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지은이가 독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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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3-11 23:31 조회 7,749회 댓글 0건본문
안녕? 나는 시를 쓰는 아줌마야. 시를 쓴 지 20여 년이 되어가고 딸을 키운 지는 열여섯 해가 되었단다. 시인과 엄마라는 이 두 가지가 나의 모습이지. 그래서 딸에게 주고 싶은 책 한 권을 썼고 여기서 잠깐 그 이야기를 할까 해.
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 선물로 시집 한 권을 사 주었어. 이러고 보니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이는구나. 입학 선물로 예쁜 옷이나 학용품이 아닌 시집을 사주었으니 말이야. 어쨌든 난 잘생긴 윤동주 시인의 사진이 큼직하게 박힌 시집을 턱하니 안겨주었지. 속으론 여러독자에게가지 계산을 한 거였어.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윤동주 시인 정도는 되는 멋진 사람이면 좋겠고, 이제 소녀가 되었으니 시집 한 권쯤은 가슴에 안고 다니는 감수성이 있으면 좋겠고, 또 윤동주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이야.
그러나 나의 숨겨진 계략을 눈치챘는지 딸아이는 내 선물을 휙하니 던져놓고는 금세 잊어버린 듯하더구나. 물론 섭섭했지. 하지만 이제 갓 중학생이 되었으니 정신없는 신학기에 시집을 읽으라고 강요할 순 없었어. 기다릴밖에. 그럭저럭 중간고사도 끝나고 제법 교복이 몸에 맞아 불편하지 않을 때가 되었는데도 시집은 햇빛을 쐴 기미가 없었어. 그즈음엔 나도 이젠 이상한 아줌마가 아니라 잔소리 엄마가 되어 공부해야지 시집 읽으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가고 있었고 말이야.
그렇지만 난 시가 정말 좋은 친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어. 너, 수학 문제 백 문제 풀래? 시집 한 권 읽을래? 이 정도면 차돌심장을 가진 딸이라도 시집을 안 읽을 수 없을 거다 싶었지. 허나 딸아이는 나보다 더 이상했어. 수학 문제 풀래, 그게 더 나아. 학원 숙제 할 겸 하면 되니까. 시집은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운진 시인.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외롭니? 사랑하니? 묻고 싶었어
아마 이 순간일 거야. 입만 딱 벌린 채 아무 대답도 못한 내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 그런 말을 하는 딸이 미운 게 아니라 무척 안쓰러웠거든. 무엇이 말랑말랑해야 할 너희의 마음을 시멘트처럼 만들어 놓았는지, 어쩌다 수학 공식이 자신을 아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되었는지, 시험과 성적에 관련되지 않는 것의 가치는 고작 이 정도인지…. 많은 생각과 쓸쓸함이 내 가슴을 훑고 갔단다.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가는 동안 너희들의 사춘기가 마음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가버린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했어.
물론 내게도 끙끙거리며 사춘기를 앓던 시절이 있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울음이 나를 흔드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 달려가고 달려가면 더 힘든 청춘이 앞에 있는데도 달려가라고 등 떠밀었던 어른들과 세상이 미웠던 적도 많았어. 그렇지만 내 사춘기가 너보다 더 힘들었다고는 못하겠더라. 너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유혹과 강도 높은 학업, 시험 스트레스에 놓인 채 사춘기라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실려 가고 있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때를 멀미가 날 듯한 버스 속에서 수학 문제와 영어 단어를 외며 보내야 하다니. 이상한 아줌마는 결국 펜을 들었지. 지금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너에게 내가 배우고 느낀 삶을 말하고 싶었어. 인생이 내게 가르치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게 무엇인지 함께 얘기해 보고 싶었던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이운진 | 창비 | 2012
인생 이야길 나누고 싶었어!
공부해라, 성공해라, 이런 말 대신에 외롭니? 사랑하니? 라고 묻고 싶었어. 그 말 한마디엔 고개를 들어 달리는 버스 창밖을 보게 하는 힘이 있잖아. 창밖엔 다양하고 많은 삶이 있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꽃나무와 하늘의 자연이 있고, 무엇보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가 있잖아. 그래, 이런 것. 시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풀어가는 생각을 배우는 것. 내 아픔을 다독이면 다른 인생의 아픔이 보이고 그런 공감과 이해가 쌓여 내 앞에는 몇 개의 길이 더 생기게 되는 것.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 잠시라도 책가방 속의 책은 덮고 제일 편안한 맘과 자세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은 것 말이야. 그 사이에 따뜻한 차 한 잔이 있으면 더 좋겠고.
홀로 견디는 시간은 더디게 가는 법이란다. 그러니 혼자라고 느낄 땐 자주 시라는 친구를 찾아주렴. 그렇게 시를 읽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네 마음에는 용기와 생기가 생길 테니까. 그래서 네가 가진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너를 꿈꾸었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자주 힘들고 불안하고 울고 싶어질 테지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 늘 파이팅 하자.
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 선물로 시집 한 권을 사 주었어. 이러고 보니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이는구나. 입학 선물로 예쁜 옷이나 학용품이 아닌 시집을 사주었으니 말이야. 어쨌든 난 잘생긴 윤동주 시인의 사진이 큼직하게 박힌 시집을 턱하니 안겨주었지. 속으론 여러독자에게가지 계산을 한 거였어.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윤동주 시인 정도는 되는 멋진 사람이면 좋겠고, 이제 소녀가 되었으니 시집 한 권쯤은 가슴에 안고 다니는 감수성이 있으면 좋겠고, 또 윤동주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이야.
그러나 나의 숨겨진 계략을 눈치챘는지 딸아이는 내 선물을 휙하니 던져놓고는 금세 잊어버린 듯하더구나. 물론 섭섭했지. 하지만 이제 갓 중학생이 되었으니 정신없는 신학기에 시집을 읽으라고 강요할 순 없었어. 기다릴밖에. 그럭저럭 중간고사도 끝나고 제법 교복이 몸에 맞아 불편하지 않을 때가 되었는데도 시집은 햇빛을 쐴 기미가 없었어. 그즈음엔 나도 이젠 이상한 아줌마가 아니라 잔소리 엄마가 되어 공부해야지 시집 읽으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가고 있었고 말이야.
그렇지만 난 시가 정말 좋은 친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어. 너, 수학 문제 백 문제 풀래? 시집 한 권 읽을래? 이 정도면 차돌심장을 가진 딸이라도 시집을 안 읽을 수 없을 거다 싶었지. 허나 딸아이는 나보다 더 이상했어. 수학 문제 풀래, 그게 더 나아. 학원 숙제 할 겸 하면 되니까. 시집은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운진 시인.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외롭니? 사랑하니? 묻고 싶었어
아마 이 순간일 거야. 입만 딱 벌린 채 아무 대답도 못한 내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 그런 말을 하는 딸이 미운 게 아니라 무척 안쓰러웠거든. 무엇이 말랑말랑해야 할 너희의 마음을 시멘트처럼 만들어 놓았는지, 어쩌다 수학 공식이 자신을 아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되었는지, 시험과 성적에 관련되지 않는 것의 가치는 고작 이 정도인지…. 많은 생각과 쓸쓸함이 내 가슴을 훑고 갔단다.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가는 동안 너희들의 사춘기가 마음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가버린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했어.
물론 내게도 끙끙거리며 사춘기를 앓던 시절이 있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울음이 나를 흔드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 달려가고 달려가면 더 힘든 청춘이 앞에 있는데도 달려가라고 등 떠밀었던 어른들과 세상이 미웠던 적도 많았어. 그렇지만 내 사춘기가 너보다 더 힘들었다고는 못하겠더라. 너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유혹과 강도 높은 학업, 시험 스트레스에 놓인 채 사춘기라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실려 가고 있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때를 멀미가 날 듯한 버스 속에서 수학 문제와 영어 단어를 외며 보내야 하다니. 이상한 아줌마는 결국 펜을 들었지. 지금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너에게 내가 배우고 느낀 삶을 말하고 싶었어. 인생이 내게 가르치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게 무엇인지 함께 얘기해 보고 싶었던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이운진 | 창비 | 2012
인생 이야길 나누고 싶었어!
공부해라, 성공해라, 이런 말 대신에 외롭니? 사랑하니? 라고 묻고 싶었어. 그 말 한마디엔 고개를 들어 달리는 버스 창밖을 보게 하는 힘이 있잖아. 창밖엔 다양하고 많은 삶이 있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꽃나무와 하늘의 자연이 있고, 무엇보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가 있잖아. 그래, 이런 것. 시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풀어가는 생각을 배우는 것. 내 아픔을 다독이면 다른 인생의 아픔이 보이고 그런 공감과 이해가 쌓여 내 앞에는 몇 개의 길이 더 생기게 되는 것.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 잠시라도 책가방 속의 책은 덮고 제일 편안한 맘과 자세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은 것 말이야. 그 사이에 따뜻한 차 한 잔이 있으면 더 좋겠고.
홀로 견디는 시간은 더디게 가는 법이란다. 그러니 혼자라고 느낄 땐 자주 시라는 친구를 찾아주렴. 그렇게 시를 읽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네 마음에는 용기와 생기가 생길 테니까. 그래서 네가 가진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너를 꿈꾸었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자주 힘들고 불안하고 울고 싶어질 테지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 늘 파이팅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