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 『자매의 책장』 류승희 만화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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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10-05 10:30 조회 549회 댓글 0건본문
작가님의 모든 작품에 고유명사처럼 나오는 장소가 있어요. 주인공 대다수가 내 집처럼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어릴 적부터 도서관 덕후셨나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집에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구립도서관이 있었어요. 시골에 살 땐 혼자서 논밭이나 개울 근처를 돌아다니며 맘껏 무언가를 상상하는 시간에 빠져들곤 했거든요. 당시엔 언니가 하교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 보는 상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 와서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을 처음 들렀는데 『80일간의 세계일주』, 『작은 아씨들』 등 세계명작 시리즈가 많길래 곧장 빌려 봤죠. 그 동네에서 20년넘도록 살아서인지 동네 도서관에 가는 일도 자연스러웠는데, 대학에 진학한 후론 대학 도서관을 자주 갔어요. 3, 4학년 무렵엔 ‘아싸’로 지냈는데 혼자 있기 안성맞춤인 곳이 역시 도서관이더라고요. (웃음) 작품을 준비하면서 계속 다녔죠. 신기한 게 결혼하고 이사 간 곳 근처에도 공공도서관이 가까이 있었고, 훗날 아이들이 태어난다면 집 근처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거였어요. 그 안에서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든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고, 무료니까요. 지금은 원주로 이사를 왔는데 사실 근처에 도서관이 개관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입주했어요. 일찍이 시골에 살 때 엄마께서 언니랑 저를 읍내 서점까지 데려다주신 적 있어요. 당시 저는 살 책으로 『꼬마 니콜라』(장자크 상페)를 골랐는데, 그 이후로도 니콜라 시리즈를 쭉 사서 봤던 것 같아요. 『자매의 책장』에서 언급되듯이, 이 책은 저희 자매가 소장하는 책 중 가장 오래된 책이기도 해요. 그렇게 책에 온전히 빠져드는 시간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러웠어요.
묵묵히 서른을 맞이한 네 청년의 일본 여행기를 담은 『나라의 숲에는』(2013)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셨어요. 심리학을 전공하셨는데,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있었나요?
심리학과에 진학한 건 제 마음이 궁금해서였어요. 나를 잘 알고 싶어서 심리학을 공부했는데, 중고등학생 때부터 만화책을 좋아했기에 학창시절부터 ‘만화가가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하고 있었죠. 4학년이 되고 나니 대학 졸업이 코앞이더라고요. 워낙 혼자서 하는 일을 지향하는 데다 오래전부터 창작을 하고 싶었기에 졸업 무렵에도 취업할 생각은 없었어요.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려야겠다 싶어서 졸업한 해에 곧바로 한겨레출판만화학교에 수강 등록을 했어요. 그곳에서 대안적인 작품을 주로 출간했던 ‘새만화책’ 출판사 대표님을 알게 됐어요. 새만화책 내부에는 작가 지망생들이 일종의 트레이닝을 거치는 과정이 있었거든요. 단편, 장편 등 다양하게 습작하며 일 년 정도 그곳에서 트레이닝을 거친 끝에 첫 책인 『나라의 숲에는』을 냈어요.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저는 친구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즐겁지만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다른 애들은 직장에 다니는데, 홀로 취업도 하지 않은 채 빚을 내서 일본의 낯선 도시에 여행을 다녀온 게 마음이 걸렸던 것 같아요. 친구 중 누군가 결혼을 하는 등 20대 후반은 으레 ‘변화의 시기’라고들 하잖아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무렵 저의 기분을 가상의 인물에 포개어 표현해 봤어요. 저는 대학에 다니는 내내, 졸업한 뒤로도 대형 서점에서 알바를 하며 꾸준히 만화를 그려 왔어요. 서점 내 다이어리 파는 곳에서도 일했는데, 이십 대의 대부분을 광화문에서 보냈죠. 졸업한 뒤엔 주말엔 알바를 하고 주중에는 만화를 그렸어요. 시놉시스 짜고, 콘티 짜고, 그림 그리고, 글도 쓰고··· 매일 8시간씩은 꼬박 앉아서 그려 왔어요. 그렇게 해야 두세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나오거든요.
2015년부터 월간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나리 나리 고나리』를 연재하면서 성인 만화뿐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만화도 그리기 시작하셨어요. 주인공 고나리의 캐릭터에 작가님이 ‘몇 스푼’ 담겼을까요?
제 정체성이 50스푼 정도 담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웃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어린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제 아이가 더 어렸을 때 동화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어느 날, 카세트에서 나오는 『엄지공주』 이야기를 함께 듣다가 ‘꽃에서 나온 게 여자아이가 아니라 할머니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질문에 착안해서 『나리 나리 고나리』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 작품은 인간 세계에 온 작은 사람들이 어린이들과 펼치는 일상 이야기예요. 도서관에 자주 가고 어딘가 삐뚤어진 듯한(?) 성격, ‘아싸’를 자처하는 주인공 나리가 저와 다소 닮았죠. 저는 항상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 같아요. 첫아이가 여섯 살 되던 무렵, 성별 개념이 생기더라고요. 유치원에 다니면서 여자여서 혹은 남자여서 안 되는 무언의 고정관념을 표현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 있어요. 저는 대학 시절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읽었고 여성학 수업을 들었어요. 1, 2학년 무렵엔 운동권 주제 동아리에서 활동했고요. 기억에 남는 게, 운동권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주제에 대해선 사회적 관심을 많이 쏟으면서 유독 여성운동에 관해서는 폄훼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선지 혼자서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남자 선배들이 언변으로 지나치게 제 생각을 내리누르는 게 싫더라고요(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어서인지, 『검정마녀 미루』를 제외하면 제 작품에는 모두 여자 주인공들이 등장해요). 이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제 안의 또 다른 편견을 마주했는데, 그걸 깨트리려고 많이 노력해요. 여자아이라 해서 분홍색 옷을 입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이가 그런 관념에 매몰되지 않길 바랐는데,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걸 보고 놀랐어요. 그러다가 늘 동화에 나오는 마녀가 여자라는 점이 눈에 띄었고, 남자아이가 마녀 수업을 받는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검정마녀 미루』는 그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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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마녀 미루』에서 소년 미루를 지켜주는 친구가 강한 남자아이가 아니라 의리 강한 여자아이라는 점, 식물을 가꾸는 이웃 캐릭터가 여자 어른이 아닌 남자 어른이라는 점이 신선했어요. 만화를 그릴 때 지키고자 하는 철칙이 있나요?
제 만화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종종 떠올리곤 하는데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너는 충분하다는 거예요. 으레 어른들은 자녀가 활달해야 하고 남들과 잘 어울려 한다고 강요하기 쉬운데, 어린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는 것도 중요해요. 저도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 온 편이었고요. 자녀에게 타고난 기질과 다른 기질을 강요하며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 하고 주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제가 늘 관심 갖는 대상은 제가 그랬듯 소외되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어른 만화를 그리든 어린이 만화를 그리든 ‘상처가 있는 인물’을 그리고자 해요. 『검정마녀 미루』에는 주인공의 스승인 검정마녀(모감주)가 나오는데, 그녀는 폐지 줍는 할머니이기도 해요. 지하집에서 비밀 공간을 갖고 살아가는 할머니와 순하고 여리게 보이지만 내면이 단단한 소년 양미루의 이야기를 조화롭게 구성해 표현해 보고 싶었거든요. 우리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외모나 성격, 경제적 조건을 앞세워 타인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함께 돌이켜보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에요.
중고등학생 무렵부터 저는 주로 순정만화를 봤는데, 연애물을 별로 그리고 싶지 않더라고요. 전형적인 일본 만화체도 따라 하고 싶지 않았고요. 유럽 만화를 비롯해 오즈 야스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감독이 구현하는 서사를 좋아해 왔어요. 스케일이 큰 서사보다는 사소해 보일지라도 일상의 한 장면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사실 일상이라는 것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에 이를 잘 포착하고 싶었어요.
빈칸은 빈칸대로 남겨 두는 응원의 계절들
『자매의 책장』은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으로 출발하는 만화예요. 아픈 어머니와 사는 우주, 육아와 개인 작업을 병행하는 미주의 일상을 통해 누구나 갖고 있을 남모를 상처를 보듬어 주는 듯했어요. 작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웠던 인물을 꼽는다면요?
2014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당시 아버지에 관한 만화를 그려 봐야겠다 싶었지만 쉽지 않았고, 자매의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를 중심축으로 놓으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자매의 책장』을 그렸어요. 사실 이 작품에서도 제일 그리기 힘들었던 인물은 아버지였어요. 미주와 우주라는 자매 캐릭터는 제가 만든 인물들이지만, 여기 나온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들은 제가 경험한 데서 크게 바꾸지 않은 것들이거든요. 작중에서도 나오듯이 ‘빈칸은 빈칸으로 남겨 두기로’ 하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제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 지금 알 수 없는 마음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남겨 두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그 상태로 이 만화를 구상한 거죠. 즉, 작중 아버지는 ‘부재하는 존재’이자 자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지속적으로 주는 존재’예요.
이번 만화를 그리면서 미주와 우주에게 애정이 유독 가더라고요. 저의 전작 『그녀들의 방』에서도 세 자매의 일상을 그렸듯, 저 역시 자매로 커 왔으니까요. 우주와 미주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제가 품고 있던 과거, 상처를 마주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자매 이야기를 그린 『그녀들의 방』과 『자매의 책장』이 연결되듯 읽히면 좋겠다 싶어요. 『나라의 숲에는』에는 제 이십 대 시절이 스며 있듯이, 위 두 책도 청년과 중년의 시절이 스며 있으니까요. 지내왔던 시간들을 그리면서 제가 거쳐 온 시절과 일종의 거리를 두어 받는 나름의 위안이 있어요.
음영이 드리운 옆모습, 인물의 뒷모습 등 공간의 여백을 살린 장면이 많았어요. 시선과 응시에 관한 연출을 오랫동안 고민하신 게 아닐까 싶은데 작업 당시 어떤 키워드에 관심을 갖고 계셨을지 궁금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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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도 많이 그렸는데요. 저는 칸을 채울 때 클로즈업을 많이 안 하는 성향이에요. 워낙 원경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고요. 디테일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자매의 책장』을 그렸거든요. 실상 우리는 가족과 살면서 얼굴을 많이 안 보잖아요. 마주 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무언가 하는 모습을 본다던가 식구끼리 말을 주고받을 때도 종종 다른 데 보고 답하는 경우도 많고요. 대다수 가족들이 서로 모종의 ‘빈칸’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해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기에 사람 사이에는 빈칸이 존재한다고 봐요. 끝끝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기대어 사랑하는 존재가 가족이기에 ‘왜 그렇게 살까?’ 하는 의문을 종종 가질 수 있어요. 이 책은 그 물음을 좇아가는 각자의 여정이에요. 동시에 빈칸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자 한 기록이에요. 특히, 책을 읽는 사람이 가지는 어떤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책갈피에 묻어나는 개성이라든가 책에서 읽은 구절을 필사해서 포스팅을 한다든가 하는 장면을 잘 살리고 싶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에 따라 챕터가 나눠지는데 실제 제가 지냈던 계절도 고스란히 표현해 담았어요. 비가 오는 날을 표현할 때 장대비로 내리는지 구슬비로 내리는지 자세히 관찰하여 그렸고요. 빗물에 풍경이 흐려지는 장면, 눈이 내리는 장면도 세밀하게 연출하고자 했죠. 만화에서 배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배경도 인물처럼 말해 주는 바가 있다고 여겨서 공간의 디테일을 살리는 데 주력해요. |
하루키의 『먼 북소리』 등 작품에는 문학 고전과 명작이 숱하게 등장해요. 언급하신 책 중에 미주와 우주에게 가장 에너지가 되어 주었을 책들은 무엇일까요?
우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을 종종 꾸며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아무래도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 제일 위로가 되어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대성당』에 수록된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부부가 키우던 아이의 죽음을 마주하는 이야기예요. 아이의 생일 무렵 부부는 미리 케이크를 준비했었는데, 자녀의 사망사고가 난 이후 사정을 모르는 빵집 사장에게 빵을 찾아가라는 전화를 계속 받아요. 훗날 빵집을 찾아간 부부가 갓 구운 빵을 먹으면서 소설은 끝나는데, 제목처럼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어떤 순간이 부부에게는 위로가 되어 줘요. 어떤 순간들은 견딜 수밖에 없지만,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존재하기에 어쩌면 우리는 힘든 시간도 지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20대 시절부터 힘들 때마다 그 소설을 펼쳐 봤고요. 미주에게 안식이 되어 주었을 책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꼽아 봅니다. 폴란드 시인이 쓴 것인데, 『자매의 책장』에 구절이 인용되었어요(“가구들 사이에서 몸을 문지르기/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하지만/틀림없이 뭔가가 달라졌다./틀림없이 뭔가가 움직였다…”) 작중 미주는 경력 보유 여성으로 아이를 낳고 난 뒤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요. 남편과도 거리감을 느끼고, 아버지에 대한 상처도 있는 미주에게 시집이 위로와 채움의 시간이 되어 주었을 테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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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같은 마음을 계속 그리는 사람
작가님의 전작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동물이 자전거를 운전하고, 공주가 가게 주인이 된다.” “아이들에겐 더 나은 것도 더 낮은 것도 없다.” 작가님께 어린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예전에는 저의 어린 시절을 기억 속에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낳고 살아가다 보니 또 다르더라고요. 마치 어린 시절을 두 번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제 아이를 보면,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이 종종 떠오르는데요. 두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어떤 방향을 주입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요. 저도 그렇게 자라온 편인데, 어머니께서 저희 세 자매를 약간 풀어놓고 키우셨거든요. 저희 자매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이렇게 해라.’라고 강요하신 적은 없었어요. 그 기억이 좋았기에, 저희 아이들에게도 그런 자유로움을 주고 싶은 바람이 마음 한편에 있어요. 나아가 아이들이 커서 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 희생의 아이콘 비슷한 것이 아니었으면 해요(작중 미주는 아이와 함께 걸어가는 장면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내 아이에게 ‘엄마’란 말이 슬픔과 아픔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쁨과 즐거움, 아니 그냥 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마스다 미리도 자신의 작품에서 ‘아이는 내 삶의 의미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하잖아요. 그 아이가 나와 동일하진 않기에, 어느 정도 분리하고 바라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막상 양육하다 보면 감정 이입도 많이 하고 객관적이기 어려운 순간도 있지만 적어도 아이는 아이, 나는 나라고 새기려 하는 편이에요. 일전에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를 읽고 반성한 적 있어요. 어린이를 한 명의 독립된 주체로 봐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했어요. 저자는 어린이를 가리켜 “작아도 한 사람”이라고 말하거든요. 우리는 이따금 어린이를 어른과 비교되거나 다른 존재로만 인식하는 것 같아요. 어린이를 그냥 사람, 한 존재로 보는 태도를 갖고 싶어요.
이재면 평론가에 따르면 작가님께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 2000년대 말에 어른이 된 사람이 겪은 이야기”를 꾸준히 그렸다고 한 바, 공감했습니다. 사실 작가님이 표현하신 일상과 우울은 지금 청년 세대가 겪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요. 잘 표현해 보고 싶은 ‘(어린이의) 우울’이 있다면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는데, 정신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일은 우리 사회가 여태 못 받아들이는 듯해요. 죄악시한다고 할까요? 몸에 상처가 나면 돌볼 수 있듯이, 마음에 상처가 나면 증상을 말할 수 있고 돌보며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만화로 잘 표현해 보고 싶어요. (어린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일부 양육자들은 우리 아이는 우울한 감정을 절대 느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봐요. 어린이들에게도 슬프고 어두운 면이 있을 수 있어요. 어둡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문제로 삼기보다, 그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지 알려 주는 게 더 중요해요. 사실 제가 만화를 그리며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건 ‘나름의 질문들’이에요. 가령 『자매의 책장』을 통해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건 뭘까?’ 물음을 나눠 보는 거예요. 『검정마녀 미루』를 통해선 ‘왜 남녀가 다른 성향으로 자라야 할까?’, ‘나의 가난이 나를 판단하는 조건 혹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등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기회를 건네주는 존재들이 늘 저희 아이들이에요. 궁금한 걸 끊임없이 만들어 주더라고요.
지금은 어떤 풍경에 천착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오늘자 작가님이 바라보는 ‘빈칸’이 궁금합니다.
제가 고민하는 빈칸 중에서 현재 구상하는 작품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픈 증상을 어린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만화를 한 편 그려 보고 있어요. 주변 어른들, 혹은 사회적으로 억누르는 것들을 마주하는 어린이를 그려 볼까 해요. 또 한 가지, 집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몇 년 동안 다른 작업 하느라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그림 에세이로 가닥을 잡아 준비 중이에요. 주거에 관심이 많아 오랫동안 그려 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살아온 집들에 대한 경험을 책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오늘자 그림이라··· 아침에 원주에서 서울로 오면서 내내 하늘을 봤어요. 오랜만에 맑고 들뜬 기분의 그림이랄까요? 이렇게 홀로의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어야겠다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