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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전쟁을 넘어 평화를 연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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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7 15:31 조회 6,61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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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파괴와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역사 이래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전쟁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물줄기가 되곤 했다”고 말하지만, 전쟁만큼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전쟁’이라는 단어는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했던 아픔을 담고 있으며,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민족의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 것일까요. 왜 인간은 지금도 전쟁을 준비하는 것일까요.

전쟁의 본질을 탐구한 고전 『전쟁론』전쟁에 관한 명저를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탁월한 전쟁이론가였던 클라우제비츠는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토대로 전쟁의 본질은 물론 전쟁이론, 전략과 전술, 전투, 공격과 방어, 군사력과 전쟁계획 등 전쟁의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고찰합니다. 사실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은 정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을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며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이며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이라고 정의합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책 첫머리에서 전쟁의 본질에 대해 “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그럼 ‘나의 의지’가 어떻게 정치로 귀결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집합적 욕구가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고, 결국에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폭력행위가 군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편 추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절대전쟁, 즉 극단적인 전쟁은 개연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전쟁은 예외 없이 ‘우연’이라는 인과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는 현실전쟁의 삼중적 성격으로 폭력성, 우연성, 정치성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먼 옛날, 돌도끼도 없던 시절의 전쟁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발달하고 한 사회가 처한 현실적 인식이 바탕을 이루면서 모든 전쟁은 현실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무기·화력 등만을 생각한, 순전히 군사적인 판단에 따라 수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된 것입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총만 쏘는 행위는 무모한 용기일 뿐입니다. 최근 한반도를 감도는 군사적 긴장감은, 결국 총만 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남북 관계란 결국 우리가 처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순리를 바탕으로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일인 것임을 오래 전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반전·평화를 외치는 시민의식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쟁의 속성을 밝힌 고전古典이라면 히로세 다카시의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는 『전쟁론』에 대한 오마주이자 20세기에 발발한 전쟁의 음험한 속내를 속속들이 밝힌 화제작입니다. 일본에서 ‘1인 대안언론’이라 불릴 만큼 철저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일본은 물론 지구적 문제에 접근하는 저널리스트 겸 논픽션 작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따라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을 분석합니다.

히로세 다카시는 1945년 8월 15일부터, 그러니까 일본과 독일이 주축이 되어 벌인 제2차 세계대전에 주목합니다. 스스로가 일본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하루도 쉬지 않고” 전쟁을 거듭하게 되었고, 그 폭력성 또한 더더욱 짙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어쩌면 원죄原罪와도 같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복마전伏魔殿, 말 그대로 마귀가 숨어 있는 집이나 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가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의 본질을 추적했다면, 『배틀, 전쟁의 문화사』는 “공허한 지적 유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엄연한 현실”로서의 전쟁을 조명합니다. 엄연한 현실로서의 전쟁은 신형 무기나 용병술 등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군사문화에 달려 있으며, 군사문화는 그것을 포괄하는 사회문화에서 비롯된다.”라고 일갈합니다. 전쟁이란 소수의 호전적 인사들의 놀음이 아니라 한 사회의 지배적 인식이 발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한 사회의 지배적 인식에 맞서는 소수의 의견들, 즉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에서 경험한 것처럼, 국가는 전쟁 중일지라도 반전反戰을 부르짖을 사회적 인식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어이 파병이 이루어졌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우리 시민들의 인식도 반전·평화였던 것을 상기하면 『배틀, 전쟁의 문화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쉽사리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그리고 전쟁에 관한 모든 것 『삼국지』
저에게 ‘전쟁’ 하면 떠오르는 첫 책은 단연 『삼국지』입니다. 복숭아꽃 피는 장원에서의 도원결의, 오관참장의 주인공 관우, 장판교에 우뚝 선 장비, 동남풍을 비는 제갈공명 등이 펼치는 지략과 무예의 대회전大會戰은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합니다. 한漢의 영화가 쇠하자 중원을 두고 위魏, 촉囑, 오吳가 자웅을 겨룹니다. 때론 출중한 장수들의 무예 대결이 등장하고, 때론 책략가들의 지략이 생과 사를 가릅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이었습니다. 선친先親의 서가에서 정비석 선생이 쓴 『삼국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삼국지』는 제 인생의 책이 되었고, 변변치 못한 실력이지만 책을 읽고 평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서점에 가보시면 다양한 판본의 『삼국지』가 나와 있습니다. 황석영, 김홍신, 장정일, 조성기, 이문열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삼국지』를 선보였기 때문이죠.

그 중 가장 추천해 드리고 싶은 것은 월탄月灘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입니다. 1964~68년 <한국일보>에 1,603회가 연재되는 동안 일명 『월탄 삼국지』로 불리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문에 조예가 깊고, 『금삼의 피』 『임진왜란』 『세종대왕』 등을 선보이며 ‘한국 역사소설의 대부’로 불린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는 말 그대로 고풍스러운 『삼국지』의 맛을 한껏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다시 『삼국지』를 읽으면서 제가 주목한 대목은 전쟁의 변화 양상입니다. 『삼국지』 초기에는 주로 무장武將들의 개인 대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무명이었던 관우와 장비가 절륜한 무예 하나만으로 빠른 시간 내에 중원을 호령하는 장수로 우뚝 선 것이지요. 그러나 제갈공명이 등장하면서부터 『삼국지』의 전쟁 양상이 변화합니다. 진법을 중심으로 지략 대결에 나서는 것입니다. 군사 전략과 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촉의 제갈공명과 위의 사마중달, 오의 주유 등 신출귀몰한 모사들이 펼치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의 대결입니다. 오죽하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말이 떠돌았을까요.

혹시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라는 농담이 있는 것 아시는지요. 아마도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나 그 중 정도正道를 버리고 잡사雜事만을 취할 것을 두려워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는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삼국지』는 전쟁만을 다룬 흥미 위주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포괄하는 거대한 물결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클라우제비츠의 지적처럼 현실에서의 전쟁은 우연성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우연성이때론 광기狂氣를 동반하곤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유대인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는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와 그 수하들을 악의 화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책이 바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힌 것은 196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고, 한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때 아렌트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됩니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했던 아렌트에게 유대인들이, 아니 제2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이 원한 글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이히만과 나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정죄에 가까운 독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라고 말합니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아이히만은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한 충실한 공무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히만에게 유대인 학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일로 동족 유대인들에게조차 ‘따’를 당했고, 때론 적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광기, 거기서 분출하는 악한 생각과 행동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철학적 성과를 내놓은 한나 아렌트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광기와 악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양심은 인간 본연의 것이기보다 환경과 사회적 여건의 제약을 받는 것이기에, 모든 인간은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배우고 평화를 연습하자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아픈 상처를 안고 풍진세계風塵世界를 살아왔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한을 남겼고, 또한 이념에 의한 대결은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전쟁이라는 말 뒤에는 꼭 ‘평화’라는 단어가 짝패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혹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라고 말하지만,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 평화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쟁은 오로지 과거의 기억만으로도 족합니다. 역사에서 배우고, 평화를 연습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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