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책으로 말걸기]가족이 너무나도 미운 희연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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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1-05 15:27 조회 6,569회 댓글 0건본문
금요일은 지역아동센터에 북아트 자원봉사 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희연이 얼굴이 잔득 부어있다. 기분이라도 좀 바꿔 줄 생각으로 농담을 걸어보았다.
“뭐야? 어제 밤새도록 남자친구랑 문자하느라 못 잤구나!”
이런 질문에는 ‘아니에요’라는 대답이 나와야한다. 그런데 희연이의 대답은 ‘네’였다.
“오빠도 저도 어제 부모님들 때문에 너무 속상해서 밤새 문자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내가 모르는 게 어딨냐며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단 자원봉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더 해 볼 생각이었다. 항상 착한 딸이었다는 희연이는 올해 들어 갑자기 불만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학교에 왔다가 만난 희연이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가족이 왜 꼭 지켜야 할 것인가요?
오늘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북아트 만들기 수업은 ‘성’만들기였다. 『울타리를 없애야 해』와 『유럽의 성이야기』를 함께 보고 왜 사람들은 성을 만들어 놓으며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울해 보였던 희연이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샘플을 만들면서 기분이 좋아보였으며 아이들을 만나자 성을 만드는 법을 신나게 설명하고 웃을 정도가 되었다.
“자! 이제 이 성 안쪽에는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을 써 넣는 거야. 잘할 수 있지?”
“누나가 만든 것 좀 보여주세요. 소중한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다르잖아. 쉽게 생각해. 난 핸드폰, 친구, 일기장…”
“누나, 가족은 왜 없어요? 가족이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난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멀뚱한 표정이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마다 소중한 것은 다를 수 있다고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고는 희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잖아요. 그냥 혼자서도 잘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 수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초등학생들도 곧 만들기에 집중했으며, 희연이도 아이들의 질문에 잠시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아이들이 성을 만드는 동안 지역아동센터 책꽂이에서 중세시대가 나오는 책을 전시해 두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점점 지킬 것이 많아지면 성을 더 크게 만들고, 결국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희연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프라하 성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자신이 만든 성을 좀 더 꾸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희연이가 만드는 것을 숨죽여 보다가 창문을 만들어 달라며 희연이 앞으로 자신들이 만든 성을 슬쩍 들이밀었다. 그렇게 희연이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성에 창문을 만들어 주느라 바빴다.
수업의 마무리로 『엄마 까투리』를 읽어주었다. 까투리 새끼들에게는 죽은 엄마도 든든한 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초등학생들은 슬프다고 하였고, 자원봉사를 한 중학생들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만족스러운 수업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도 되었는데 짐을 들어준다며 희연이가 내 옆에서 걸었다.
열 손가락 물어서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 거 아닐까요?
“우리 엄마가 그 엄마 까투리였다면요… 막내만 물고 날아갔을 것 같아요.”
희연이는 가족이 너무 싫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보는 것도 싫었으며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희연이는 평소에 조금 우울해 보이기는 하지만 잘 웃고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다. 동생이 두 명이나 있어서 아이를 잘 본다며 자원봉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한 것을 기억하기에 동생들과의 관계도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희연이 이야기로는 가족들에게 자신은 진심이었지만 동생이나 부모님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참을 만큼 참아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다 이기적이에요. 제가 착하니까 다 절 이용하는 것 같아요. 이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요. 동생들도 절 무시하고, 부모님도 다 제게만 시키고…”
희연이가 살짝 소매를 걷고 팔뚝을 내 앞에 내밀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빠, 엄마 모두 저만 때려요. 뭔가 잘되라고 하는 것 같지 않고 그냥 화풀이 같아요. 저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잖아요.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랑 워낙 닮아서 주워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분명 덜 아픈 손가락이 있을 것이고 그 손가락을 너무 물어서 이제는 감각도 없어진 상태가 된 것 같아요.”
희연이 말대로 아이들은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폭력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오히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아이들은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더 큰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으니 희연이처럼 정확히 인지한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답도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을까?
“그냥 치사하지만 20살까지는 이렇게 살아야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고 똑똑하게 살아보려고요.”
희연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정말 희연이를 사랑하지만 사는 것이 힘들어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동생들에게도 희연이가 없어서는 안 될 무척 소중한 존재지만 편하게 생각하다 보니 버릇없이 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번만큼은 이런 이야기들을 희연이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냥 시간을 좀 내서 희연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힘껏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다음 주 수업 준비를 함께하는 것으로 오늘의 만남은 접었다.
“선생님, 전 까투리 엄마 같은 엄마는 안 될 거예요. 아니, 그냥 결혼 안하고 연애만 하고 살까봐요. 가족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존재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