동참해서 그 사태를 헤쳐나가는 그런 관점이 사라지겠죠.
이한 지금은 알아도 작품 활동에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은 어떤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건가요?
최규석 기술력이 쌓여서. (웃음) 기술력이 좀 쌓인 면이 있죠. 예전에는 작품하고 나를 잘 못 뗐었거든요. 주인공이 고민하고 있는 게 사실 당장의 내 고민이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도 먹고 하니까 옛날에 했던 고민이라도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댈 수 있는 그런 기술력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이한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유전자가 뭐 그렇게 타고난 것도 아니고, 사람이 반성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일상화된 사고나 감성을 느끼는 거죠. 감성적인 부분도 결국 훈련을 통해서 마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돼요. 물론 훈련이라는 게 교과과정식 훈련이 아니고요. 우리가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옆에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의 기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대규모 사회가 되다보니 자기하고 동류가 아니고, 평소에 어울려 지내는 사람이 아니면 이 사람이 나하고 같은 사람이고, 이 사람이 느끼는 바를 배려하는 감성을 느껴야 된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죠. 결국 그런 감성도 완전히 자연적인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감성도 촉발되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이랑 그냥 책에 나온 통계를 보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아는 사람이랑은 많이 다를 거라고 보거든요.
최규석 저는 역할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쨌든 그것이 대중매체의 역할이고, 사회에 대한 애정이 좀 있는 창작자라면 그런 노력들을 해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창작자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꼰대 소리를 듣죠. 당연하죠. 이미 예술이라고 하는 게 우주로 날아간 상태고, 아방가르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세월이 돼버렸죠. 해외의 대중예술 내에서는 아직도 그런 역할들을 하는 게 많이 보이거든요. 항상 그런 정치적인 판단, 우리 실생활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예술에서는 그게 빠져있는 게 대부분이죠. 미국 드라마 같은 것에 보면 흔히 나오죠. 연애하다가도 갑자기 파업이 일어나면 파업에 동참할지 말지 주인공들끼리 고민하죠. 여자친구는 동참하고, 남자친구는 또 출근하고, 이런 것에서 오는 갈등. 이런 거라든가, 한 의사가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환자를 맞았을 때, 당연히 고치긴 고치지만 중간에서 고민하는 과정들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거의 공기처럼 ‘아 저런 고민이 존재하지’, ‘저 고민에서 내가 떨어져 있지 않지’라는 느낌을 항상 준다는 말이에요.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그런 고민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대중예술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한 그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살다보면 고민이 마치 분업화된 것처럼 느낄 수 있거든요. 고민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너무 좀 버겁다고 할까, 나를 혼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그사람의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내 삶에 너무 부담이 되는 것 같고, 비용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런 비용들을 다이어트를 하다보면 고민을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확립이 되는 거죠.
최규석 그러면 고민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의 어떤 말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요? (웃음)
이한 제가 볼 때는 『너의 의무를 묻는다』 7장에서도 다루었는데, 제가 고민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의 말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전반적으로 보편적으로요구할 수 있는 수준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도 좀 논의를 해보자, 추론에 의한 논의를 해보자 했어요. 보통은 우리 사회의 어떤 민주주의나 사회 진보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항상 부채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한국 사회 사람들이 고민을 피하다 보니까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라이프스타일은 고민의 비용을 아주 날씬하게 다이어트해서 피해가려는데 다른 사람이 현 상태가 잘못되었다, 뭔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니까 왠지 혼나는 기분이 들어서 듣기가 싫은 거죠. 거기다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의 삶 자체가 옆에서 보면 각박하고 여유가 없어 보이고요. 우리 사회의 기묘한 이분법인데, 보통의 생활인은 고민 없이 살아도 되지만, 뭔가 바꾸려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우리 사회의 윤리적이상을 위해 모두 바쳐야 된다는 식으로 몰아가거든요. 그러면 그런 큰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애초에 발을 들이기를 꺼려하게 되죠.
최규석 그런 분위기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항상 궁금해요. 그런 극단적인 사고방식, 착하려면 완전히 착하고, 못되려면 완전히 못되야 된다고 하는 게. 대중들의 어떤 사고방식, 저나 제 주변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얘기인데, 그런 거를 볼 때 굉장히 기뻐하거든요. 촛불집회할 때 같은 경우에 그런 일 있었잖아요. 모금을 하고, 집회 앞에서도 나름 조직하려고 애쓰던 사람이 카드를 써서 안마시술소에 갔다 왔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게 꼭 어떤 자기의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었기 때문에 기뻐했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거 봐라’라는 이거.
이한 제가 볼 때 그런 기쁨을 느끼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자신은 사회의 좋은 변화를 위해 수고롭게 뭔가 하고 있진 않지만, 실상 수고롭게 뭔가 하는 사람 중 잘못을 저지르는 누군가보다는 최소한 더 낫지 않느냐는 느낌인 거죠. 거기서 좀 더 나가면 그런 사람들 어차피 다잘못을 저지르니까 내가 그들 모두보다 낫다는 느낌까지 갈 수 있고요. 그런데 그런 왜곡된 형태의 호불호로만 그 관심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성적인 탐구가 가능하거든요. 좋은 삶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판단을 고정점 삼아 추론을 해나가다 보면 최소한 우리가 취해야되는 가치 있는 삶의 범위라는 것은 나오게 된다고 보거든요. 그 범위 안에는 자기 삶을 바쳐서 어떤 의무를 넘어서서 희생을 하는 삶도 있겠지만 아닌 삶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데, 그 아닌 삶에서 도덕이나 규범적인 고민이나 실천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냐? 제가 생각할때는 시민으로서 공정한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러면 그 공정한 몫이 크게 부담되지 않고 단지 아까 말씀하셨듯이 고민을 해야 될 때 고민을 하는 겁니다.
만화, 그 효과적인 전달 가능성을 통해서
최규석 앞으로 계속 윤리학 관련한 책들을 중점적으로 쓰실 건가요?
이한 예. 정확하게 말하면 윤리학이라기보다는 정치철학 혹은 법철학과 관련된 거죠. 좋은 삶이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최 작가님과 같이 작업을 해서 잘 배우는 게 뭐냐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삶의 흥미진진한 측면들을 보여주는 형태로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즐겁게 진지하게 배우는 걸 핵심으로 하는 삶이거든요.
최규석 모범생적인 행복함이네요. (웃음)
이한 예. 거기에 좀 아스트랄한 부분을 넣어야 되는데, 만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다음에 또 제가 늘 고민하고 궁금한 것은 인지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러니까 판단이나 추론을 필요로 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것을 사람들이 접하고 알게 하는데 과연 만화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떻게 될 것이냐, 또는 만화는 사실 껍데기에 불과하고, 사실 요즘에는 정부에서도 만화가들을 많이 쓰잖아요. 정책 홍보를 한다든가 제도 홍보를 한다든가, 최근에는 심지어 4대강이나 이런 거를 홍보하는 데도 쓰는……
최규석 4대강 홍보만화는 저한테도 일이 들어왔었죠.
이한 제가 볼 때, 그런 건 기술의 영역이지 예술의 영역은 벗어났다고 봐요. 논의가 분분하겠지만 그것이 주제나 소재를 정하는데 있어, 자율성이 탈각된 상태라 사실 예술이라고 할 수 없죠. 근데 어쨌든 글로만 할 수 있는 걸 굳이 만화란 매체로 옮겼다면 흥미나 어떤 전달력 측면에서 장점이 있어야 될 텐데, 그 장점을 취하면서 형해화되지 않는 그런 방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최규석 있죠. 제가 볼 때, 만화라고 하는 형식이 사람들한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텍스트도 그림도 애초에 설명을 위한 방식으로 뭔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나왔는데, 최초에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만화형식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거든요. 이미지와 말이 혼합된 방식으로. 이건 과학자들이 밝혀야 되는 부분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만화적인 방식이 더 사람들한테 빨리 다가오고,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림이나 텍스트가 따로 분리돼서 발전하다보니까 합치는 방식에서 아직까지 잘 못 합치는 것 같아요.
이한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정보를 다루는 만화같은 것들을 보면 캐릭터가 계속해서 설명만 한다거나, 아니면 대개 베스트셀러가 된 여러 나라를 다룬 만화를 봐도 열심히 재밌게 읽었지만 딱히 새로 알게 된 것은 없는 것 같은. 술술 넘어갔지만, 사실 사고 능력 같은 게 그 시간에 텍스트로만 된 책을 읽은 거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죠.
최규석 아무래도 밀도가 낮다보니까.
이한 그런데 단순히 정보의 밀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정보 전달만으로는 부족하고, 상당한 정도 논증을 읽는이가 이해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죠. 정의의 문제도 거기에 속하지만, 진화론에 관한 대중서로 인기 있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이 쓴 책들도,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꽤나 주의 깊게 읽어야 하거든요. 그 정도의 어떤 논증이 들어간 것을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요?
최규석 제가 해야 될 것 아니죠? (웃음)
이한 아니, 저는 만화라는 구조가 갖는 객관적인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은 거죠.
최규석 아직 잘 모르겠어요. 조금씩이라도 만화 문법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스콧 맥클라우드의 책에서도 볼 수 있듯, 지금까지의 만화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되어 왔는데, 만화라고 하는 게 층위로 볼 때 문학과 같은 층위가 아니라 텍스트와 같은 층위가 있다는 거죠. 개중에서 예술적인 것도 있지만 전달방식으로서의 만화라고 하는 것. 만화를 바라보는 인식이 훨씬 더 확장되는 거죠. 이렇게 확장이 된다면 개별적인 창작자들이 나름 고민을 하겠죠. 그 뒤에 나오는 어떤 르포작품들이라든가, 여러 작품을 보면 개별적으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 게 확실해요. 어떻게 만화형식으로 정보전달을 새롭게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많이들 연구하고 있어요.
이한 제가 고안하고 최 작가님이 그린 『100℃』의 부록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하신 가능성의 실현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만족하시는지?
최규석 별로 못하고 있는데요. (웃음)
이한 만약에 그런 가능성을 실현하는 책을 혹시라도 쓰게 된다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도를 하시고 싶으신지?
최규석 좀 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텍스트로만 효과적인 부분도 있을 거고, 만화가 들어가서 좋은 부분도 있을 거고. 이걸 어떻게 단절되지 않게끔 유기적으로 잘 하느냐. 삽화 정도의 역할로 하는 부분들도 있다가 만화가 더 추가되는 부분도 있다가 운율을 타는 형태가 가능할 것 같은데……
이한 근데 어떻게 보면 정치철학이나 윤리학은 어떻게 보면 좀 더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의 흐름이 논쟁과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캐릭터화해서 그리더라도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고 리듬 있게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다만 말한 내용이 전부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체는 다시 그림과 같은 표현양식을 통해서 섞는다면 그렇게 기발한 양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머리가 아프지 않게 따라갈 수 있는 완급을 조절하느냐 이런 문제들만 고민하면 되겠죠.
가치있는 삶을 생각하다
최규석 이 변호사님은 한국사회에서 성공이라고 부를만한 걸 성취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잖아요. 인정을 못 하기가 힘들겠죠. (웃음) 그런데 세속적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 같아요. 실제제가 알기로도 벌어들이는 수입도 많지 않을 것 같고요.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건가요, 아니면 효과적으로 봉쇄를 하고 있는 건가요?
이한 제가 혼자라면 거의 전혀 없는 쪽에 가까워요.
최규석 그러니까 뭔가 『습지생태보고서』의 주제이기도 한 잘나가고 싶다는 욕구, 이런 건 없나요?
이한 그거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욕구가 추상적인 형태로 있는 건데, 실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봐요. 결국 잘나가고 싶다는 욕구자체도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차원과 같다고 봐요. 저는 권력 자체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서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비추어서 보며 계속 그것을 깎아내리게 되는 습성이 습관화된 것 같아요.
최규석 근데 실제로 권력이 실질적인 쾌감을 주잖아요.
이한 실질적인 쾌감을 느낄 기회가 별로 많지 않죠.(웃음) 다른 사람한테 권력을 행사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최규석 그러면 하시는 일이 대중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권위가 확충 되어야 하잖아요. 유명한 대학의 교수거나 변호사시니까 법조인으로서의 어떤 활동이 활발하다거나 하는 책을 뒷받침할만한 후광이 있어야 되잖아요.
이한 권위에 대한 욕구는 있죠. 그 권위에 대한 욕구를 추구하는 건, 권력에 대한 추구와 달리 좋은 삶과 양립이 가능하다고 보고, 공부를 하면서 학계에 논문을 제출하고 중심 되는 논쟁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특히 작년에 중요한 소송들을 많이 맡으면서 좀 더 저의 의견과 논증에 무게가 실리게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고, 보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걸리면 저도 욕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가 거의 만날 삼각김밥 먹고 이런 수준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웃음) 종합적으로 보면 나도 관계를 맺고 살수밖에 없기 때문에 혼자만 생각한다면 물욕이 없겠지만 관계를 보면 최소한의 수준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마 삶의 중요한 가치를 물질적인 것과 교환하지는 않겠지만, 로또가 된다면 감사히 받겠다는 거죠. (웃음) 청빈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닙니다.
최규석 사실 그런 오해들을 많이 사죠. 저도 이렇게 공적인 발언, 이런 것들을 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청교도적인 인간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한 건데 왜 내가 개인의 행복이나 쾌락을 무시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이게 인식 속에서 많이 합쳐져 있는 것 같아요.
이한 아까 말했듯이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윤리와 사회도덕을 결합시킨 사고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최 작가님이 지금 계획하고 계신 작업이나 하고 싶은 작업, 그리고 향후에 어떤 삶을 살고 싶다 이런 게 궁금해요.
최규석 저는 책임감 같은 것에 지배를 많이 받는 성격이에요. 물론 한국 사회의 어떤 특이함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책임감에 의해서 시작되는 작업들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거나 예술적 성취를 아예 포기하는 건 아니고요. 장기적으로는 정말 즐거운 작업을 하고 싶어요. 사실 작품에서 인정을 받고 하면서 자유라는 것을 잃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전혀 다른 걸 하고 싶은 욕심도 있는데 분명히 성취가 다르겠죠. 지금까지 다뤄온 비슷한 작품을 장기간 해왔고, 거기서 쌓인 테크닉이라든가 이런 게 있는데 그걸 싹 무너뜨리고 새로 뭔가를 시작하면 진짜 좋은 작품이 안 나올 수도 있겠죠.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어쨌든 책임감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나면, 떠나서 작업을 하고 싶죠. 이야기구조를 가진 작품이 아니더라도, 정보전달을 중점으로 하는 새로운 문법, 만화의 새로운 문법 이런 것들도 연구를 하고 싶고요. 제 삶만 놓고 보면 저는 좀 반대로 산 것 같아요. 어릴때는 제가 생각하기에 감정이 합리적이지 않다거나 사회를 위해 좋지 않다거나 하는 쪽의 것을 욕구하면 이성이 차단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안 남겨 놓은 상태에서 성장을 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쾌락이란 건 참 좋은 거구나 깨달으면서 내가 그동안 속았구나 했죠. 저도 다른 사람의 글에 굉장히 영향을 받는 인간이었던 거죠. 왠지 그 사람들 보면 정말 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 훌륭하다 했는데, 이런 게 좋은 삶이 아니라는 걸 최근에 깨달은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공포가 생기더라고요. 쾌락에 눈떴다고 해서 제가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아닌데 쾌락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인정한 뒤에는 이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밖에 없다고 하는 게 굉장히 무섭게 다가오더라고요.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하면 행복, 즉 쾌락, 이성적으로 훌륭한 일을 해서 오는 쾌락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겁게 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바른 삶이라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런거죠. 평생 답을 찾아야 하겠죠.
이한 정말로,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는 문제는, 이제까지처럼 거리감 느껴지는 주제로 다루어왔던 것과는 달리,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솔직하고 세심하게 다루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최규석 대화가 주는 쾌락 면에서는 둘이서만 만날 때보다 못하지만 이렇게 갖춰진 자리에서 만나니 술자리에서 주고받기엔 좀 진지한 얘기들도 할 수 있고, 수준도 있어 보일 거 같아서 좋네요. 허허. 앞으로 활발한 집필활동 기대하겠습니다. 반가웠어요.
이한 『너의 의무를 묻는다』, 『학교를 넘어서』, 『탈학교의 상상력』 등의 책을 쓰고, 『포스트 민주주의』, 『계급론』, 『이반 일리히의 유언』 등의 책을 옮겼다. 시민교육센터(http://www.civiledu.org)의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사회로 변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변호사로서 노동사건의 소송대리 및 변론을 하고 있다.
최규석 197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상명대학교 만화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솔잎」으로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등장했다. 2003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초청되었고, 2004년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 단편상,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 『울기엔 좀 애매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