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메시아 콤플렉스와 퍼펙트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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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8-04 16:34 조회 6,965회 댓글 0건본문
왜 선생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려 하세요?
젊은 여선생님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봄이 깊어질 무렵부터 시작한 담임반 여학생 서연이와의 힘겨운 줄다리기는 여름 건너고 가을 다가올 즈음에야 매듭을 짓게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한 번, 모두들 떠나간 학교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한 중학교 1학년 서연이는 첫 담임을 맡은 박선생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아픈 짐이었다. 박선생님은 서연이와 부모님과 때론 동료가 되고, 가끔은 적이 되기도 하는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왕따에 시달리는 서연이를 돌보았고 덕분에 서연이는 한 고비를 간신히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박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박선생님을 바라보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뭔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박선생님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그마하게 혼자 욕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거친 욕을 자그마하게 소리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박선생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그리고 점점 크게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박선생님이 했던 말을 조금 더 큰 소리로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상담실은 두 사람이 내지르는 욕설과 흘리는 눈물로 한가득 채워졌다.
“선생님, 충분히 잘했어요. 거기까지가 선생님 몫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제 마음 몰라준 사람들에게 욕을 해서 후련하긴 한데요. 눈물을 흘린덕분에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시긴 했는데요. 정말 서연이 괜찮을까요?”
“선생님. 선생님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저는 화가 나네요. 서연이가 미워지기도 하구요. 왜 선생님이 서연이 때문에 힘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꼭 선생님이 서연이의 모든 것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옥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은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서연이에게 잘했어요. 왜 본인이 메시아가 되어서 모든 힘겨움을 해결해주려고 하세요?”
“그래도 저는 선생이잖아요. 제자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선생이잖아요. 그래서 괴로워요. 서연이가 미국에 가는것이 옳은 방법인지 모르겠어요. 꼭 제가 그 아이를 이 땅에서 내쫓는 것 같아서요. 내가 해결하지 못하니까 남에게 그냥 책임을 떠맡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힘들어요.”
나는 가만히 박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줄 단 한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에요. 외로웠죠. 내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그 힘겨움. 내 앞길을 누군가 조금만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갖고 살아갈 때가 있었어요. 어쩌면 박선생님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박선생님은 무엇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아마 그래서 서연이에게 그렇게 집착했나봐요.”
“선생님은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서연이에게 잘 전해주셨네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에요.”
“아니에요. 저는 서연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어요.”
“해결해주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몇 달 동안 서연이가 힘들 때 함께 계셔주셨잖아요. 그건 서연이 부모님도 감사하는 부분이고, 우리 동료교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잖아요. 박선생님, 교사는 제자를 보듬어안기도 해야 하지만 때론 떠나보내면서 바라보는 아픔도 겪어야 해요. 바라보는 아픔과 만날 때 교사의 길이 시작되는 거예요. 완벽하게 제자의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교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서연이가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서 정말 힘들 때 박선생님을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서연이에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지 못해도 해결할 힘은 줄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나는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박선생님. 이제 그동안 잊으셨던 박선생님 자신을 돌보는 시간 좀 가지세요. 늘 크게 웃는 웃음소리도 주변에 좀 들려주시구요. 그리고 귀에 거슬리더라도 이 말은 참고해주세요. 서연이 말고 같은 반 다른 아이들도 다독거려주세요. 그놈들 그동안 서연이에게 자기 담임선생님 빼앗겨서 무척 속이 상해 있을 거예요. 그래도 그동안 별 내색하지 않았잖아요. 참 대견한 놈들이에요. 사고도 한 번 안 쳤잖아요. 그 친구들 한 번 더 안아주세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면서 박선생님과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그리고 다음날. 서연이 어머니께서 박선생님과 함께 상담실로 오셨다. 미국으로 갈 수속을 다 마치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서연이 어머니의 얼굴도 박선생님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서연이 때문에 그동안 다니던 직장도 정리했습니다. 정말 놓기 싫었던 직장이지만 그래도 자식이 더 중요하니 어쩔 수 없죠. 미국에 가면 한 일 년 정도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어학연수도 받고, 학원 서너 곳을 다니면서 서연이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게 만들려구요. 미국에서도 왕따를 당하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애가 몸이 약한 것 같아서 운동도 좀 배우게 하려구요. 그렇게 일 년 동안 자신에게 투자하면 서연이도 자신감이 붙고 그럴 것 같아요.”
나는 눈이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화가 난 사람처럼 뾰로통해진 박선생님 얼굴을 보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 서연이 어머니는 내가 자신의 의견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미국에서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조용히 앉아있는 서연이 앞에 빨간 종이, 파란 종이, 노란 종이를 보여주고 말했다.
“서연아. 미국 가는 게 좋으면 빨간 종이, 싫으면 파란 종이, 중간이면 노란 종이를 집어볼래?”
잠시 망설이던 서연이는 노란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렇구나.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게 좋지도 싫지도 않구나. 자, 그럼 이번에는 미국에 가는 것이 좋은 이유를 말할 수 있으면 빨간 종이를, 잘 모르겠으면 파란종이를 집어볼까?”
역시 망설이던 서연이는 빨간 종이를 집어들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니?”
“엄마랑 같이 가서요.”
“아! 그래. 엄마가 같이 미국에 가니까 서연이가 좋은 거구나.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미국에 가는 게 싫은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빨간 종이를, 잘 모르겠으면 파란 종이를 집어볼까?”
얼굴을 찡그리며 꽤 오랜 시간 망설이던 서연이는 파란 종이를 집었다.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것이 왜 싫은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운가 보구나. 그럼 선생님이 물어볼게. 혹시 친구들이 보고 싶어질까봐 그러니?”
서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엄마 때문이니?”
가만히 있던 서연이가 엄마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저 때문에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시게 되어서 많이 죄송해요.”
서연이의 마음에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서연이 엄마는 서연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다시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서연아. 서연이 마음이 참 곱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직도 뭐가 좀 부족하게 느껴지네. 서연이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 방금 서연이가 한 말은 엄마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고, 서연이가 미국에 가기 싫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말씀처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한데요. 그것 말고 또 있는 것 같은데요.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침묵하고 있던 박선생님이 말을 꺼냈다.
“미국에 가서도 한국하고 똑같이 학원 다니고, 집 밖에서 시간 보내야 하니까 겁이 나는 것 아닐까?”
박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서연이 어머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연이 어머니. 박선생님과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서연이가 정확하게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머니께서는 서연이 마음을 잘 보셨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것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서연이’를 위해서 미국에 가기보다는 ‘서연이의 앞날’을 위해서 미국에 가시려고 한다고 서연이는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연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엄마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고 엄마도 자신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연이 어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 박선생님께도 어제 비슷한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머니는 충분히 엄마로서 잘하고 계십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신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엄마로 저는 보이거든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부모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미국에 가셔서 처음 얼마 동안 특별한 프로그램 갖지 마시고 그냥 서연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못 나눴던 모녀간의 정을 깊게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네요.”
나는 서연이에게 선물로 안데르센이 지은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선물하며 이별 인사를 나눴다. 그 책에 나는 이렇게 썼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리는 오리라서 행복하고 백조는 백조라서 행복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도 세상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젊은 여선생님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봄이 깊어질 무렵부터 시작한 담임반 여학생 서연이와의 힘겨운 줄다리기는 여름 건너고 가을 다가올 즈음에야 매듭을 짓게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한 번, 모두들 떠나간 학교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한 중학교 1학년 서연이는 첫 담임을 맡은 박선생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아픈 짐이었다. 박선생님은 서연이와 부모님과 때론 동료가 되고, 가끔은 적이 되기도 하는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왕따에 시달리는 서연이를 돌보았고 덕분에 서연이는 한 고비를 간신히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박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박선생님을 바라보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뭔가 아쉬운 것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박선생님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그마하게 혼자 욕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거친 욕을 자그마하게 소리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박선생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그리고 점점 크게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박선생님이 했던 말을 조금 더 큰 소리로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상담실은 두 사람이 내지르는 욕설과 흘리는 눈물로 한가득 채워졌다.
“선생님, 충분히 잘했어요. 거기까지가 선생님 몫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제 마음 몰라준 사람들에게 욕을 해서 후련하긴 한데요. 눈물을 흘린덕분에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시긴 했는데요. 정말 서연이 괜찮을까요?”
“선생님. 선생님이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저는 화가 나네요. 서연이가 미워지기도 하구요. 왜 선생님이 서연이 때문에 힘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꼭 선생님이 서연이의 모든 것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옥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은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서연이에게 잘했어요. 왜 본인이 메시아가 되어서 모든 힘겨움을 해결해주려고 하세요?”
“그래도 저는 선생이잖아요. 제자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선생이잖아요. 그래서 괴로워요. 서연이가 미국에 가는것이 옳은 방법인지 모르겠어요. 꼭 제가 그 아이를 이 땅에서 내쫓는 것 같아서요. 내가 해결하지 못하니까 남에게 그냥 책임을 떠맡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힘들어요.”
나는 가만히 박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줄 단 한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에요. 외로웠죠. 내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그 힘겨움. 내 앞길을 누군가 조금만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갖고 살아갈 때가 있었어요. 어쩌면 박선생님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박선생님은 무엇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아마 그래서 서연이에게 그렇게 집착했나봐요.”
“선생님은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서연이에게 잘 전해주셨네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에요.”
“아니에요. 저는 서연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어요.”
“해결해주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몇 달 동안 서연이가 힘들 때 함께 계셔주셨잖아요. 그건 서연이 부모님도 감사하는 부분이고, 우리 동료교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잖아요. 박선생님, 교사는 제자를 보듬어안기도 해야 하지만 때론 떠나보내면서 바라보는 아픔도 겪어야 해요. 바라보는 아픔과 만날 때 교사의 길이 시작되는 거예요. 완벽하게 제자의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교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서연이가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서 정말 힘들 때 박선생님을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서연이에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지 못해도 해결할 힘은 줄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나는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박선생님. 이제 그동안 잊으셨던 박선생님 자신을 돌보는 시간 좀 가지세요. 늘 크게 웃는 웃음소리도 주변에 좀 들려주시구요. 그리고 귀에 거슬리더라도 이 말은 참고해주세요. 서연이 말고 같은 반 다른 아이들도 다독거려주세요. 그놈들 그동안 서연이에게 자기 담임선생님 빼앗겨서 무척 속이 상해 있을 거예요. 그래도 그동안 별 내색하지 않았잖아요. 참 대견한 놈들이에요. 사고도 한 번 안 쳤잖아요. 그 친구들 한 번 더 안아주세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면서 박선생님과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그리고 다음날. 서연이 어머니께서 박선생님과 함께 상담실로 오셨다. 미국으로 갈 수속을 다 마치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서연이 어머니의 얼굴도 박선생님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서연이 때문에 그동안 다니던 직장도 정리했습니다. 정말 놓기 싫었던 직장이지만 그래도 자식이 더 중요하니 어쩔 수 없죠. 미국에 가면 한 일 년 정도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어학연수도 받고, 학원 서너 곳을 다니면서 서연이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게 만들려구요. 미국에서도 왕따를 당하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애가 몸이 약한 것 같아서 운동도 좀 배우게 하려구요. 그렇게 일 년 동안 자신에게 투자하면 서연이도 자신감이 붙고 그럴 것 같아요.”
나는 눈이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화가 난 사람처럼 뾰로통해진 박선생님 얼굴을 보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 서연이 어머니는 내가 자신의 의견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미국에서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조용히 앉아있는 서연이 앞에 빨간 종이, 파란 종이, 노란 종이를 보여주고 말했다.
“서연아. 미국 가는 게 좋으면 빨간 종이, 싫으면 파란 종이, 중간이면 노란 종이를 집어볼래?”
잠시 망설이던 서연이는 노란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렇구나.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게 좋지도 싫지도 않구나. 자, 그럼 이번에는 미국에 가는 것이 좋은 이유를 말할 수 있으면 빨간 종이를, 잘 모르겠으면 파란종이를 집어볼까?”
역시 망설이던 서연이는 빨간 종이를 집어들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니?”
“엄마랑 같이 가서요.”
“아! 그래. 엄마가 같이 미국에 가니까 서연이가 좋은 거구나.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미국에 가는 게 싫은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빨간 종이를, 잘 모르겠으면 파란 종이를 집어볼까?”
얼굴을 찡그리며 꽤 오랜 시간 망설이던 서연이는 파란 종이를 집었다.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것이 왜 싫은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운가 보구나. 그럼 선생님이 물어볼게. 혹시 친구들이 보고 싶어질까봐 그러니?”
서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엄마 때문이니?”
가만히 있던 서연이가 엄마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저 때문에 좋아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시게 되어서 많이 죄송해요.”
서연이의 마음에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서연이 엄마는 서연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다시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서연아. 서연이 마음이 참 곱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직도 뭐가 좀 부족하게 느껴지네. 서연이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 방금 서연이가 한 말은 엄마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고, 서연이가 미국에 가기 싫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말씀처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한데요. 그것 말고 또 있는 것 같은데요.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침묵하고 있던 박선생님이 말을 꺼냈다.
“미국에 가서도 한국하고 똑같이 학원 다니고, 집 밖에서 시간 보내야 하니까 겁이 나는 것 아닐까?”
박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서연이 어머니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서연이 어머니. 박선생님과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서연이가 정확하게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머니께서는 서연이 마음을 잘 보셨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서연이는 미국에 가는 것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서연이’를 위해서 미국에 가기보다는 ‘서연이의 앞날’을 위해서 미국에 가시려고 한다고 서연이는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연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엄마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고 엄마도 자신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연이 어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 박선생님께도 어제 비슷한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머니는 충분히 엄마로서 잘하고 계십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신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엄마로 저는 보이거든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부모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미국에 가셔서 처음 얼마 동안 특별한 프로그램 갖지 마시고 그냥 서연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못 나눴던 모녀간의 정을 깊게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네요.”
나는 서연이에게 선물로 안데르센이 지은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선물하며 이별 인사를 나눴다. 그 책에 나는 이렇게 썼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리는 오리라서 행복하고 백조는 백조라서 행복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도 세상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