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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사의 책] 삶의 버팀목, 교육철학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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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1-26 15:03 조회 7,93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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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연 서울효제초 사서교사


교사는 감정노동자라는 말에 공감해주실까. 종일 사람에 치이며 살아가는 일상이 버거울 때가 있다. 어떨 땐 직업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말이다. 피곤한 몸이야 주말 동안 하루이틀 잘 먹고 잘 자면 어느 정도 돌아오지만, 마음이 지치면 참 힘들다. 4년 전쯤인가 그때도 그랬다. 꾸러기 녀석들까지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이던 2학기 개학 날, 도서실 로비가 English Zone으로 바뀌어 있는 걸 보았을 때 기분이 얼마나 거시기하던지…. 청소하라는 잔소리에 감정이 실렸던 탓이었나 학생에게 숫자로 욕을 먹었을 때도, 밤 12시가 다 되어 본인의 아이가 시상에서 제외되었다는 학부모의 민원 전화를 받았을 때도, 꽤 우울했다.
이럴 때조차 지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소통이 불가능한 관리자와 야생마 같은 아이들과 바뀌지 않을 게 확실한 교육시스템이 나를 정말 힘들게 할 때, 그때도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용기를 낼 수 있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연수는 그 효력에 유통기한이 있으며, 여행은 딱 기분 전환 거기까지만이다. 마음 통하는 동료교사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요, 설사 만나더라도 그 자체가 근본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학교라는 전쟁터에서 진정 ‘어른’으로 ‘선생’으로 살아남으려면 아무래도 비장의 카드가 한 장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사의 버팀목, 교육철학
한참을 찾았다. 언제든지 나를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 비장의 카드 말이다. 현장에서는 여유가 없던 까닭이었을까, 휴직한 뒤에야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그 녀석의 이름을 밝히자니 막상 머뭇거려진다. 아직은 내 나이에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버팀목 하나가 없어, 헤매고 또 헤매던 지난 삼십여 년은 참 길었다. 그리고 늘 남 탓으로 얼2012룩졌기에 이제와 생각해보면 많이도 부끄럽고 안쓰러운 시간들. 그 마음을 다시 새기기 위해 용기 내어 글을 쓴다. 글은 세상에 나 자신을 내놓는 일이니까……

내게 없던 그건 바로 ‘철학’이었다. 철학이라는 게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게 해주지도 못한다. 슬프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거기에 매달려 보려는 이유는 길을 잃지 않게 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밤바다를 항해하는 이에게 북극성이 그러하듯,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별이 없으면 길을 잃게 되지 않을까?

교육철학이란 말이 다소 거창하다 보니 부담스럽게 다가서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이 책은 부담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놀랍게도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제목의 글 책 『가르친다는 것』과 함께 출판되었다는 점. 그러니까 한 권은 글 책으로, 한 권은 만화로 나왔다. 두 권의 기본 텍스트는 거의 같으나, 만화책의 경우 본래 280여 페이지 정도의 내용을 간추려 약 130여 페이지로 꾸려졌다. 혹시 만화라는 형식이 교육철학이란 무게를 담아내기에 가볍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그 마음 역시 내려놓아도 좋다. 오히려 선택하고 선택한 어구들이 중점적으로 조명되기에, 마음에 울림을 더해준다.

40여 년간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대낀 저자 윌리엄 에어스의 교육철학은 무엇일까. 겉표지의 그림 한 장이 이를 잘 설명한다. 하늘에서 교사로 보이는 사람이 떨어지고 있고, 맨 아래 한 아이가 웃으며 선생님을 받아내고 있다. 그를 살린 사람은 바로 어린이 퀸. 퀸은 본문에 나오는 아이로, 교육 행정가를 상징하는 “서류철 든 사람”들은 이 아이에게 행동과잉장애를 의미하는 “위험군”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윌리엄은 위험군 꼬리표가 “아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춘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이를 인격체로 바라보아야 함을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아이들을 볼 때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에 관심있고 어떤 겅험을 했나? 무엇을 궁금해 하나?’”(30쪽)
“관찰의 목적은 이해이지, 객관성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보고 이해하는 것은 공감의 행위이며, 잘 가르치기 위해 해야 할 핵심 과제이다.”(39쪽)

‘가르친다는 것’의 중심에 아이를 놓으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듯하다. 그게 교육철학의 힘이겠지. 학습 환경, 즉 교실은 교사가 지닌 가치를 반영하고, 모든 교사에게 맞는 교육과정을 찾으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진짜 평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다운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다음 어구와 함께 생각거리로 남는다.

“좋은 학교는 학생들이 세상을 스스로 바꿀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곳입니다. 좋은 학교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울어도 좋다고 느끼는 곳,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히 여겨지는 곳이지요.”(111쪽)


남이 아닌 내 눈으로 바라보기
그래, 맞다. 좋은 학교는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가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곳이어야 한다. 아마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학교 역시 어느 정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으리라 본다. 학생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학교를 민주적 공동체로 꾸려나가는 일이기에, 비인간화되어가는 우리네 학교에 대한 교사 스스로의 성찰이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듀이의 교육철학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는 진보주의를 상징하는 미국의 교육학자로, 지식은 경험을 통해 습득되기에 학교 교육이 실용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가 당시 1920~30년대 미국 교육 제도에 끼친 영향도 놀랍지만, 직접 실험학교를 운영하며 학교를 민주주의적 공동체로 꾸려보려 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론은 모를까 실천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무려 100여 년 전 출판된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이 오늘날 혁신교육 운동의 필독서로 불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존 듀이가 아무리 뛰어난 교육실천가라 해도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한 천재의 훌륭한 교육사상에 그치지 않고 그의 생각과 교육철학을 나의 생각과 교실에 적용시키려면 어찌해야 할까. 이 책의 저자 필립 W. 잭슨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듯싶다.
그는 듀이의 저서 『경험과 교육』에 실린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참으로 긴 여정을 떠난다. 섬세하면서도 차근히 2~6장에 걸쳐 헤겔・칸트・틸리히 등의 사상을 살피며, “완전히 개인적이면서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실존과 본질에 대한 고민 끝에 “오직 이상으로 존재하는 본질은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 “교육이 근본적으로 도덕적 과업”이라는 답에 다다른다. 그래서 저자는 교사에게 “반성과 성찰”을 강조하며, 교육의 목적을 ”인간에게 이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여기서 책이 끝나지 않는다. 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이렇게 확장된 정의는 개인적인 것, 즉 내 것이어야 한다. (중략) 이제는 듀이가 청중들에게 요청한 것이 그것이 아닌가 싶다. 저마다 스스로의 교육적 신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라.”(179쪽)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발견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교사라면 당연히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짧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질 때쯤 마지막 장의 다음 어구가 참으로 반갑다. 그래, 일단 해보는 거다.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겠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시도할 수만 있을 뿐 모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르침을 준다.”(180쪽)


철학을 삶 속에 실천하기
늘 궁금했다. 철학이 굳건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삶의 방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본인의 철학을 일상 속에 녹여 실천하는 일은 진정한 고수만이 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그 반열에 이오덕 선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교육실천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이, 저자가 아니라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싶은 이, 그의 글 모음집이 새로 나왔다.
2010년부터 차근히 출판되어 온 ‘이오덕 교육문고’ 시리즈 중 아홉 번째 책으로, 이오덕 선생이 문학과 교육에 대해 쓴 수십 편의 글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구성을 살펴보면 1부에는 글쓰기 교육을, 2부와 3부는 아동문학과 독서교육을, 4부는 교육을, 5부에는 서평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각 장의 주제가 분명 다름에도, 읽다 보면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도 문학도 교육도 동일한 방향성을 가졌기에, 주제별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이오덕 선생은 일관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쓰기는 삶을 키워 가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글을 어떻게 쓰나 하는 문제는 삶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가꾸나 하는 문제에 직결됩니다.”(40쪽)
“오직 사람을 위한 문학만이 참 문학이 되듯이, 삶을 가꾸는 노력에서만 참 글이 쓰입니다.”(41쪽)
“말을 가르치는 것이 곧 삶을 가르치는 것이라야 한다.”(126쪽)
“삶의 문학과 삶을 등진 문학을 판별하여야 한다.”(275쪽)
“삶이 없는 교육, 삶이 무시당하는 교육이 참 교육일 수 없습니다.”(400쪽)


이렇게 선생이 추구했던 방향성은 “삶”이었다. 이 삶이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참된 삶이란 “민주적 삶을 몸에 붙이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가 “민주적으로 인간스럽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철학에는 “자유와 평화와 평등”이 중심에 서 있기에, 물질주의・출세주의・경쟁주의・이기주의에 물든 삶을 거짓된 삶이라 칭한다. 아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쓰기, 어른의 장난감이 아닌 현실과 성실한 대결을 펼치는 문학, 농촌중심의 교육철학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연결된다. 이렇듯 삶에 대한 기본 철학이 굳건한 까닭에, 20여 년 전 제시한 글쓰기 지도 방법, 좋은 책 고르는 법, 책 읽는 법 등의 세부적인 내용 역시 지금 읽어도 유효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교육은 삶 자체를 풍부하게 가꾸어야 하며, 아이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을 울린다. 그렇다면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제 그만 정말 간절히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고 싶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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