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교사 책으로 말걸기]이제는 어리광도 부리고 싶은 효정이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9-05 20:55 조회 6,328회 댓글 0건본문
봄이 되면 반가운 꽃이 있다. 무척이나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풀인 줄만 아는 ‘꽃마리’라는 들꽃이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어있는데도 말이다. 매년 봄이 되면 몇몇 사람들에게 이 꽃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꽃 속에 숨어 있는 하늘빛과 노란색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효정이도 마찬가지였다.
“와! 정말 예쁘네요. 선생님은 이 꽃을 어찌 알았어요?”
“처음에는 도감에서 봤어. 색이 너무도 곱기에 찾아왔더니 정말 흔하더라고…”
효정이는 항상 내가 제일 바쁠 때 불쑥불쑥 나타나서 심심하다며 징징거리는 중학교 3학년 여자 아이이다.
“선생님, 이것만 하고 놀자.”
집에서 5살짜리 딸에게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효정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일을 끝내고 효정이를 찾으면 항상 없다. 내 딸이 그렇듯 말이다.
그 외에도 효정이는 딸아이와 비슷한 것이 많다. 말없이 내 옆에 앉아서 모두 다 아는 5교시 시작 시간을 물어보기도 하고, 뜬금없이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냥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효정이가 언제부터 내 옆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교육복지실 오는데 따라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내게 여러 이야기를 막 털어놓고 가면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치기 5분 전 쯤에야 효정이는 급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연희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제 이름은 아세요?”
“저, 고등학교 어디 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컴퓨터만 쳐다보며 일하는 것이 미안해서 효정이와 블럭빼기 놀이를 하자고 했다. 둘이 시작하니 다른 아이들도 모여들어 단체전이 되었다.
평소에 얌전한 편이었던 효정이는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웃고, 화를 내었다. 평소 효정이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도 효정이의 이런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울리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효정이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는 내일도 같이 놀자고 하며 교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다음날도 여전히 나는 바빴다. 급하게 보고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점심을 먹은 아이들은 이미 블럭빼기 놀이를 시작했지만 효정이는 그곳에 가지 않고 내 곁에 있었다.
“선생님, 심심해요!”
단 5분이라도 효정이랑 눈 마주치고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효정아!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아니요, 심심해서요.”
“혹시 너 남동생 있니?”
이렇게 효정이와 시끄러운 점심시간 교육복지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아주 가까이에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어른스러운 효정이는 내 짐작대로 남동생이 있는 첫째 딸이었다. 5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나던 때를 기억한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특히 남동생이 태어났다고 좋아하셨는데 지금도 같이 할아버지 댁에 가면 같이 인사를 해도 효정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동생 인사만 손을 잡고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는 항상 “효정이는 항상 알아서 잘 하니까”라는 말을 들으면서 한 번도 부모님께 걱정시켜드리지 않는 딸이었다. 부모님 걱정하실까봐 자기 고민 같은 것은 이야기해 본 적도 없다. 요즘 들어 가장 큰 고민은 진정한 친구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이들과도 두루 다 친하긴 한데 정작 친한 아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네가 말하는 진정한 친구가 너 아니면 안 되는 친구를 말하는 거니?”
효정이의 눈에 눈물이 잠깐 고였다.
“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제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냥 전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은 아이 같아요.”
효정이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에게2』를 가리켰다.
“저, 저런 책 좋아해요. 우리 아빠가 자기계발서 같은 것을 많이 읽으래요. 얼마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런 책을 왜 ‘자기계발서’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효정이와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좋을 것 같아서 『대한민국 청소년에게2』를 읽고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효정이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저자들이 청소년을 위해서 쓴 글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3일 후 효정이는 책을 들고 왔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아빠가 읽는 책을 보시더니 좋은 책 읽는다고 칭찬도 들었다며 들떠서 이야기했다. 아버지와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냐고 했더니 그냥 그 이야기뿐이었다며 금방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다지 재미있게 읽을 내용은 아닌데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 궁금해서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지만 사실 너무 강하게 비판하다보면 중학생 밖에 되지 않은 효정이가 대한민국에 대한 거부감(?)이 들까 하는 걱정이 살짝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아빠가요, 항상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시면 우리나라에 대해 뭐라고 하세요. 이 책을 읽으니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니?”
“네, 아빠가 돈 있으면 외국 가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저도 우리나라가 싫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좀 생각이 달라. 이렇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만큼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학교에서 체벌도 없어지고, 이렇게 학교에 교육복지실도 생기고…”
“그러네요. 선생님, 또 이런 책 빌려주세요. 선생님께서 재미있게 읽으신 책으로요.”
다음 책으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 재미있게 읽은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였다. 효정이는 이 책을 일주일 만에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아빠 이야기를 했다. 주말에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청년 실업에 대한 뉴스가 나와서 이 책에서 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빠가 “우리 딸 많이 컸네.”라며 웃으셨다고 한다. 효정이는 이 책들이 좋았다기보다는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동생이 태어나고 그 뒤로 항상 누나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어리광은 다섯 살에서 멈추었다. 효정이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누나 좀 봐라. 얼마나 의젓하니?”라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손이 안 가는 착한 아이’가 되느라고 ‘어리광 많은 귀여운 여자 아이’를 포기한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들을 효정이와 같이 읽으며 미래의 효정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공부를 잘해도 불안한 시대에 건강한 대한민국 시민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보다는 나 자신이 즐거워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좀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하여 노력해 보기로 하였다. 나 역시 효정이와 눈을 마주치고 놀아주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워낙 작아서 보이지 않는 꽃마리처럼 효정이는 신경 써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예쁜 아이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 좋은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