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 '어린이와 나란히 걷는 그림은 빛난다' 김동수 그림책 작가와의 만남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10-06 18:42 조회 1,636회 댓글 0건본문
스무 해 동안 정중히 동심을 그린 사람
『감기 걸린 날』 출간 20주년을 축하드려요. 이 책은 작가님의 첫 책이기에 그림책 세계에 입문하신 지 20주년으로 봐도 좋은 것 같은데요. 데뷔 첫해인 2002년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해 겨울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봄이 오고 4개월 동안 공모전 준비를 하는 틈틈이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용돈이라도 버는 취업 준비생의 마음으로 살았죠. 그러다가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에 작품을 냈고,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더러 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출판사 사무실에 갔더니 제가 공모전에 당선됐다고 하셨어요.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드리니 그냥 우리 아이가 ‘상을 받았나 보다’ 덤덤하게 축하해 주셨어요. 이후로도 쭉 그러셨고요. (웃음) 그림 그리는 일이 원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가끔은 취업을 권하시고 어떤 날에는 인정해 주기도 하셨어요. 지금은 그림책을 이런 소재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아이디어를 주시기도 해요. <월간 일러스트>의 애독자였는데,
그 잡지를 보면서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4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잡지에 실린 한국출판미술대전 공모전 공고를 보고 출품한 뒤 대상을 받았고, 이후로 ‘내가 이쪽으로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림 작업을 계속했어요. 그 무렵에 존 버닝햄의 그림책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샀어요. 그림책을 처음 샀던 날이라서 기억이 생생해요. 그림책의 대가로 불리는
작가의 작품들을 줄곧 봤지만 특별히 좋아했던 작가가 있진 않았어요. 여전히 <월간 일러스트>에 국내외 작가들
의 다양한 그림과 동향을 살피는 일이 즐거웠고, 여름에는 『감기 걸린 날』 수정 작업차 출판사 사무실을 들락
날락했어요. 그 사이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다가 늦가을이었던 11월에 제 첫 책이 나왔어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특별한 한 해를 맞이하셨는데, 올해 계획해 두신 이벤트나 소감이 궁금해요.
『감기 걸린 날』 본문 중에서
출판사에서 『감기 걸린 날』 20주년 리커버를 준비해 주셨는데 동네 책방과 알라딘, 예스24에서 판매할 예정이에요. 사실 저는 데뷔한 지 20주년이 되었지만 다른 작가들처럼 작업을 많이 하진 못했어요. 힘이 넘치는 젊은
시절에 작업을 좀 많이 해놓을 걸 후회가 들 때도 있고요. 매일 드로잉을 할 만큼 부지런한 편도 아닐뿐더러 가
끔은 두 달 넘게 아무것도 안 그릴 때도 있었어요. 제 작품은 대중적이기보다는 업계(?) 분들이 독자로 저를 많이 찾아 주시는 것 같아요. 그림책 분야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나 편집자, 평론을 쓰시거나 작품활동을 하시는들이 『감기 걸린 날』을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수는 아니지만 주로 마니아로 애독하시는 독자들을 종종 뵙곤 해요. 20주년이 되도록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 사람들 마음속에 이 책이 남아 있다
는 사실이 뿌듯해요. 제 그림책을 지금까지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어서 감사해요.
어린 시절을 곰곰 생각해 보면,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내가 왜 그걸 걱정했지?’ 싶을 때요. 제가 어릴 때 썼던 일 기장을 들여다보니, 친구한테 새 연필 한 자루를 빌려줬는데 그 친구가 되돌려주지 않아서 전전긍긍했었던 일화가 쓰여 있더라고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친구가 연필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안 갖고 올 것 같아 서 불안해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보면 사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거든요. 어린이의 세계에서는 그런 걱정들이 무수히 많아요. 어른들은 그 걱정들을 사소하다고 여기지만 어린이한테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예요. 그런 어린이의 마음을 생각하고 책머리에 걱정거리에 관해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소개글을 썼던 무렵이 공모 전을 준비했던 시기여서 항상 걱정하면서 지냈거든요. (웃음) 이번에 떨어지면 다음 해에 또 작품을 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불안하다.”라고 말하거나 “용기를 내자!”라고 말하는 말 풍선을 단 캐릭터를 그렸는데, 디자인 과정에서 그 그림들도 책머리에 들어갔어요.
첫 책을 냈을 당시, 오리털 파카를 입으며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셨지요. 어린 시절의 자신을 잘 소환하는 작가만의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책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오리털 파카를 제가 즐겨 입곤 했어요. 『감기 걸린 날』 주인공이 걸친 파카처럼 초록색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구상했던 건 아니고요. 대학교 때 실기실 옆자리에 앉았던 친한 친구가 수업 시간에 어떤 사물의 단면을 확대해서 그리는 과제에 오리털 파카 단면을 그려서 갖고 온 적 있어요. 저는 당시 돈가스의 단면을 확대해서 그렸고요. (웃음) 공모전 준비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친구의 오리털 파카 단면 그림이 떠올랐고, 어린이가 꿈속에서 추운 곳에 사는 오리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싶었죠. 그 무렵에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어린이들의 심리에 관해 설명한 책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았던 대목이 있어서 구상한 계획과 연결해 그렸어요.
가령 어른들은 몸에 종기가 나면 몸이 아파서 생긴 거라고 여기는데, 어린이들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벌 받아서 이렇게 됐나?’ 하고 생각하기도 한대요. 『감기 걸린 날』에서도 어린이가 이불을 덮지 않아서 자신이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 오리들에게 옷 속에 든 깃털을 모두 주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요. “…내 옷에서 깃털 하나가 빠져나온 거다. 분명히 오리들한테 다 주었는데…….” 주인공이 자신이 꾼 꿈을 현실로 여기는 것처럼, 환상이나 상상을 진짜라고 생각하는 어린이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린이들의 감정과 마음을 자연스레 담고 싶었죠.
『감기 걸린 날』,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잘 가, 안녕』 등 작가님이 그린 그림책을 보면 오리가 자주 등장해요. 각별히 애정하시는 이유는요?
작가의 작업실 벽면에 붙은 메모지. 김지은 평론가의 문장을 옮겨 쓴 것이라고 한다.
분당 오리역 근처에 산 적이 있어요. 근방에 탄천이 있었는데 산책을 가곤 했어요. 물밖으로 쏙 나오는 오리, 잠수하는 오리 등 갖가지 오리를 볼 수 있었죠. 흰뺨검둥오리, 집오리뿐 아니라 쇠백로, 왜가리, 가마우지 등 다양
한 철새도 많았는데 유독 오리들을 보는 게 정겨웠는지 그림책에 많이 그렸던 것 같아요. 제 그림책에 동물이 자주 나와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 있냐고 묻는 독자들도 있는데, 저는 사실 동물을 키워본 적 없어요. 강아지나
고양이를 예뻐하긴 하지만 경험이 워낙 없다 보니 루시드폴 작가님과 『문수의 비밀』을 작업할 때도 걱정이 좀 들었어요. 문수라는 반려동물과 인간의 소소한 일상을 표현해야 하는 책이었기에, 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제가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 조심스러웠거든요. 하지만 루시드 폴 작가님의 노래가사가 워낙 귀여웠고 뮤지션의 노래를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드는 기획이 신선해서 그림 작업을 같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문수의 비밀> 노래
가사 마지막 대목 “하지만 여자친구 생길 때까지”의 ‘여자친구’가 강아지 문수의 여자친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빠(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간)의 여자친구를 뜻하는 건지 아리송했는데, 편집자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면서
나름 즐겁게 작업했어요.
조각들을 모아 완성한 장면에서
온기가 돌고
두 번째 작품인 『천하무적 동력기』는 엄마를 기다리며 고무동력기를 만드는 어린이의 이야기예요. 그림책 문법 면에서 여러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어떻게 기획하셨나요?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본문 중에서
중학교 시절에 고무동력기 대회에 많이 나갔었어요. (웃음) 교내 대회에서 시작했다가 시도 대회까지 출전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요. 지금은 만드는 방법을 다 까먹었지만, 대학 시절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네 컷 그림을 그려서 출품했었어요. 『감기 걸린 날』을 내고 난 다음에 출판사 편집부에서 미술대전에 출품했던 작품을 궁금해하셨는데,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같이해 보자고 하셔서 작업을 시작했어요. 실제로 『천하무적 고무동력기』에 공모전에 냈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장면을 담기도 했고요. 두 번째 작품은 제 첫 작품을 심사하셨던 박혜준 선생님과 조율해 가면서 작업을 진행했어요. 화선지 위에 물감과 먹물로 작업하고 컴퓨터로 재조합하면서 완성했지요.
첫 책 『감기 걸린 날』을 작업할 때부터 화선지에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서양화과를 졸업했지만 동양화 수업도 많이 들었거든요. 그때 사놓은 화선지가 많았는데, 졸업하고 나서도 갖고 있었고 『학교 가는 날』에서도 같은 재료로 작업했어요. 『학교 가는 날』은 1960년대 어린이 구동준과 2000년대 요즘 어린이 김지윤의 초등학교 입학기를 교차하며 담아낸 그림책으로, 송언 작가와 함께 공동 작업으로 만든 책이에요. 본문이 대조를 이루는 구성이었고, 시대를 대표하는 사실적인 오브제들도 보여 줘야 해서 이전 작업들보다 채도를 높여 작업해야 했어요. 하지만 화선지가 워낙 얇다 보니 한 장면 안에 그려야 할 것들을 색연필로 꾹꾹 눌러 진하게 채색하다 보면 쉽게 찢어지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안 찢어지게 그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팔절지에 화선지를 붙인 뒤 배경을 그리고, 그 위에 다른 화선지에 그린 사람이나 사물 등을 종이인형처럼 오려서 붙이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학교 가는 길』에 그려진 명찰, 인형, 화분, 가구, 벽, 문, 사람 들 모두 따로따로 그려서 각각 위치에 맞게 덧붙여서 작업했어요. 그 그림들 낱장을 하나하나 모아서 장면들을 완성해 갔죠. 기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거창할 수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이 개별 오브제들을 붙여서 완성한 표현방식과 잘 어우러져서 다음 책에도 그 방식을 계속 고수했어요. 북토크를 하다 보면 제 그림책의 장면들이 낱장 그림들이 모인 한 장들이라는 사실을 신기해 하시는 독자들이 많더라고요. 동물의 상처를 꿰매주는 할머니가 나오는 『잘 가, 안녕』도 같은 방식으로 그렸어요.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영혼을 달래는 그림책 『잘 가, 안녕』은 죽은 동물의 흔적을 여과없이 드러낸 점이 신선하다는 평이 많았는데요. 사전 자료조사를 할 때 힘드시진 않았나요?
목숨을 잃은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했기에 사진 수집을 많이 했어요. 주로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특히 고양이나 강아지가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많이 맞닥뜨렸어요. 고라니 같은 동물들은 덩치가 크니까 사람들이 도로 옆으로 많이 옮겨놓는 편에 속했어요. 반면 작은 동물들은 죽은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그냥 밟고 지나가더라고요. 작업 초반에 그런 이미지들을 수집할 때 제가 임신 중이었어요. 어쩌다 그 시기에 죽은 동물을 주제로 한
그림책을 그리게 됐을까 싶었지만, 안 할 수 없었고 힘들었지만 잔인한 장면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잘 견디는 편
이어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출산 일 년 후에 작업을 다시 시작했고, 아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완성된 그림을 보여 주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아픈 동물을 치료해 주는 거야?”, “엄마, 얘는 어디가 아픈 거
야?” 생각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어린이들은 제가 그린 동물들의 모습을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친구의 딸은 본문에 나오는 할머니 대사를 다 외우고 “잠깐 쉬렴.”,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성우처럼 읽어
가며 즐거워했어요. 어떤 어린이들은 『잘 가, 안녕』에 나오는 동물들이 자고 있거나 회복 중이라고 여기더라고요. 할머니가 다 나을 수 있도록 동물들을 치료해 준다고요.
전반적인 분위기는 돌봄의 느낌을 담고 있지만, 특정 장면의 묘사가 잔인하다는 독자의 의견도 들어셨을 것 같아요.
『잘 가, 안녕』 본문 중에서
어느 작가 분도 그러시더라고요. 굳이 강아지 장기가 노출된 이미지를 왜 그리고 싶었는지 말이에요. 기분 나쁘 게 물은 게 아니라, 그분이 수위 센 이미지를 못 견디셨던 거예요. 부산지역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아동·청소년 문학의 경계’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연 적 있는데, 제가 그곳 세미나에 초대를 받았었어요. 『잘 가, 안녕』이 ‘경계(어린이를 눈높이로 한 작품이 으레 보여 주는 이미지에 관해 적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를 넘나드는 작품이라고 여기 셨던 것 같아요. ‘경계’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묻는 자리에서 저는 독자들이 제가 그린 책의 장면들을 끔찍하게 여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렸다고 답했어요. 경계를 넘어선 작품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거든요. 뿐더러 지렁이, 매미, 벌, 무당벌레 같은 곤충의 죽음들도 우리 도처에 널려 있잖아요. 평상시에 그렇게 접할 수 있는 생명들의 죽음은 제가 『잘 가, 안녕』에 표현한 동물들의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장기가 노출된 큰 동물의 죽음은 끔찍하고, 어린이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의 죽음은 처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옳다곤 볼 수 없어요. 저는 길 위에 방치된 동물들에게 누군가가 염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잘 가, 안녕』을 그렸어요. “자동차들이 지날 때마다 점점 더 납작해지고 여기저기 찢기고 도로 위에서 나뒹굴다가 흩어져 버리는” 모습들을 모아 입체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주고 싶었죠.
떠오르는 아침해의 마음으로
오늘도 그린다
『할머니 집에서』, 『수박씨』 등 어린이책에 다양한 삽화 작업을 하셨어요. 글 작가의 어떤 지점을 중요하게 여기시나요?
“어른들은 사소하다고 여기는 걱정거리가 어린이에겐 진지하고 중요
한 문제일 수 있어요.”
선호하는 글 작가의 글이 있다기보다는 제가 잘 표현 할 수 없는 글은 지양하는 편이에요. 그릴 요소가 많은 이야기는 소화하기 힘들더라고요. 한복을 입은 사 람들을 군중으로 표현하는 옛이야기물이나 전래동화 처럼 고증해야 하는 역사물도 저와 잘 맞지 않아요. 예전에 입시미술을 할 때 정물화를 그려야 하는데, 반드시 오브제를 몇 가지 이상 그려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어 요. 그 기준을 맞추는 일이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린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사물들이 대부분 따로 떨어져 있어요. 어쩔 수 없을 때만 서로 겹쳐 있죠. 제 그림이 담백하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은데, 제가 절제해서 그리기보다는 제 성향이 사물을 많이 못 그려서 담백하게 느끼시는 걸 거예요. 그래서 글 작가의 특정 가치관을 주목하기보다 제가 잘 그릴 수 없는 것은 그릴 수 없다고 말하는 편입니다. (웃음) 단, 저는 아이디어가 있는 작품들을 좋아해요. 제가 그림 작업을 했던 작품들이 가치관이 확 드러나는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문수의 비밀』의 경우 노랫말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 시리즈라는 기획력이 돋보였거든요. 『학교 가는 길』도 1960년대와 2000년대의 그림일기를 동시에 보여 주는 설정이 기발하고 의미 있어서 작업을 시작했죠. 기획의 신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수신지는 작가님을 가리켜 "믿고 사는 작가,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드는 작가"라고 칼럽에서 밝힌 바 있어요. 작가님께도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사물이나 '영원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을까요?
『감기 걸린 날』에 나오는 단발머리 캐릭터는 이름은 없지만 제 방에 비즈모빌로 걸어둘 만큼 애정해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출판사에서 그림책 작가들이 독자에게 보내는 카드 이미지 작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자연 스럽게 제 첫 책의 주인공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첫 책의 단발머리 주인공은 앞으로도 계속 그리게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천하무적 고무동력기』에 나오는 물귀신 캐릭터를 바탕으로 책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작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나왔는데, 물귀신이 어린이의 불안감, 걱정 같은 것을 형상화해서 나온 이미지거든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물귀신 이미지를 가끔 올렸는데, 출판사에게 연락이 와서 염두에 둔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생각해 둔 이야기를 바탕으로 차기작을 그리는 중인데, 지금은 구상 단계예요. 물귀신 캐릭터도 제 영원의 이미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문수의 비밀』에 나오는 강아지 문수도 사랑스럽고요. 제가 만든 그림책 속 모든 캐릭터가 제가 품고 갈 이미지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