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교사의 책] 그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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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01 17:12 조회 6,798회 댓글 0건본문
정재연 서울효제초 사서교사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교과서에서 벗어났다는 작은 해방감 때문일까, 초등인 탓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서실 수업에 제법 열심히 참여한다. “저요, 저요.”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난 무슨 규칙인 양 수업 전개에 적합한 대답 한두 개에 반응하며 칭찬과 함께 다음 활동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까닭을 모르게 마음 어딘가가 좀 불편하다. 아이들도 열심히 했고 수업도 그럭저럭 흘러갔는데 느껴지는 공허함과 답답함.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애매한 기분은, 아이의 말이 발언되는 그 순간 묻혀 버리는 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한 아이의 생각은 정답에 한하여 교사에게만 의미가 있지, 다른 아이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무엇인가 끊긴 느낌, 이 방향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한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이런 고민을 좀 더 치열하고 깊게 하는 고수가 많다. 이번 달에는 수업을 주제로 한 책을 통해 교육의 방향성을 고민해보자.
배움이 중심된 교실 만들기
우리네 수업에 있어 소통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일까. “배움의 공동체”를 이끄는 도쿄대 사토 마나부 교수의 책이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학교의 도전』(2012)에 이어 『교사의 도전』이 나왔는데, 사실 일본어 원서는 『교사의 도전』이 2003년에 먼저 출판되었다. 그만큼 배움의 공동체 수업 자체에 대한 기록이 더 충실하다. 때문에 학교와 지역 전체의 교육개혁 움직임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학교의 도전』이, 배움의 공동체란 기본 개념에 대해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고 싶은 이들은 『교사의 도전』이 적합해 보인다.
그런데 아직 배움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어색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고, 수업의 중심을 학생에게 되돌리자는 일종의 교육운동이다. 교사가 아니라 학생 머릿속에서 실제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배움이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긴밀하게 일어나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수업의 중심에 교수법이 아니라, ‘소통’을 세워놓는다.
예를 들어 교사는 수업과 관계없는 엉뚱한 학생의 발언에 “누구더 없어?”, “다른 의견은?” 대신, “어디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니?”라고 묻는다. 교사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기들끼리 알아서 교환하며 배워 나간다. 아이들끼리 묻고 답하는 수업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도 수준과 환경이 모두 다른 수십 명이 모인 교실에서? 말만 거창한 교육철학이구나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사토 마나부가 기록한 현장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교실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표현이 딱 맞구나 싶은 수십 개의 수업 장면들. ‘박수 세 번!’과 같은 유치한 손 유희가 없어도, ‘땡’ 소리나는 교탁 위 종이 없어도, 아이들은 작은 웅성거림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전개시켜 나간다. 교사는 아이들의 말과 말을 ‘연결’하며, 어디를 모르겠는지 ‘아이와 함께 탐구하는’ 수업을 진행한다. 교사도 아이들도 정말 잘 듣는다. 교사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그들은 “쓸데없이 참견하고 서로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배우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토 마나부는 이 모든 것을 그 특유의 글쓰기 방식 안에 녹여낸다.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는 그만의 글재주는 세심한 관찰과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수업이 눈앞에 펼쳐진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 전체를 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아이 한 명의 작은 탄성을 듣고, ‘난 잘 모르겠는데…’라는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을 듣고, 아이 옆에 살짝 비켜서서 말하는 바를 몸으로 응원해주는 교사의 작은 행동을 본다. 그는 책을 쓴 이유를 “그 도전 속에 싹트고 있는 수업 철학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제시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과연 어떤 교육철학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책장을 열어보자.
이게 진짜 공부다
수업을 고민하는 중등 현직 교사 다섯이 뭉쳤다. 그들의 공통된 교육철학은 교과별 벽을 깨자는 것. 너무 당연한 방향성이라 ‘이게 특별한 건가?’라고 생각하기엔 우리의 교육현실이 좀 서글프다. 단적으로 교사 임용 TO 배정 시 드러나는 교과별 싸움은, 내 과목이 다루는 내용은 절대 다른 교사가 근접해서는 안 된다는 배타성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칼로 자르듯 영역이 뚜렷한가. 책 속 지적처럼 그 구분은 단지 가르치는 이들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사회 속에서 국어가 보이기도 하고, 역사 속에 수학과 과학이 숨어있기도 하니 이 모든 것을 함께 잘 비벼서 가르치자는 게 집필의 취지! 다섯 교사는 이런 생각을 15개의 수업 이야기로 묶어냈다. 본문은 일단 저자들의 전공과목인 수학·과학·국어·사회·역사 다섯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서 한 주제나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수업 사례를 엮은것은 아니고, 일종의 교사 지침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침서라고 하니 좀 지겹지 않을까 싶은 우려는 금물. 그보다 교양서를 읽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특히 서술 방식이 교사가 학생에게 말하는 이야기체로 쓰였기 때문에, 본래 예상 독자는 교과별 통합 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이지만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신선한 점이 눈에 띈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나 숨어있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는 우리가 보통 가장 합리적이라 여기는 평균과 다수결이 가진 맹점과 대안을 지적하고, 사회시간에는 하루 8시간 노동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언어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지를 설명해준 국어시간, 이승만의 어두운 부분까지 객관적 기록으로 설명해주는 역사시간도 참 재미있다. 이런 접근은 ‘수학은 지겨워’, ‘역사는 암기과목이야’ 등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관을 깨기에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덤으로 읽고 나면 똑똑해진 듯한 느낌까지!
물론 통섭이란 말을 제목에 사용하기엔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교과를 벽 없이 엮어낸다는 뜻의 통섭교육이라 지칭하기 위해서는, 책의 구성을 과목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엮어 그 안에서 각 과목의 이야기를 담아냈어야 했다. 같은 지점을 저자들도 고민하기에, 상위권 논술처럼 비치는 것이 걱정된다고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시도는 이미 의미가 크다. 문제풀이와 교과서 암기로 가득 찬 교실부터 바꾸려는 것은 가장 작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기
네모난 교실이 쭉 붙어 있고, 그 옆의 긴 복도가 딸린 학교의 구조. 운동장 끝까지 울려 퍼지는 수업 시작 종소리, 교실 앞에 위치한 태극기와 교탁 시간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일상을 저자는 낯설게 바라보자고 말한다. 공교육에 대한 회의감이나 삐딱하게 바라보기가 아니라, “습속이 지니는 보수성” 때문. 익숙한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는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음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형성된 일상은 굳어져 진리가 되어 버린다. 바로 그 순간이 익숙하지 않음에 대해 배타적 시선이 자라는 지점이다. 교과서가 없을 수도 있는데, 시험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지도안을 쓰지 않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수업 비평 연구가로 알려진 이혁규 교수는 조용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묻는다.
본래 이 책은 월간 <우리교육>과 교육공동체벗의 <오늘의 교육>에 연재되었던 ‘교실수업 이야기’ 글을 모아 엮은 것으로, 수업비평의 후속 작업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같은 저자의 『수업, 비평을 만나다』와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가 출간된 후 현장교사들이 수업비평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으나, 막상 실천 활동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돕고자 쓰인 글이다.
우리에게 “교육적 감식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저자는 일단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음으로 바라보자고 말을 건넨다.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에는 산업사회의 시간 개념을 교육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가 감춰져 있고, 본래 스승은 제자가 직접 찾아 나서서 만나는 존재였으며, 학생의 대답에 ‘맞았어요’ 대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롭게 다가온다.
그의 지적은 2부로 넘어가며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 부분에서는 수업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집중적으로 담았는데, 특히 수업지도안과 공개수업에 대한 의견에 공감이 간다. “미리 만들어진 계획에 교사의 실행을 종속시키도록 요구”하는 수업지도안은 “수업과 관련하여 타자와 소통하고 싶은 내용은 교사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다양한 형식이 필요하다고 바라보며, 수업연구대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습”이 빠진 채 풀죽은 연기를 하는 아이들을 지적한다. 수업을 바라보는 안목은 “일상성에 기반한 의미 있는 실천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공개수업 준비로 지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말인 것 같다.
수업을 찬찬히 살피던 저자는 “당신이 학교에서 내는 시험문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대학별 고사에 비추어 더 교육적인가?”라고까지 묻는다. 순간 너무도 마음이 불편해서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칫거린다. 학교시험·대학수학능력시험·대학별 고사 중에 학교시험이 가장 나쁜 시험이 아닌가 묻는 그는, 대입시 제도를 주입식 공부가 불필요한 문제로 바꾸어도 교과서와 문제 풀이식 학교수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새로운 평가 방식을 정작 현장에서는 새로운 수업 방식으로 연결시키지 못함에 대해 “현재의 대입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 방식을 고수하면서 대입시를 방편삼아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사회구조를 핑계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지는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닐 듯하다. 나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며 잘못했다 고백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겠지. 당연함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온 내가 하루아침에 당연하지 않음의 모습이 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담은 근래 혁신학교 움직임에 대한 기대감은 큰 위안이 된다. 교수법 개선 중심의 개인 차원에서 이뤄졌던 기존의 교육운동과는 달리, 혁신학교 운동은 자발성을 기초로 “교사 상호 간의 수업 공개와 소통, 공동 연구를 통해서 함께 성장하는 학습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에게 작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덮으며 저자에게 고마웠다. 비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배우지 않은 방식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 즉,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전문성이라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함께 고민하고 손잡고 가보지 않을는지 조심스레 물어보고 싶다.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교과서에서 벗어났다는 작은 해방감 때문일까, 초등인 탓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서실 수업에 제법 열심히 참여한다. “저요, 저요.”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난 무슨 규칙인 양 수업 전개에 적합한 대답 한두 개에 반응하며 칭찬과 함께 다음 활동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까닭을 모르게 마음 어딘가가 좀 불편하다. 아이들도 열심히 했고 수업도 그럭저럭 흘러갔는데 느껴지는 공허함과 답답함.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애매한 기분은, 아이의 말이 발언되는 그 순간 묻혀 버리는 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한 아이의 생각은 정답에 한하여 교사에게만 의미가 있지, 다른 아이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무엇인가 끊긴 느낌, 이 방향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한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이런 고민을 좀 더 치열하고 깊게 하는 고수가 많다. 이번 달에는 수업을 주제로 한 책을 통해 교육의 방향성을 고민해보자.
배움이 중심된 교실 만들기
우리네 수업에 있어 소통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일까. “배움의 공동체”를 이끄는 도쿄대 사토 마나부 교수의 책이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학교의 도전』(2012)에 이어 『교사의 도전』이 나왔는데, 사실 일본어 원서는 『교사의 도전』이 2003년에 먼저 출판되었다. 그만큼 배움의 공동체 수업 자체에 대한 기록이 더 충실하다. 때문에 학교와 지역 전체의 교육개혁 움직임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학교의 도전』이, 배움의 공동체란 기본 개념에 대해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고 싶은 이들은 『교사의 도전』이 적합해 보인다.
그런데 아직 배움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어색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고, 수업의 중심을 학생에게 되돌리자는 일종의 교육운동이다. 교사가 아니라 학생 머릿속에서 실제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배움이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긴밀하게 일어나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수업의 중심에 교수법이 아니라, ‘소통’을 세워놓는다.
예를 들어 교사는 수업과 관계없는 엉뚱한 학생의 발언에 “누구더 없어?”, “다른 의견은?” 대신, “어디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니?”라고 묻는다. 교사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기들끼리 알아서 교환하며 배워 나간다. 아이들끼리 묻고 답하는 수업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도 수준과 환경이 모두 다른 수십 명이 모인 교실에서? 말만 거창한 교육철학이구나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사토 마나부가 기록한 현장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교실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표현이 딱 맞구나 싶은 수십 개의 수업 장면들. ‘박수 세 번!’과 같은 유치한 손 유희가 없어도, ‘땡’ 소리나는 교탁 위 종이 없어도, 아이들은 작은 웅성거림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전개시켜 나간다. 교사는 아이들의 말과 말을 ‘연결’하며, 어디를 모르겠는지 ‘아이와 함께 탐구하는’ 수업을 진행한다. 교사도 아이들도 정말 잘 듣는다. 교사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그들은 “쓸데없이 참견하고 서로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배우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토 마나부는 이 모든 것을 그 특유의 글쓰기 방식 안에 녹여낸다.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는 그만의 글재주는 세심한 관찰과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수업이 눈앞에 펼쳐진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 전체를 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아이 한 명의 작은 탄성을 듣고, ‘난 잘 모르겠는데…’라는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을 듣고, 아이 옆에 살짝 비켜서서 말하는 바를 몸으로 응원해주는 교사의 작은 행동을 본다. 그는 책을 쓴 이유를 “그 도전 속에 싹트고 있는 수업 철학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제시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과연 어떤 교육철학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책장을 열어보자.
이게 진짜 공부다
수업을 고민하는 중등 현직 교사 다섯이 뭉쳤다. 그들의 공통된 교육철학은 교과별 벽을 깨자는 것. 너무 당연한 방향성이라 ‘이게 특별한 건가?’라고 생각하기엔 우리의 교육현실이 좀 서글프다. 단적으로 교사 임용 TO 배정 시 드러나는 교과별 싸움은, 내 과목이 다루는 내용은 절대 다른 교사가 근접해서는 안 된다는 배타성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칼로 자르듯 영역이 뚜렷한가. 책 속 지적처럼 그 구분은 단지 가르치는 이들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사회 속에서 국어가 보이기도 하고, 역사 속에 수학과 과학이 숨어있기도 하니 이 모든 것을 함께 잘 비벼서 가르치자는 게 집필의 취지! 다섯 교사는 이런 생각을 15개의 수업 이야기로 묶어냈다. 본문은 일단 저자들의 전공과목인 수학·과학·국어·사회·역사 다섯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서 한 주제나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수업 사례를 엮은것은 아니고, 일종의 교사 지침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침서라고 하니 좀 지겹지 않을까 싶은 우려는 금물. 그보다 교양서를 읽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특히 서술 방식이 교사가 학생에게 말하는 이야기체로 쓰였기 때문에, 본래 예상 독자는 교과별 통합 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이지만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가 신선한 점이 눈에 띈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나 숨어있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는 우리가 보통 가장 합리적이라 여기는 평균과 다수결이 가진 맹점과 대안을 지적하고, 사회시간에는 하루 8시간 노동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언어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지를 설명해준 국어시간, 이승만의 어두운 부분까지 객관적 기록으로 설명해주는 역사시간도 참 재미있다. 이런 접근은 ‘수학은 지겨워’, ‘역사는 암기과목이야’ 등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관을 깨기에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덤으로 읽고 나면 똑똑해진 듯한 느낌까지!
물론 통섭이란 말을 제목에 사용하기엔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교과를 벽 없이 엮어낸다는 뜻의 통섭교육이라 지칭하기 위해서는, 책의 구성을 과목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엮어 그 안에서 각 과목의 이야기를 담아냈어야 했다. 같은 지점을 저자들도 고민하기에, 상위권 논술처럼 비치는 것이 걱정된다고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시도는 이미 의미가 크다. 문제풀이와 교과서 암기로 가득 찬 교실부터 바꾸려는 것은 가장 작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기
네모난 교실이 쭉 붙어 있고, 그 옆의 긴 복도가 딸린 학교의 구조. 운동장 끝까지 울려 퍼지는 수업 시작 종소리, 교실 앞에 위치한 태극기와 교탁 시간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일상을 저자는 낯설게 바라보자고 말한다. 공교육에 대한 회의감이나 삐딱하게 바라보기가 아니라, “습속이 지니는 보수성” 때문. 익숙한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는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음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형성된 일상은 굳어져 진리가 되어 버린다. 바로 그 순간이 익숙하지 않음에 대해 배타적 시선이 자라는 지점이다. 교과서가 없을 수도 있는데, 시험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지도안을 쓰지 않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수업 비평 연구가로 알려진 이혁규 교수는 조용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묻는다.
본래 이 책은 월간 <우리교육>과 교육공동체벗의 <오늘의 교육>에 연재되었던 ‘교실수업 이야기’ 글을 모아 엮은 것으로, 수업비평의 후속 작업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같은 저자의 『수업, 비평을 만나다』와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가 출간된 후 현장교사들이 수업비평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으나, 막상 실천 활동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돕고자 쓰인 글이다.
우리에게 “교육적 감식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저자는 일단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음으로 바라보자고 말을 건넨다.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에는 산업사회의 시간 개념을 교육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가 감춰져 있고, 본래 스승은 제자가 직접 찾아 나서서 만나는 존재였으며, 학생의 대답에 ‘맞았어요’ 대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롭게 다가온다.
그의 지적은 2부로 넘어가며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 부분에서는 수업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집중적으로 담았는데, 특히 수업지도안과 공개수업에 대한 의견에 공감이 간다. “미리 만들어진 계획에 교사의 실행을 종속시키도록 요구”하는 수업지도안은 “수업과 관련하여 타자와 소통하고 싶은 내용은 교사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다양한 형식이 필요하다고 바라보며, 수업연구대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습”이 빠진 채 풀죽은 연기를 하는 아이들을 지적한다. 수업을 바라보는 안목은 “일상성에 기반한 의미 있는 실천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공개수업 준비로 지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말인 것 같다.
수업을 찬찬히 살피던 저자는 “당신이 학교에서 내는 시험문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대학별 고사에 비추어 더 교육적인가?”라고까지 묻는다. 순간 너무도 마음이 불편해서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칫거린다. 학교시험·대학수학능력시험·대학별 고사 중에 학교시험이 가장 나쁜 시험이 아닌가 묻는 그는, 대입시 제도를 주입식 공부가 불필요한 문제로 바꾸어도 교과서와 문제 풀이식 학교수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새로운 평가 방식을 정작 현장에서는 새로운 수업 방식으로 연결시키지 못함에 대해 “현재의 대입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 방식을 고수하면서 대입시를 방편삼아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사회구조를 핑계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지는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닐 듯하다. 나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며 잘못했다 고백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겠지. 당연함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온 내가 하루아침에 당연하지 않음의 모습이 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담은 근래 혁신학교 움직임에 대한 기대감은 큰 위안이 된다. 교수법 개선 중심의 개인 차원에서 이뤄졌던 기존의 교육운동과는 달리, 혁신학교 운동은 자발성을 기초로 “교사 상호 간의 수업 공개와 소통, 공동 연구를 통해서 함께 성장하는 학습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에게 작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덮으며 저자에게 고마웠다. 비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배우지 않은 방식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 즉,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전문성이라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함께 고민하고 손잡고 가보지 않을는지 조심스레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