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봄날, 물방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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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8-04 16:19 조회 6,037회 댓글 0건본문
우리들 물방울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
봄밤 벚나무 아래를 지난다. 꽃망울이 탱탱하게 부풀어 있는 사월 초, 어제부터 시작한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쌩쌩하다. 봄에 유달리 비바람이 잦은 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자연의 산통이란다. 바람 속에서 더욱 팽팽한 꽃망울의 긴장감과 기대감 속으로 내 마음이 스며든다. 절로 미소가 번진다. 찬바람도 상쾌하다. 이 정도 바람쯤이야, 며칠만 기다려, 축포처럼 꽃잎을 터뜨려 줄게, 어디서 이런 말도 들린다. 이렇게 부풀어 오른 꽃가지 아래를 지나면 누구나 함께 마음이 부풀 것이다. 성인들이 가닿은 ‘온 우주가 통째로 하나(萬法歸一, 萬物一華)’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날 이 정도의 교감은 범부에게도 가능하다.
내게 종종 교감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작은 사물은 보도블록 사이로 뾰족뾰족 돋은 풀들이다. 이 녀석들은 오래 사귄 꼬맹이 친구 같아 살짝 볼을 만져 주고 싶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지천이던 질경이 비름나물 온갖 이름의 풀들, 대문가의 사과 배 호두나무,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닭과 오리와 우리 속에서 꿀꿀거리던 돼지들, 그들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동생과 동무들 못지않게 내 세계를 채워주던 존재들이었다. 그때는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살았다.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나는 둥지 속의 알처럼 포근하게 담겨 있었다. 아직 ‘나’만의 자의식 속으로 분리되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는 빈틈없이 충만하고 빛났다.
그 행복한 유년기가 끝날 즈음 우리 집은 도시로 이사를 했고 낯선 세계 속에서 ‘나’는 분리되었다. 이것저것 생각이 늘고 자기 세계가 강해진다는 것은 달리 보면 견고하게 자의식(에고)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도 했으나 만족감은 짧았고, 늘 무언가 빠져 있는 느낌, 어딘가 꼭 가닿아야 할 곳이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뒤늦게 성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실재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바다와 같은데, 우리는 에고에갇혀 외떨어진 한 개 물방울인 듯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소용이 없다. 여전히 나는 바닷속에서도 바다를 실감하지 못하는 물방울인 것이다. 전일全一적 세계였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나온 뒤의 내 인생은 결국 그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긴 여정이다. 물방울이 본래의 바다와 합일하는 것, 그것이 참된 의미의 자아실현이다. 그 본래 세계를 인류의 큰 스승들은 부처님, 하느님, 한울, 브라만, 아트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의 미망迷妄은 너무 깊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미망에서 깨어나 본래 존재가 되는 것, 이른바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공부는 책과 문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대부분 공부를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국어선생,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공부의 본래적인 목적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어 한다.
생업과 관련한 진로 못지않게 학생들이 인생의 참된 의미를 궁구하고 자아실현을 이루도록 돕는 일, 그것은 교사의 자아실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등학교에서 공부란 모두 입시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녹여버리는 이 나라에서 진리며 자아실현이란 몽상으로 보인다. 입시와 타협하지 않고는 아예 공부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시의 울타리를 넘는 공부를 즐거워하는 아이들도 적진 않지만, 입시에만 관심을 보이거나 입시든 뭐든 공부라면 지긋지긋해 하는 아이들 또한 만만찮은 비율이다. 할 수 없지, 들을 놈만 들어라. 한 명의 가슴에라도 씨앗을 뿌릴 수 있으면 좋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고 하늘이라는데 왜 누구는 가능하고 누구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누구는 끌어안고 누구는 소외시켜야 하는가. 꽃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르듯이 아이들의 마음밭도 싹틀 시절이 다른 것이지, 아예 씨앗을 품지도 못할 불모지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도 99%가 같다는데, 같은 인간들끼리야 아무리 달라 보여도 동질성이 더 많지 않겠나. 그래야 성인들의 가르침이 진실인 것이다. 뜻밖의 병으로 일 년 휴직을 한 뒤 올해 삼월에 복직한 나의 화두는 이것이다. 문자 공부로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고 어떤 아이도 소외시키지 말자.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모든 인간이 가진 온전한 본성을 실현해 가도록 아이들을 돕자. 이것은 또한 내 자아실현의 길이다.
우리 물방울들은 그렇게 바다로 흘러가지
화요일 3교시 3학년 6반 작문 수업(정직하게 말하면 언어영역 문제풀이 시간). 아이들은 앞 시간에 체육을 했다. 이 반 녀석들은 평소에도 통제가 어려운데 바깥바람까지 쐬고 오니 풍선처럼 둥둥 떠 있다. 앉아라, 책 펴라, 오 분이 훌쩍 지나서야 조금 교실이 정돈된다. 그래도 여전히 창가의 아이들은 밖으로 향한 눈을 떼지 못한다. 바깥에는 다른 반이 축구를 하고 있고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던 하늘이 개면서 햇빛이 비친다. 빗속에서 공을 차다 온 아이들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늘을 아쉬운 듯 바라본다. 머리를 억지로 끌어다 책을 보게 해도 맨 뒷자리 민수는 끝내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와~ 구름 봐라, 진짜 예쁘다. 사귀고 싶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이번 시간 EBS 수능 특강 문제집 속에 끌어다 넣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 구름이랑 사귀어봐라. 학창 시절, 몸만 교실에 두고 종종 영혼을 가출시켰던 나는 더 채근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시간엔 구름이 네 선생이다. 푸른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여유까지는 못 주어도 창을 내다볼 자유를 가끔은 주마. 예전에 없던 관용이다.
그런데 다음 날 예의 6반 아이들 태도가 더욱 가관이다. 잡담, 엎어져 자기, 엉뚱한 소리로 수업의 맥 끊기… 수업 중에 자꾸 잔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종 치고 난 뒤 농땡이 놈들을 불러 훈계하는데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문제를 풀었던 모범생 지훈이가 끼어든다. 저런 애들은 쫓아내 버리지요. 선생님이 가만두니까 애들이 자꾸 더하잖아요.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 하겠어요. 선생님 수업하러 들어오신 것 맞아요? (헉!) 친구들에 대한 짜증이 나에게 날아왔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교사에 대한 원망이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대로 이끌어주되, 이런 문제풀이 훈련을 별 필요도 없는 애들에게까지 윽박질러서 시키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이 수업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애들은 나를 수업 분위기 하나 못 잡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사로 보고 있다.
이 정도면 사태가 심각하다. 청소 시간에 먼저 지훈이를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는 너한테 미안하다. 다음 시간부터 수업 분위기를 바꿔볼게. 그런데 너도 말이 좀 심하구나. 마음이 여린 그 애는 내가 부르자마자 어쩔 줄 모르며 용서를 빌었다. 아까 제가 잘못했어요.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선생님도 우리 공부시키려고 애 쓰시는 거 아는데, 제가 말을 잘할 줄을 몰라서, 정말 죄송해요. 그러나 문제는 지훈이가 아니다. 올해 내가 맡은 3학년 이과반 아이들은 이전부터 평이 안 좋았다. 그 애들 수업은 맡지 말라는 조언을 처음 복직할 때 듣기도 했다. 막상 수업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단 나았지만 두어 반은 특히 산만하고 제멋대로였다. 이대로 일 년을 끌고 갈 수는 없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가니 또 체육 시간 뒤인데 애들이 반도 없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밖에서 축구를 하고 있단다. 늦게 들어온 아이들을 출석부에 그은 뒤 반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평소에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인사하라고 권했지만, 수업 분위기를 갖추기 위해 당분간 일제 인사를 시키기로 한다. 굳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부동자세로 앉혀 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쓰는 정공법은 모든 상황과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이 너희 수업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는 얘기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 학교에서 처음 맡았던 아이들에 비하면 너희는 훨씬 좋다. 그땐 정말 몇 달 동안 수용이 안 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걔들과도 차츰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니까 수업도 좋아지더라. 강요하고 강제하면 이해와 신뢰가 쌓이기 어렵다.
나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고귀하다는 성현들의 말씀을 믿는다. 성적과 관계없이 너희 모두를 존중해주고 싶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못하는 애들도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수업의 목표는 일단은 너희의 수능 성적을 높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너희 이과생들에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 삶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고,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민으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문제집 이외의 좋은 글도 소개하고 영상물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존중받으며 공부하려면 절제와 배려, 예의가 필수적이다. 그게 없으면 무질서 난장판, 지금 너희가 보는 대로다.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교실에서 나는 어떤 기운을 형성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봐라. 아직 절제력이 부족한 친구들이 많으니 앞으론 내가 좀 더 제재를 해야겠다. 그러나 매를 든다든지 억압하는 방법은 결코 쓰지 않겠다.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고 교감할 수 있으면 자연히 공부도 잘된다. 나는 나름대로 너희 개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너희도 작은 우물 속에서 좁은 식견을 고집하지 말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라. 배움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경계를 허물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함 없이는 배움도 없다. 나도 마음을 열고 너희에게 배운다. 선생과 학생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 그래서 궁극적으로 벗이 되는 관계다.
이십여 분 나의 설교를 듣고 난 아이들은 얼굴이 밝았다. 이런 녀석들이 그랬나 싶을 정도로 남은 시간엔 태도가 좋았다. 평소에 뒤에서 삐딱하니 앉아 딴죽을 걸던 녀석들도 표정이 순하게 풀렸다. 그동안 출렁이는 파도에 가려졌던 아이들의 본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다행이다. 나의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 이번 시간 아이들도 나도 훌륭했다. 다음 시간에 또 농땡이 짓도 하겠지만, 우리는 어린왕자와 여우처럼 조금씩 다가앉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길들여져 벗이 될 수도 있겠다.
복직한 뒤 오랜만에 만난 벗들이 묻는다. 학교 생활 어때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흥미진진해요! 정말이다. 흐리다 개다. 비바람 몰아치다 고요히 빛나다. 생은, 나날은 한결같으나 또한 흥미진진 새롭지 않은가. 변덕스런 봄날, 우리 물방울들은 비틀거리며 우쭐거리며 대양大洋으로 흘러간다.
봄밤 벚나무 아래를 지난다. 꽃망울이 탱탱하게 부풀어 있는 사월 초, 어제부터 시작한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쌩쌩하다. 봄에 유달리 비바람이 잦은 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자연의 산통이란다. 바람 속에서 더욱 팽팽한 꽃망울의 긴장감과 기대감 속으로 내 마음이 스며든다. 절로 미소가 번진다. 찬바람도 상쾌하다. 이 정도 바람쯤이야, 며칠만 기다려, 축포처럼 꽃잎을 터뜨려 줄게, 어디서 이런 말도 들린다. 이렇게 부풀어 오른 꽃가지 아래를 지나면 누구나 함께 마음이 부풀 것이다. 성인들이 가닿은 ‘온 우주가 통째로 하나(萬法歸一, 萬物一華)’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날 이 정도의 교감은 범부에게도 가능하다.
내게 종종 교감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작은 사물은 보도블록 사이로 뾰족뾰족 돋은 풀들이다. 이 녀석들은 오래 사귄 꼬맹이 친구 같아 살짝 볼을 만져 주고 싶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지천이던 질경이 비름나물 온갖 이름의 풀들, 대문가의 사과 배 호두나무,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닭과 오리와 우리 속에서 꿀꿀거리던 돼지들, 그들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동생과 동무들 못지않게 내 세계를 채워주던 존재들이었다. 그때는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살았다.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나는 둥지 속의 알처럼 포근하게 담겨 있었다. 아직 ‘나’만의 자의식 속으로 분리되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는 빈틈없이 충만하고 빛났다.
그 행복한 유년기가 끝날 즈음 우리 집은 도시로 이사를 했고 낯선 세계 속에서 ‘나’는 분리되었다. 이것저것 생각이 늘고 자기 세계가 강해진다는 것은 달리 보면 견고하게 자의식(에고)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도 했으나 만족감은 짧았고, 늘 무언가 빠져 있는 느낌, 어딘가 꼭 가닿아야 할 곳이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뒤늦게 성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실재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바다와 같은데, 우리는 에고에갇혀 외떨어진 한 개 물방울인 듯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소용이 없다. 여전히 나는 바닷속에서도 바다를 실감하지 못하는 물방울인 것이다. 전일全一적 세계였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나온 뒤의 내 인생은 결국 그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긴 여정이다. 물방울이 본래의 바다와 합일하는 것, 그것이 참된 의미의 자아실현이다. 그 본래 세계를 인류의 큰 스승들은 부처님, 하느님, 한울, 브라만, 아트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의 미망迷妄은 너무 깊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미망에서 깨어나 본래 존재가 되는 것, 이른바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공부는 책과 문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대부분 공부를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국어선생,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공부의 본래적인 목적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어 한다.
생업과 관련한 진로 못지않게 학생들이 인생의 참된 의미를 궁구하고 자아실현을 이루도록 돕는 일, 그것은 교사의 자아실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등학교에서 공부란 모두 입시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녹여버리는 이 나라에서 진리며 자아실현이란 몽상으로 보인다. 입시와 타협하지 않고는 아예 공부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시의 울타리를 넘는 공부를 즐거워하는 아이들도 적진 않지만, 입시에만 관심을 보이거나 입시든 뭐든 공부라면 지긋지긋해 하는 아이들 또한 만만찮은 비율이다. 할 수 없지, 들을 놈만 들어라. 한 명의 가슴에라도 씨앗을 뿌릴 수 있으면 좋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고 하늘이라는데 왜 누구는 가능하고 누구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누구는 끌어안고 누구는 소외시켜야 하는가. 꽃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르듯이 아이들의 마음밭도 싹틀 시절이 다른 것이지, 아예 씨앗을 품지도 못할 불모지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도 99%가 같다는데, 같은 인간들끼리야 아무리 달라 보여도 동질성이 더 많지 않겠나. 그래야 성인들의 가르침이 진실인 것이다. 뜻밖의 병으로 일 년 휴직을 한 뒤 올해 삼월에 복직한 나의 화두는 이것이다. 문자 공부로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고 어떤 아이도 소외시키지 말자.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모든 인간이 가진 온전한 본성을 실현해 가도록 아이들을 돕자. 이것은 또한 내 자아실현의 길이다.
우리 물방울들은 그렇게 바다로 흘러가지
화요일 3교시 3학년 6반 작문 수업(정직하게 말하면 언어영역 문제풀이 시간). 아이들은 앞 시간에 체육을 했다. 이 반 녀석들은 평소에도 통제가 어려운데 바깥바람까지 쐬고 오니 풍선처럼 둥둥 떠 있다. 앉아라, 책 펴라, 오 분이 훌쩍 지나서야 조금 교실이 정돈된다. 그래도 여전히 창가의 아이들은 밖으로 향한 눈을 떼지 못한다. 바깥에는 다른 반이 축구를 하고 있고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던 하늘이 개면서 햇빛이 비친다. 빗속에서 공을 차다 온 아이들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늘을 아쉬운 듯 바라본다. 머리를 억지로 끌어다 책을 보게 해도 맨 뒷자리 민수는 끝내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와~ 구름 봐라, 진짜 예쁘다. 사귀고 싶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이번 시간 EBS 수능 특강 문제집 속에 끌어다 넣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 구름이랑 사귀어봐라. 학창 시절, 몸만 교실에 두고 종종 영혼을 가출시켰던 나는 더 채근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시간엔 구름이 네 선생이다. 푸른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여유까지는 못 주어도 창을 내다볼 자유를 가끔은 주마. 예전에 없던 관용이다.
그런데 다음 날 예의 6반 아이들 태도가 더욱 가관이다. 잡담, 엎어져 자기, 엉뚱한 소리로 수업의 맥 끊기… 수업 중에 자꾸 잔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종 치고 난 뒤 농땡이 놈들을 불러 훈계하는데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문제를 풀었던 모범생 지훈이가 끼어든다. 저런 애들은 쫓아내 버리지요. 선생님이 가만두니까 애들이 자꾸 더하잖아요.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 하겠어요. 선생님 수업하러 들어오신 것 맞아요? (헉!) 친구들에 대한 짜증이 나에게 날아왔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교사에 대한 원망이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대로 이끌어주되, 이런 문제풀이 훈련을 별 필요도 없는 애들에게까지 윽박질러서 시키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이 수업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애들은 나를 수업 분위기 하나 못 잡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사로 보고 있다.
이 정도면 사태가 심각하다. 청소 시간에 먼저 지훈이를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는 너한테 미안하다. 다음 시간부터 수업 분위기를 바꿔볼게. 그런데 너도 말이 좀 심하구나. 마음이 여린 그 애는 내가 부르자마자 어쩔 줄 모르며 용서를 빌었다. 아까 제가 잘못했어요.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선생님도 우리 공부시키려고 애 쓰시는 거 아는데, 제가 말을 잘할 줄을 몰라서, 정말 죄송해요. 그러나 문제는 지훈이가 아니다. 올해 내가 맡은 3학년 이과반 아이들은 이전부터 평이 안 좋았다. 그 애들 수업은 맡지 말라는 조언을 처음 복직할 때 듣기도 했다. 막상 수업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단 나았지만 두어 반은 특히 산만하고 제멋대로였다. 이대로 일 년을 끌고 갈 수는 없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가니 또 체육 시간 뒤인데 애들이 반도 없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밖에서 축구를 하고 있단다. 늦게 들어온 아이들을 출석부에 그은 뒤 반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평소에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인사하라고 권했지만, 수업 분위기를 갖추기 위해 당분간 일제 인사를 시키기로 한다. 굳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부동자세로 앉혀 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쓰는 정공법은 모든 상황과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이 너희 수업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는 얘기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 학교에서 처음 맡았던 아이들에 비하면 너희는 훨씬 좋다. 그땐 정말 몇 달 동안 수용이 안 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걔들과도 차츰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니까 수업도 좋아지더라. 강요하고 강제하면 이해와 신뢰가 쌓이기 어렵다.
나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고귀하다는 성현들의 말씀을 믿는다. 성적과 관계없이 너희 모두를 존중해주고 싶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못하는 애들도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수업의 목표는 일단은 너희의 수능 성적을 높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너희 이과생들에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 삶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고,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민으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문제집 이외의 좋은 글도 소개하고 영상물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존중받으며 공부하려면 절제와 배려, 예의가 필수적이다. 그게 없으면 무질서 난장판, 지금 너희가 보는 대로다.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교실에서 나는 어떤 기운을 형성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봐라. 아직 절제력이 부족한 친구들이 많으니 앞으론 내가 좀 더 제재를 해야겠다. 그러나 매를 든다든지 억압하는 방법은 결코 쓰지 않겠다.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고 교감할 수 있으면 자연히 공부도 잘된다. 나는 나름대로 너희 개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너희도 작은 우물 속에서 좁은 식견을 고집하지 말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라. 배움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경계를 허물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함 없이는 배움도 없다. 나도 마음을 열고 너희에게 배운다. 선생과 학생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 그래서 궁극적으로 벗이 되는 관계다.
이십여 분 나의 설교를 듣고 난 아이들은 얼굴이 밝았다. 이런 녀석들이 그랬나 싶을 정도로 남은 시간엔 태도가 좋았다. 평소에 뒤에서 삐딱하니 앉아 딴죽을 걸던 녀석들도 표정이 순하게 풀렸다. 그동안 출렁이는 파도에 가려졌던 아이들의 본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다행이다. 나의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 이번 시간 아이들도 나도 훌륭했다. 다음 시간에 또 농땡이 짓도 하겠지만, 우리는 어린왕자와 여우처럼 조금씩 다가앉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길들여져 벗이 될 수도 있겠다.
복직한 뒤 오랜만에 만난 벗들이 묻는다. 학교 생활 어때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흥미진진해요! 정말이다. 흐리다 개다. 비바람 몰아치다 고요히 빛나다. 생은, 나날은 한결같으나 또한 흥미진진 새롭지 않은가. 변덕스런 봄날, 우리 물방울들은 비틀거리며 우쭐거리며 대양大洋으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