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윤상원 교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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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7-05 11:32 조회 1,307회 댓글 0건본문
교사로서의 삶을 꿈꾼 출발점이 궁금해요. 가르치고 이끄는 일에 흥미는 느낀 시기는 언제부터였나요?
특수교육과를 전공하면 취업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사를 지망하기 시작했어요. (웃음)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가족 모두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됐었어요. 대학에 진학해도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당시엔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등록금을 감면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장애인 등록을 할지 말지 고민이 많았어요. 등록과 동시에 잇따르는 사회적 낙인 효과가 어떤 건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지도 교수님께 상담을 신청해 제가 장애인 등록을 하면 불이익은 없을지 자세히 여쭤봤어요. 괜찮다고 하셔서등록을 했고, 대학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장애로 명명된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당시 학교엔 옷을 못 입거나 화장실에 못 가는 친구들을 도와주며 기숙사에서 살 수 있는 장애인 도우미 제도가 있었는데, 그 기회로 같이 지내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죠. 시각 장애로 명명된 친구들이 수업을 못 받는 게 그 친구들 잘못이 아니라 점자 교재가 없어서 그렇다는 걸, 몸이 불편한 친구가 이동할 수 없는 건 이동 시설과 도우미가 없어서라는 걸 알았어요. 저녁과 밤, 새벽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우리가 열등감을 가져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마주했어요. 이는 자연스럽게 장애 운동과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요.
워낙 쾌활하셔서 열등감이라니, 다소 의외인데요. 십 대 시절엔 성격이 달랐나요?
소심했어요. 고등학생 때만 해도 저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주변 어른들은 제가 가진 장애부터 이야기하곤 했어요. 이따금 학교 선생님들은 제가 ‘똑바로 보질 못한다’고 혼내셨어요. 저는 시각 장애로 명명된 사람인데, 왜 자신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하냐는 식으로 야단치셔서 그게 다 제 잘못인 줄 알았어요. 자식을 그렇게 낳아서 미안해하곤 하셨던 어머니께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저는 놀림을 받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도 꾹 참곤 했어요. 하지만 대학에서 장애 학생 교육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만들고, 인권 영화제를 열면서 차츰 성격이 바뀌었어요. 당시 저는 학내에서 회장직을 맡았는데, 학교 총학생회와 장애 학생회, 총장과도 만나면서 목소리를 냈고 친구들과 저는 자존감과 해방감을 느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이 이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됐음을 아무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는 걸 절감했고요. 네가 사시고, 얼굴이 삐딱하게 태어났다는 게 애초에 잘못이라며 개인에게 돌렸던 열등감이 주류 사회에 맞춰진 편견에서 기인했다는 걸 구체적으로 알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교사가 될 사람으로서 장애 학생들 또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졌어요. 그러다가 2005년, 제주도에서 임용 시험을 치른 뒤 합격해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어요.
2005년은 “(인천 지역에서) 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급식이 시행되고 방과후 교육활동비 지급,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이 가속화”(『유언을 만난 세계』)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선 교육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셨나요?
2001년,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용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해서 장애라 명명된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후 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가 만들어지고, 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어요. 박경석 선생님(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 제가 재학하는 학교에 직접 오시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정립회관 사태도 겪었죠(편집자 주: 국내 최초의 장애인 이용 시설인 정립회관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 농성에 참여하지 않은 정립회관 직원들이 쇠파이프와 해머를 들고 농성장에 난입해 이를 막으려는 장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유리창과 문 등을 부수는 일이 벌어졌다. 출처: 인권운동사랑방). 회관 측 직원들이 해머로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장애 인권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이동권 투쟁을 그린 영화 <버스를 타자> 상영회도 그 무렵에 열었고요. 다섯 명의 장애해방 운동가의 삶을 담은 『전사들의 노래』에 등장하는 노금호 씨라든가 대구 사회 장애인 운동의 핵심이었던 사람들은 당시 제가 대학 기숙사에서 밤마다 함께 장애 인권을 논의했던 친구들이에요. 지금은 지역사회 자립생활운동의 최전선에 있죠. 그 시기를 겪으면서 2005년 제주영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2년 뒤 무렵인 2007년에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하 ‘특수교육법’)이 만들어졌어요. 특수교육법은 장애라 명명된 당사자와 그들의 부모 단체가 직접 내용을 만들고 투쟁한 끝에 만들어진 법으로, 통합교육을 위해 특수학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근거를 조항에 마련한 법이에요. 학생 4명당 특수교사가 1명씩 있어야 한다는 항목이 생겼고, 전교조를 통해 순회 설명회를 열어 여러 선생님들이 운동에 합류할 수 있도록 특수교사들이 힘을 모았어요. 교사로서 큰 변화를 느낀 건 장애라 명명된 학생의 교육이 이전엔 ‘선택’이었다면, ‘의무’로 바뀌었다는 거였어요.
“차별을 양산하는 모순으로 가득한 교육현장”의 문제를 깊숙이 자각한 뒤 통합교육 정책 선진국인 노르웨이로 유학을 가셨어요. 국내 교육정책과 비교했을 때 극렬하게 달라 낯설었던 일상을 짚어 보신다면요?
교실에 교과서가 없어서 낯설었어요. 특정 단원의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규정이 없더라고요. 노르웨이도 처음엔 한국처럼 교과서를 채택했대요.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내용으로 수업을 했어요. 그런데 1975년 무렵, 특수교육법을 없애면서 아이들 모두를 위한 학교와 교실을 만들려면 교육과정이 고정돼 있거나 유연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일반교육법 안에서 아이들 특성을 반영하여 모두를 위한 교육을 진행하는 일이 ‘유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단 걸 체감한 거예요. 정부는 기존의 열 권짜리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한 권으로 줄였어요. 나머지 교과는 교사가 다양하게 재구성해서 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시하도록 조치했죠. 모두가 한 교육과정에서 배움을 익힐 수 있도록 개별에 맞춤한 교육에 대한 실천을 시작한 거예요(‘모두를 위한 학교’ 대원칙). 이를 계기로 노르웨이는 특수교육법을 없애고 그 내용을 초중등교육법에 담아냈으며 1975년부터 시작해 1990년을 기점으로 모든 특수학교를 폐쇄해요. 모두가 차별 없이 고르게 수업받을 수 있는 교실이 열리게 되었죠. 대신에 국가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교육자료들을 개발해요. 교사는 교육자료를 여러 특성을 가진 학생들에게 적용하고 수정하여 교육할 수 있게 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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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에서 돌아와 다시 교사로 지내며 좌절했던 시기가 있었나요? 책에서도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셨지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개인들의 보편적인 무지함을 더 이상 직면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니 전교조 선생님들조차 특수학교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어요. 특수교육법이 세워지고 난 후 통합교육 근거가 만들어지면서 한동안 통합교육에 열의가 많았는데, 다시금 분리하는 분위기라니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죠.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 CRPD) 제24조는 “장애인의 교육받을 권리를 차별 없이 실현하기 위해 통합된 교육제도와 평생교육을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규정해요. 국제사회의 최대 공동목표인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에서도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 그러니까 통합교육을 달성해야 한다고 언급하고요. 이는 아이들이 차별 없이 양질의 교육을 동등하게 받아야 한다는 뜻인데요. 국내 교육 현실은 그와 반대로 대안 특수학교, 혁신 특수학교 등까지 만들어야 한다며 장애라 명명된 학생과 비장애로 명명된 학생을 따로 떼어놓는 분리교육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어요. 최근 국제사회는 이 현상에 일침을 날려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위원회는 국내 교육정책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특수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모든 교육적 자원을 전환하기 위한 정책을 시급히 마련하라고 한국 사회에 권고한 바 있어요. 평등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 건 물론, 다양한 특수학교를 늘리는 게 국제사회가 정의하는 통합교육일 수 있는지 되묻고 싶어요. 나름 진보적이라 불리던 교육자들이 분리교육과 다름없는 의제를 서슴없이 주창하는 걸 보고 한때 좌절했죠.
‘선량한 분리주의자’들 사이에서 통합교육을 외치다
본문에 일관되게 ‘~장애라 명명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셨어요. 낙인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장애인을 부르는 명칭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국제 운동을 우선 소개하고 싶네요. 장애를 앞세우면 ‘사람’을 못 보기 마련이잖아요. ‘퍼스트 피플’ 운동은 사회적 낙인을 방지하려면 이름을 먼저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요(편집자 주: 1974년 미국 오레건주, 자기권리주장대회에서 발달장애로 명명된 한 시민이 발표한 데서 시작된 운동으로 “I wanna be known to people first(나는 우선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가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은 세계 각지로 퍼졌다). 이 운동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기에 ‘장애라 명명된’이라는 수식어를 쓰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어요. ‘명명한’은 사실 수동태잖아요. 당사자가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할 수 없게끔’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 책에 일관되게 ‘명명된’이라는 말을 썼어요. 예를 들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투표소에 계단이 있어서 투표를 할 수 없을 수 있죠. 애초에 경사로가 있는 환경을 마련하면 이동에 따르는 장애를 겪지 않아도 되기에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논리예요. “글을 쓰는 행위도 실제 보이지는 않지만 종이와 연필이라는 도구와 문자 체계를 만든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가능한 것이잖아요. 이렇게 바라본다면 세상에 할 수 없는 사람은 없어요. 특정 누군가를 ‘할 수 없는 사람’ 혹은 ‘장애인’이라고 명명하고 분류했을뿐인 것이죠.” 사회가 한 사람에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준 사실,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르며 그 사람을 명명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쓴 장치예요. 『장애학의 도전』을 쓴 김도현 선생님께서도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하신 바 있어요. 여전히 일부 학교에서 “특수반 학생”이라고 부르는 선생님이 종종 계시는데요. 제일 좋은 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는 거예요. ‘몇 학년 몇 반 누구누구’ 하고 말이에요.
윤 교사가 담임을 맡은 교실, 학생 사물함 하단마다 마련된 각자의 인라인스케이트. 그는 체육을 부전공했다.
“특수교사가 학교 사회 내에 ‘정상’ 내지는 일반학급을 보호하는 문지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 통합교육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고 지적하셨어요. 특수교사가 지양해야 할 문지기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요?
이따금 체험학습 등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배제할 때가 있어요.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교육이 강화되어 수영교육이 생겼는데, 이때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데리고 갈지 놓고 갈지를 선택의 범주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아요. 담임선생님이 “얘는 특수학급에 남겨놓으면 안 될까요?” 하고 묻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순간에 특수교사가 (허락) 하면 안 되는 게 문지기의 역할이에요. 담임선생님의 말은 마치 질문처럼 들리지만, 그 본질을 파고들면 특수교사가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생존 수영을 가르치는 교육에서 배제할 것인가 포함할 것인가 선택에 기로에 놓이게 하는 회피성 물음이거든요. 당사자 학생을 ‘교육에서 분리할 것인가 통합할 것인가’ 묻는 질문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학교 사회에서 소수자인 특수교사는 학교장이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거절하기가 어려워요. 사서선생님들 역시 교장선생님이나 교과선생님이 어떤 제안을 했을 때 쉽게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날에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따로 데리고 있으라고 한다거나 수학여행, 공개수업하는 날에 특수교육 대상자들만 분리해서 별도의 교실에 모아 놓는 것도 특수교사에게 문지기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각기 다른 학생들은 함께 살아가면서 다양성을 배워 가야 하잖아요. 가령 윤리교사가 다양성에 대해 가르친다고 했을 때, 다양성을 가르치는 그 공간에서 장애로 명명된 아이들은 배제하는 모순이 발생할 때가 있어요. 실천은 없고 이론만 있는 교육이 반복되다 보니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만행, 폭력, 갑질이 늘 빈번해요. 장애라 명명된 친구들과 함께 살아 보지 못하니까 지식 체득이 좀처럼 안 되는 거예요. 다양성을 머리로만 배우고 실제로는 겪지 않았기 때문이죠.
국내 장애이해교육의 한계도 지적하셨는데, 연민을 학습하는 것 정도의 일회성 교육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어떤 교육이 도입되는 게 바람직할까요?
장애 ‘이해’ 교육에서 장애 ‘인권’ 교육으로 수정해야 해요. 장애인권교육은 한 교실에서 우리 모두 같이 수업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을 의미해요. 친구들이 생존 수영할 때 같이 수영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친구들이 투표할 때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 급식을 먹을 때 함께 먹을 수 있는 권리, 도서관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해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이 많은 것들에 접근할 수 없도록 우리가 사회적·역사적으로 방치한 문제를 알고 수정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필요해요. 이 사회가 특정 신체가 정상이라고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추도록 설계해 왔기에 장애에 대한 시선이 견고해졌다는 걸 알면 학생들의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어요. 우리는 그동안 ‘정상 신체’에 맞춰 교실, 도서관 등 공간들을 만들어 왔잖아요. 대다수 묵자 도서를 출간하는 출판계도 마찬가지고요.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체나 문화를 배제한 채 사회가 발전해 왔기에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차별당해 왔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해요. 장애는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침해의 문제’라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거죠. 장애 체험을 한 뒤에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게 아니라, 왜 장애라 명명된 사람들이 이동할 수 없었는지를 학생들이 분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장애 체험 이후, 이동하지 못함으로써 겪는 아픔이 알게 하는 게 아니라 학교가 어떤 장애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찾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즉, 우리 사회의 ‘숨은 장애물을 찾아내는 교육’으로 장애 체험 교육의 목표를 수정해야 해요. 다양한 신체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장애를 유발하는 공간과 도구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문제와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해야 해요.
학교에 기금을 마련하고 제과제빵 자격증 검정장 기준에 맞는 시설을 설치한 일화가 인상적이었어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도 졸업 후 취업할 수 있는 여건이 지속적으로 마련돼야 할 텐데요.
특수교육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진로·직업 설비를 마련하고, 진로·직업 전문가를 배치해야 한다고 규정해요. 모든 학교장은 이를 갖춰야 하는데, 특수학급에서 이미 관련 진로교육을 하고 있다며 그 항목을 충족한다고 당국은 말하고 있어요. 최소한 법령 조항만이라도 잘 지켰으면 좋겠어요. 우선, 진로 전문가를 파견할 수 있는제도와 권역에 따라 최소 다섯 학교를 묶어서 한 학교에서 진로를 위한 시설과 전문가들을 집중 배치하는 방법 등을 마련해야 해요. 무엇보다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인문계고, 특성화고 학생들이 받는 진로·직업 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예를 들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직업위탁교육 시설을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도 교육받을 수 있도록 열어 두어야 해요. 책에도 나오듯이, 인문계고 직업위탁교육을 담당하는 장학사가 특수교육 대상자가 진로교육 수강신청에 등록된 걸 보고 여기 왜 보내냐고 훈수를 두곤 하는데, 이는 ‘특수는 특수끼리’ 모아 놔야 한다고 보는 시각에 가까워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이 이력서에 쓸 거리도 마련하지 못한 채로 ‘진로 체험’만 한 뒤 졸업하는 환경이 안타까워요. 제가 마련한 진로교육 환경으로 그 과정을 이수한 학생 중 절반가량이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저는 5년 뒤 또 다른 학교로 이동하잖아요. 과연 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직업교육이 지속적으로 실천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어울림의 교실'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연습
교직생활을 하며 겪으신 학교도서관도 궁금해지더라고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이 충분히 도서관 이용자로서 서비스를 누려 왔는지 진단하신다면요.
우선 시각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은 도서관 자체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요. 저시력 학생들을 위한 큰글자책과 전자 확대경이 배치되면 좋겠지만, 그런 책들이 두루 갖춰진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도서관에서 떠들면 안 되는 규칙이 마음에 걸려요. 자폐라 명명된 학생들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반항어라든가 혼잣말을 하는데, 도서관에 그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부스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위한 읽기 쉬운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좀더 많이 나왔으면 해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은 발달장애인의 알 권리를 위해 쉬운 정보 제작과 교육 등을 하는 곳인데요. 가령 글이 많은 책이라면 내용을 절반으로 줄이고, 글자나 그림 등으로 재구성해요. 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의 추상성을 줄이고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을 거쳐 재출간하는 거예요. 그런 책을 도서관에 많이 비치하면 좋겠어요. 촉감 도서, 팝업북, 그림책도요. 제가 노르웨이 가서 놀란 게 그림책 시장이 정말 크다는 거였어요. 도서관에 그림책을 많이 비치해 두면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고, 이용자의 접근성도 높일 수 있잖아요. 휠체어도 접근할 수 있어야 해요. 계단이 많은 도서관들도 가끔 있는데, 지체 장애로 명명된 학생들은 접근하기 어려워서 경사로를 설치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책장과 책장 사이 폭을 넓혀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게, 책상 간 사이를 넓히고 모서리에 라운딩 처리를 하거나 고무를 붙여 위험도 방지했으면 좋겠어요. 도서관 리모델링 시 유니버설 디자인을 고려하는 논의가 필요해요.
매일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으로 잠에 곯아떨어져 교실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권리를 박탈당했던 민재와의 일화를 소개한 대목이 와 닿았는데요. 민재와 ‘교실에서 잠들지 않고 살아내기’를 하셨다고요.
| 약물을 복용했던 이유는 민재의 망상 증세를 일시적으로 없애기 위해서였는데요. 민재를 잠재움으로써 망상 증세를 중단시킨 것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민재가 타인과 어떻게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삶의 지혜 내지는 앎을 얻을 기회는 박탈”당한 셈이었어요. 당시 민재는 중학교 때 당한 집단 폭력으로 인한 분노와 돌발행동을 학교에서 자주 드러냈어요. 필기하다 말고 화를 내거나 지나가는 친구에게 시비를 거는 민재에게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걸고 유머로 응대하며 소통했어요. 특수학교에는 교실마다 자물쇠와 문고리가 있어요. 학생들은 수업 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나갈 수 없어요. 그래서 특수학교의 쉬는 시간에는 복도에 아무도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싸우거나 다칠 수도 있으니 안전과 보호를 위해 하는 조치인데요. 저희 반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문밖을 나서요.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저는 복도에 서서 아이들을 지켜봐요. 그리고 민재와 같이 폭력을 표출하는 아이가 지금 학급에도 있는데, 별칭을 선재라고 가정할게요. 선재는 신경정신과 진단을 받을 만큼 여러 약물을 먹고 어려운 일을 겪어 왔어요. 친구에게 욕하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하는 선재는 특히 자기 눈에 든 친구에게 집착이 세요. 제가 선재에게 내린 솔루션은 그런 선재를 가둬 놓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였어요. 최소한 옆 반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고, 다양한 아이들을 겪게 하면서 집착을 분산시켜 보았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게 하면 더 집착하기 마련이잖아요. 자유롭게 친구들을 만나게 하니 집착을 안 하게 되고, 다양한 아이들에게 고르게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선재야, 그 친구를 만지기 전에 이름부터 불러 주자.’, ‘좋아하는 관계일수록 거리를 둬야 해.’ 관계를 맺을 때 지켜야 할 예절을 사이사이 알려 주니 이제 선재는 더 이상 고함 지르고 욕하지 않게 되었어요. |
선생님의 교실에 달린 문고리는 ‘투명 문고리’네요. 무작정 가두지 않고 어울리면서 관계를 학습하게 하시니까요.
어쩌면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 이름에서 따온 ‘바실리아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어요. 그의 이름을 딴 바실리아 법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전국의 공공 정신병원을 오래전에 모두 폐쇄했어요. 바실리아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고, 자기 동네에서 정신 상담과 건강 관리를 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요.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들이 같이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조율하면서 살아가듯이, 정신 장애라 명명된 사람들도 가둬서 치료하기보다 어울리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논리예요. 대개 병동에 가두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게 되는데, 병원에서 나왔을 때 갇혀 있느라 지역사회 적응력이 뒤떨어진 당사자를 또다시 개인의 문제라고 비난하면서 가두는 게 온당한 일일까요? 선재나 민재도 온갖 부대낌을 겪으면서 나은 방향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깨달아 가잖아요.
영국에서는 적극적 위험 감수 정책(Positive Risk Taking)에 따라 발달장애라 명명된 사람을 가두지 않고, 오히려 위험에 노출시켜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지 함께 고민하는 ‘옹호자’를 곁에 두게 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의 경험을 충분히 익힐 수 있게 해 줘요. 사람을 사귀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해소하며,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게 함으로써 위험 자체가 오히려 배움에 도움이 된다는 접근인데요. 함석헌 선생님도 ‘앎은 앓음’이라고 하셨듯 앓음, 즉 고통을 겪고 그것을 깨고 나오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비로소 알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교육현장에서도 적극적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봐요.
분리되고 배제되는 교실 너머로 가기 위한 선생님의 여정이 투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 학생들과 해 보고 싶은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저는 매주 화요일마다 ‘사회와 여가’라는 수업을 열어요. 그 시간을 활용해서 학생들과 지역사회로 나가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을 같이 겪어요. 비장애로 명명된 사람들이 가는 노래방이나 영화관 시설을 이용하고요. 지역사회도 이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도록 기회를 주고, 아이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경험하고 대중시설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를 줘요. 학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희 반만 외출을 하고 있어요. 올해 학생들과 가장 가 보고 싶은 장소가 있는데요··· 인천중앙도서관이요! (웃음) 어린이 도서 코너 말고 일반 도서 코너에 꼭 가 보고 싶어요. 그리고 조금 떠들어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도서관과 사서선생님이 저희의 방문에 어떻게 대응할지, 어떤 고민을 하실지 알고 싶어요. 우리 학생들은 그 공간과 사람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