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아픔에도 우선순위가 있나요?』 김준혁 의료윤리학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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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5-02 16:05 조회 739회 댓글 0건본문
“환자를 잘 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의료윤리에 대한 관심이 싹트신 듯합니다. 전문의로 살면서 이런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 있었나요?
어떤 계기가 생겨서 의료윤리를 공부했던 건 아니에요. 막연하게 공부하면서 일종의 불만과 불안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진료하면서 문제 상황을 겪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의사들이 어려워하는 환자 분들과 오히려 잘 지냈기에 진료 경험을 계기 삼아 의료윤리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던 것도 아니에요. 의사 수련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의료윤리를 공부했는데, 진짜 문제는 그런 질문들에 답해 줄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거예요. 저와 비슷하게 고민했던 사람이 많았더라면, 저 사람도 저렇게 고민했으니 나도 공부를 이렇게 해야지 하고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새로이 발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어요. 공부하던 당시, 한 지도교수님은 제게 “자네는 여기 왜 왔는가.” 하셨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답한 적도 있었거든요. 지금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제가 하던 고민에 누군가 답하지 않았고 제가 남의 언어를 빌려서 대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야 내가 지금 하는 진료가 좋은 진료인지, 이걸 통해서 환자들과 더 좋은 삶과 건강을, 돌봄을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공부해 왔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부터 원대한 비전을 갖고 특정 연구를 시작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을 존경합니다. (웃음) 하지만 훗날 돌아보니 ‘그래서 내가 이걸 하고 있구나.’ 하고 체감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의료윤리란 “의료적 상황에서 어떻게 좋고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그러려면 무엇을 따져보고 살펴봐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일”이라고 밝히셨어요. 의사의 “가부장적인” 진료와 처방에 따라 환자가 행동하는 모습이 익숙해선지 이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왔어요.
환자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 거예요. 이미 보건의료기본법에서 환자의 권리를 ‘신체 자기결정권(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에 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 결정의 권리가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환자가 의료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법에서도 명확히 언급하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환자들이 의사가 원하는 게 내게 좋은 거라고 믿고, 의사도 스스로 환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의 진료를 내린다고 믿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의료현장에서 서로 알게 됩니다. 연명의료나 존엄사를 선택할지 말지가 대표적인 예고요. 가령 정부의 방역 정책을 살펴보면 국민의 뜻과 정부 방역 방침이 다를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병원이 생각하는 방역 절차와 계획이 환자가 느끼는 불편이나 요구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텐데요. 누군가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의료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아요. 환자가 위험한 약을 먹겠다고 말하면 의자 입장에서 동의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 상황들을 제하고 나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회색지대’가 많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의료현장에서의 '회색지대'의 예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요?
의사 혹은 간호사, 병원은 ‘이렇게 하길’ 원하는데, 환자와 가족은 다른 이유로 ‘저렇게 하길’ 원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객관적 기준으론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해요. A와 B의 선택지 모두 장단점이 있어서 뭘 해도 환자가 원하는 쪽으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요. ‘투석’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신장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이 투석을 꽤 오래 해야 하는 이유는 국내엔 장기이식 기증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분들도 있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식을 못 받는 분들도 있어요. 그 상황 속에서 환자는 투석의 방법을 안내받는데, 꽂는 부위에 따라 정맥 투석과 복막 투석으로 나뉘어요. 어디에 꽂든지 간에 두 투석 방법 모두 장단점이 따르기에, 의사 입장에서는 어느 쪽을 권하든 큰 차이가 없어요. 환자 입장에서는 자기 생활을 고려해서 어느 부위에 투석할지 결정해야 하지요.
생활에서 가까운 예로는 치과 치료를 들 수 있는데요. 새 치아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환자가 치아 재료를 소개받는 경우가 있지요. 이때 비싸더라도 튼튼하고 예쁜 재료를 선택할지 덜 튼튼하지만 싼 재료를 선택할지 기로에 서는데, 이러한 ‘의료적 상황에서 의료인과 환자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옳은 것인가’ 하고 질문해 볼 수 있어요. 의료윤리를 거대한 담론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당장 맞닥뜨릴 수 있는 선택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같이 이야기하는 기술이 지금으로선 많이 부족해요. 더 좋은 선택을 위한 고민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는 게 우선이겠다 싶었어요. 서로 논의하면서 ‘중간점’을 찾아볼 수 있게 말이죠.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에서 의사의 ‘3분 진료’를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의료제도의 문제적 결과물로 보셨는데요. 당시 진료 체계는 어떤 방식으로 수립되었나요?
5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없었습니다. 아픈 사람은 당연히 많았죠. 의료 보건 서비스를 빨리 제공해야 하지만 당장 의사를 늘릴 순 없으니 의료의 제공량을 늘려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의료비용에 대한 국가 보조’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국내로 보험제도를 들이기 위해 일본을 방문해 여러 연구를 했어요. 하지만 재정이 부족했기에 전체적으로 고비용 항목을 보장하는 일본의 의료제도를 그대로 들여올 수 없어서 몇몇 보험 항목을 ‘쳐내기’ 시작합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질병, 치료해야만 사람들이 일터로 돌아올 수 있는 질병 위주로 보험 항목을 설정했어요. 나머지를 비보호·비급여 항목으로 남겨두고요. 쉽게 말해 당시 정부는 의사들에게 “보험 진료로 당신들이 손해 보는 건 알겠는데, 그 외에 비급여 항목을 통해서 돈을 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합의를 제안합니다. 그 뒤 대다수 질병에 대한 보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어서 사람들이 병원에서 쉽게 치료받을 수 있게 됐지만 몇몇 질병 항목에 대해선 치료받기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어요. 비급여 진료를 하면 의사가 장사해서 ‘잇속 챙긴다’는 편견이 생겨났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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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험 진료만 하면 병원 운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편집자 주: 국내 병원의 95%가 사립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나마 이걸 조율하기 위해 했던 행위가 많이 진료하는 거였어요. 의료현장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이 나가는 지출 항목이 인건비인데, 많이 진료할수록 인건비는 감당할 수 있으니 많이 진료할 수밖에요. 많이 진료하려면 환자를 짧게 봐야 하다 보니 ‘3분 진료’라는 말이 생겨났죠.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환자를 3분도 채 못 봅니다. 제가 소아치과에서 일할 때도 오전부터 오후 3시반까지 오십 명가량의 환자가 예약되어 있어서 한 명당 2분간 검진했던 적도 있어요. 대기하는 환자는 약속한 진료시간에 병원을 방문하기에 의사 역시 다음 환자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요. 미국에서는 환자 1명당 최소 15분은 보는 것을 원칙으로 두지만, 국내에서 그렇게 하려면 현실적으로 의료비가 더 올라야 해요. 의료비를 무한정 올리는 것도 좋지 않기에 대안을 찾는 게 필요해요. 현실적으로는 빨리 진료할 수 있는 환자는 빨리 보고, 오래 이야기할 상황에 놓은 환자는 오래 진료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의료제도가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진의 희생으로 진료가 계속 이뤄지는 형편이에요.
자원을 활용해서 최대 다수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게 공정한 일이고, 제일 약하거나 제일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을 먼저 지원하는 일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거예요. 의료 자원을 쓰는 방식에 대해 논의할 때 대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득이 돌아가는 게 맞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싫습니다.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특정 의료 서비스에서 배제되거나 사회 문제로 차별을 받을 때 배상법이나 대응책을 마련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70세 노인과 80세 노인이 모두 코로나에 걸렸는데, 응급실에 자리가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고 해 보죠. 두 분 중에 누가 응급실에 들어가야 공정할까, 물어보면 사실 두 분 다 입원해야 하는 이유는 타당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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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둘다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고, 이런 논의 자체를 비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최소 기준이 있다면 그에 바탕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때 ‘삶의 단계를 충분히 밟았는가’를 최소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예컨대 응급상황에 처한 청소년과 노인이 있다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청소년을 먼저 입원시켜야 한다고 할 거예요. 어려서만은 아니고 이루지 못한 꿈, 달성하지 못한 미래, 주어진 기회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든요. 60∼70대에도 많은 걸 이루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청소년 시기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많은 걸 합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줍니다. 나이나 삶의 단계를 거쳤는지의 유무는 공정함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어 주는 것이죠. 나아가 나이보다는 ‘삶의 기회’라는 기준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의료현장에서 공정함의 기준을 논하고자 할 때 향후 삶을 통해 누가 기회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선택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병과 돌봄, 치료에 관한 생활 공부: 의료윤리
『아픔에도 우선순위가 있나요?』는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쓴 의료윤리 가이드북이에요. 책에 실린 질문이 실제로 청소년들이 관심 갖는 주제들이기도 한데, 어떻게 선정하셨어요?
“코로나19 백신, 위험하다는데 맞아도 될까?”, “장애는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책을 쓰면서 추가한 챕터예요. 어른의 눈으로 선정한 질문들이기에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인지에 관해선 확신이 크진 않았어요. 중학생 딸이 있었으면 물어봤을 텐데, 제 딸은 초등학생이거든요. (웃음) 다만 의료의 선택에 있어서 청소년들은 부모의 결정을 따르는 경우가 많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주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식이 들었어요. 대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의료적 선택을 내리는데, 자녀를 가장 잘 안다는 가정하에선 그 결정이 틀리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가족이 함께 살아도 자녀를 모를 때가 얼마나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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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려진 법적 판결을 눈여겨봐야 하는데요. 한 청소년이 병원에서 질병에 따른 검사를 받는 와중에 후유증이 생겼고 부모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어요. 1심은 병원이 잘못한 게 없다고 판결했지만, 2심은 병원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즉, 치료나 검사를 잘못한 게 아니라 ‘청소년에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에요. 부모에게까지는 치료과정, 검사내용, 부작용에 대해 설명했는데 당사자인 청소년에게 설명하기 않았기에 법원은 이천만 원 보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의료진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질병에 대해 설명할 의무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법원도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인정되지 않았거든요. 적어도 ‘청소년은 의료적 문제에서 왜 결정 내리지 못하는가’에 관해서 고민하고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가 치료를 받는 당사자일 경우 의사판단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지만, 청소년의 경우 의사결정의 공동결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봅니다. 나아가 청소년들이 이런 의료 문제를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고 문제라면 정보를 주고 이야기를 해 줘야죠. 『아픔에도 우선순위가 있나요?』는 청소년에게 충분히 같이 의료문제에 대해 고민하자고 제안하고 의료 정보를 알리기 위해 쓴 책입니다. 의료문제에 관해 그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최소한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생각해 보고 의료적 상황을 마주했을 때 충분히 자신의 문제 상황에 적용하고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요.
2020년 당시 우울증을 진단받은 아동·청소년 진료 인원이 4만 8221명으로, 2016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우리 사회 청소년은 정신건강 의료서비스에 상당히 소외”되어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진단하시나요?
정신과 진료가 일종의 ‘사회적 낙인’으로 작동할 거라는 염려가 크기 때문일 겁니다. 정신과를 내원한 기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런 낙인 효과를 없애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뼈가 다쳤을 때 정형외과를 가는 등 급한 치료는 본인이 결정해서 치료를 받고 보호자가 내원하는 것은 가능한데, 정신건강의학과 내원에 대해선 유독 그렇지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 허락이 있어야 하고, 부모가 가지 말라거나 같이 가야 하는 곳이다 보니, 청소년들이 정신 상담을 더욱 어려워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부모님께 우울증 문제를 상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애초에 그 증상의 원인이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일 테니까요. 지금 내가 너무 우울하다면 과연 그게 혼자만의 이유에서 비롯된 걸까요? 가족 환경과 문화, 부모의 교육 등 영향이 과연 없을까요? 부모 입장에선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어려울 거예요. 상대방이 원인 제공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원인 제공자에게 한다는 게 힘들 수 있으니까요. 사실 청소년들의 정신 상담 이용을 확대하려면, 청소년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워낙 국내 공공의료 서비스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고 심리상담실이나 관련 서비스 공간이 부재해서 환자가 최종에 겨우 찾는 장소가 정신건강의학과입니다. 사실 낙인의 문제는 몇 사람만 관심을 가지면 바꿔 나갈 수 있는 주제예요.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병원에 보내지 않고 자녀가 ‘낙인에 따른 피해’를 입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 듯한데,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젠더에 관한 의료윤리에 관해서도 짚으셨죠. 실제로 십 대에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건 보편적이지만 생각보다 교육현장에선 도덕적 잣대로 우려부터 하는 시선이 두터워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런 학생이 곁에 있다면, 우리 안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자 하는 방식이 있음을 존중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어요.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던 ‘수행성(편집자 주: 일정하게 규범화된 행동들을 반복함으로써 젠더가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 개념을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텐데, ‘저 사람은 여자니까’, ‘남자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피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당사자에게 원하지 않는 호의를 건네려는 모습에선 의문이 간 적도 있어요. ‘당신의 삶은 충분히 귀중하고 나는 당신의 삶을 응원한다’ 정도까지 못 되더라도, ‘이렇게 해라’, ‘너는 왜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거니’라고 말하는 게 과연 맞을까 싶을 때가 있었거든요. 저는 특정 누군가에게 어떠한 정체성을 규정할 때마다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고요. 타인의 ‘다름’을 내가 안다고 전제하는 것이 저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곁에서 응원하고, 네가 어려운 순간을 겪더라도 네 옆에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너의 성정체성을 드러내’, ‘네 정체성과 관련된 이런 활동을 하고 개발해’ 하고 이야기하는 건 위험할 수 있어요. 옆에 있는 사람의 역할은 ‘당신이 필요로 한 만큼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해 주는 거라고 봐요. 가령 저는 거식증을 앓는 환자를 상담할 때도 당신의 어떤 지향이 틀렸으니 고치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네가 음식을 못 먹는다면 그저 옆에 있어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돼요. 한국에선 이야기하면 공격을 받기 일쑤인 주제들이 있는데 젠더, 장애, 정신질환 이슈가 그런 편이에요. 여러 입장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난항인 듯해요.
헬스 앱에 저장된 개인의 데이터가 불특정 다수에게 수집된다는 것 등 미래 의료윤리와 관련해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한데요. 청소년들의 의견이 가장 궁금했던 챕터는요?
여섯 번째 챕터 제목이자 질문인 “유전자가위 기술로 원하는 모습으로 태어나는 세상, 좋지 않을까?” 이야기는 청소년들도 재밌어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이야기에 제대로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은 대표적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유전자공학 기술이 SF에서만 나오는 이미지라고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이미 외국에선 유전자 치료를 시행하고 있어요. ‘겸형 적혈구 빈혈증(편집자 주: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중 하나가 다르게 변이하여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변해 악성 빈혈을 유발하는 유전병)’이라는 질병을 예로 들어 볼게요. 이 빈혈증은 흑인 인종에게 많이 발생해요. 아프리카의 환경 때문인데요. 우리가 아프리카에 갈 때 가장 걸리기 쉬운 질병으로 말라리아가 있는데, 지역민들에게는 이 질환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산소 분자를 이동하고자 접시 모양처럼 생긴 적혈구가 찌그러져 있으면 말라리아 균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는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걸 의미해요. 그런데 미국으로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는 이 유전 요소가 불필요할 수 있어요. 실제로 최근 과학자들의 유전자 치료 주제 모임에서는 빈혈 때문에 힘들었던 자녀가 얼마나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어요. 자녀의 눈 색깔을 바꿔 주는 클리닉, XY유전자 무게를 측정함으로써 여아를 낳을지 남아를 낳을지 결정하는 시대가 온 거죠. 탄생에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에요. 이 기술을 활용한다면 누가 무엇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이야기해야 해요. 청소년들도 내가 유전자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받는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리 사회에 들여도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종교적 도그마를 떠나서 논의를 시작해 보자는 말이죠.
환자를 보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이 닮은 이유
“의학적 지식을 쥔 의료인을 따를 수밖에 없는 환자가 아니라 (중략) 전체 결정 구조에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환자”의 자질로 ‘건강정보 문해력’을 제안하셨죠. 이 문해력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쉽게 말하면 건강에 관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병원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건강정보 문해력입니다. 이 능력은 두 차원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하나는 환자 자신의 지식 또는 이해력입니다. 또 한 가지는 좀더 다른 것인데요.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병원에 가는 일, 돌봄, 아픔의 상황에 놓이곤 합니다. 보통 그런 상황이 자신과 가까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데, 생각보다 우리 삶은 많은 질병과 돌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반드시 의료에 관한 전문지식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투병기, 돌봄 주제를 다룬 이야기를 읽어 보는 것만으로 도움이 돼요. 사람들이 타인을 어떻게 돌보며, 이 돌봄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우리 삶은 그 돌봄에 의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의료지식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비단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일단 도움이 되기에, 의료를 바라보는 관점과 제안을 같이 넓혀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의료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의료지식을 알려 주는 책을 쓰고자 할 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쓰는 것을 고민하는 일도 중요해요. 사실 어렵습니다. (웃음) 쉽게 쓴다는 생각으로 장황하게 설명하다 보면 독자들이 책을 덮을 수 있거든요. 사람들이 의료윤리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일을 꾸준히 연구하다 보면 더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패터슨>의 모델이 된 시인이자 의사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의 사례가 인상깊었는데요. “시인이었기에 더 나은 진료를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윌리엄스의 글을 인용하셨는데, 어떤 맥락에서 그의 경험과 정신을 되새길 수 있을까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하면서 시를 썼던 분이에요. 삶의 단편적인 경험을 압축적인 시어들로 잘 살린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분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그가 이름난 명의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시인으로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진료 경험을 시나 에세이로 쓰기도 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살았던 지역에서 훌륭한 소아과 의사로서 주치의 역할을 다하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시어를 골라내고, 그것을 한 편의 이미지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려고 하는 노력과 질병 속에서 환자의 이야기를 찾아서 어떤 치료법이 적합한지 끌어내서 제시하는 노력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것과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행위는 다르지만 정서적 자원이나 능력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이 시인이었기에 좋은 의사일 수 있다고 했지만, 반대로도 말해 볼 수 있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굳이 한 사람의 고백으로 남겨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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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특히 의료인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서사의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료하면서 자신이 느꼈던 정서적 문제들을 쏟아내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의료계 사람들이 일하면서 ‘자기 소진’과 ‘고립감’을 호소하는 이유는 다이내믹한 의료 환경 때문이잖아요. 환자를 보는 것이 힘든데, 그걸 이야기할 데가 아무 곳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시를 읽으면서 다르면서도 비슷한 지점이 있는 의료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가령 어떤 작품을 보면서 진료했던 환자를 떠올리고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의료인이 만나는 환자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환자를 진료하는 것과 내 앞에 펼쳐진 소설을 읽는 능력은 같은 것이라고 봐요. 둘 다 우리 삶이자, 이야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