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독자가 만난 작가] 추정경 작가와의 만남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2-24 07:17 조회 11,448회 댓글 0건본문
상을 받았거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거나,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이거나, 출판사의 홍보가 빵빵하거나… 대중들에게 주목 받는 소설의 요건이다. 『벙커』는 어떤 것도 해당 사항 없다(『내 이름은 망고』는 상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교육 현장의 선생님들이 눈여겨봤다. “재미있다.” “좋다.” “인상적이다.” “독특하다.” 책을 읽은 선생님들의 간결한 반응들이다. 분명 이 소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건데, 그 특별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작가를 만났다. 반전과도 같은 ‘벙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소설에 집중하게 되듯, 작가와의 대화를 들으며 작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인터뷰 강애라 서울 대치중 국어교사
김광재 학교 밖 독서지도
예주영 서울 숙명여고 사서교사
사진・정리 서정원 기자
벙커, 마음을 형상화하다
예주영 『벙커』는 어떤 정보도 없이 만난 책이었는데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존에 나온 책과 많이 달라서 신선하기도 했고요. 이 책을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쓰셨는지 궁금해요.
추정경 인간의 본성 안에는 내재된 폭력성이 조금씩있고, 환경에 의해 그 본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폭력성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를테면 부모님이라든지, 형제나 친구들이요. 그 폭력성이 어릴 때는 잘 모르는 상태로 숨겨져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이 되는데 제가 끄집어 낸 것은 학교 안에서의 폭력인 셈이죠. 사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은 내재된 폭력이 분출되는 과정일 뿐이고, 그 길의 출발점은 가정 안에서의 폭력이라고 봐요. 스스로가 그 폭력에 대해 인지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죠. 가정 안에서의 폭력이 대물림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마음을 형상화한 것은 우연이었어요. 작품 속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어야 된다고 항상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강철교 위에서 신호대기에 걸려 버린 거예요. 그 맞은편에 한강대교가 있는데, 그 밑에 아치형 교각이 벽돌식으로 쌓여 있었어요. 한강에 저런 다리가 있나 싶게 이국적이고, 노들섬이 중간에 기착지처럼 있는 것도 눈에 두드러지더라고요. 그 순간 저기다가 아이들을 던져 놓고 아이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래서 바로 다음날 그곳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심지어 다리에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 위에서 직접 보고 프레임을 잡아야 작품에서 아이가 올라갔을 때의 모습이나 작품에 대해 구상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다리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거예요. 저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건 아닌가 싶었나 봐요.
어쨌든 주제는 이미 만들어졌고,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정말 좋은 장소를 찾은 셈이었죠.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노들섬 주변 자료조사를 한 다음에 초고를 썼어요.
김광재 『벙커』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나요?
추정경 가제가 ‘십대를 증오한 아이들’이었어요. 대한민국의 십대와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 대부분에게 가혹한 시절이니까요. 하지만 왜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 시절을 우리는 다 증오하면서 견뎌왔지, 왜 견디라고만 하지 싶은 마음이 반영된 제목이었어요. 저는 항상 주제랑 결부시켜서 제목을 쓰려고 해요. 근데 ‘십대를 증오한 아이들’은 너무 강하지 않나 싶어서 두 번째로 낸 가제가 ‘벙커, 마음을 숨기는 곳’이었어요. ‘마음을 숨기는 곳’은 도마뱀의 꼬리처럼 사라져 버리고 벙커만 남았죠.
예주영 원래 판타지나 모험소설 같은 걸 좋아하시나요?
추정경 예. 좋아해요. 저는 요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가독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은 아무래도 스마트폰이나 영상에 익숙한 미디어세대다 보니까 활자를 접했을 때 가독성이 없으면, 손에서 쉽게 놓거든요.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한 번에 쭉 읽어 갈 수 있는 가독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복선과 반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죠. 판타지나 모험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참고가 돼요.
김광재 저도 복선과 반전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어야 아이들이 끝까지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작가님이 읽으신 책 중에서 가독성이 있고 정말 재미있어서 청소년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 있을까요?
추정경 미셸 깽이라는 프랑스 작가의 『처절한 정원』이요.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인데 전 유럽 비평가상을 거의 다 휩쓸다시피 한 책이에요. 100페이지 안팎의 짧은 책인데 가독성이 좋기도 하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가 내려놓을 때는 가슴이 뻐근한 느낌이 드는 책이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굵직한 역사적 메시지를 던져 주면서 한 개인의 아픈 개인사와 역사의 아픔이 같이 맞물려 읽는 내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어요.
김광재 저는 『벙커』가 그랬어요. 읽고 나서 2~3일 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근데 이 책을 읽은 몇몇 중학생은 굉장히 재밌었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세대가 읽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
김광재 『내 이름은 망고』의 배경이 좀 독특해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추정경 앙코르와트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책도 여러 권 읽고, 자료조사도 많이 하고 갔는데, 가기 전에는 생각을 못했다가 막상 유적지를 방문해 보니 너무 관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일반에 공개되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글을 써서 우리한테도 우리 아이들한테도 유적에 대한 얘기를 이끌어내면 어떨까 싶었죠. 또한 그 나이 때의 고민들도 같이 접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됐어요.
예주영 『내 이름은 망고』와 『벙커』를 보면 청소년이 부모님을 떠나서 홀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하는 자립의 시기를 겪더라고요. 그런 건 성장에 필요한 요소로서 의도적으로 넣으신 건지 궁금해요.
추정경 실상을 돌아보면,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부모님 말 안 듣잖아요.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의지는 많으나 일상에 묶여 있죠. 그런데 그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뭔가 할 수 있는 나이가 됐거든요. 몸만 부모님 밑에 묶여 있을 뿐이지, 자기 삶은 자기가 영위하고 있잖아요. 저는 아이한테 선택권을 좀 줬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두 책 다 아이가 부모님 곁을 떠나 있는 상태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이런 설정을 통해 청소년들이 부모님 밑에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나이에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그게 제가 전하려는 유일한 메시지였어요. 사실 저는 책에 작위적인 메시지, 교화적인 메시지를 담는 걸 많이 배제하려고 해요. 근데 쓰다 보면 들어가 있어서 다시 빼요. 그렇게 빼려고 하는데 유일하게 넣고 싶었던 게 그런 주체적인 삶에 대한 것이었어요
.
예주영 그런 내용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 같아요.
강애라 『내 이름은 망고』가 첫 작품인데, 그 전부터 청소년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요?
추정경 습작을 꽤 오래 했어요.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25살 때부터 글을 전문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실은 그 전에 1년 반 정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제가 무역학과를 나왔거든요. 국문과를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상대에 보내셨어요. 그땐 고분고분하게 부모님 의견을 받아들이는 딸이었죠. 어쨌든 IMF세대여서 취직이 쉽지 않았기에 친구들도 단번에 취직된 저를 무척 부러워했는데, 정작 전 그 회사를 다니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회사에 8시 출근인데 7시 반에 지하철을 탈 때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국 라디오작가 시험에 응시했죠. 그때 이제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10년만 참고 열심히 해 보자고 결심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까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어요. 그 결심 이후 8년 만에 등단했으니까요.
청소년소설은 의도하고 썼다기보다 쓰고 나면 청소년소설이었다는 게 더 정확해요. 저랑 코드가 맞았다고 할 수 있겠죠. 더 구체적으로 얘길 하자면 그 대상이 꼭 청소년이 아닌 다음 세대라고 생각해요.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글이라면, 성인이 읽어도 그 작품을 통해 문학의 저변이 확대된다면,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김광재 저도 동의해요. 지금 부모 세대들은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지 못하고 자랐어요. 그런데 지금의 십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이런 책을 더 읽지 않을까 싶어요. 굳이 청소년문학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소설을 쓸 때 어떤 층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게 있었나요?
추정경 제가 중학생 시절엔 학교에서 권장도서를 서른 권 정도 정했었어요. 거기에 한국대표단편집이 많았는데, 현진건, 김동리, 김동인 선생님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권장도서라고 하기에 언니 오빠가 읽던 그 책을 끄집어내서 읽었어요. 어린 나이에 현진건의 「불」이라든지, 나도향의 「뽕」이라든지, 김동인의「감자」를 읽고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아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나의 어린 세계가 깨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 다음 작품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을 일정하게 가두고 싶진 않아요.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차이도 많이 날 뿐더러, 성인소설이나 아주 과격한 문학을 제외한 모든 가치 있는 책들은 청소년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굳이 어떤 나이대나 계층을 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작가를 만든 자유, 열등감 그리고 책
강애라 『내 이름은 망고』나 『벙커』를 보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있잖아요. 그런 상처에 대해 쓸 수 있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작가님이 개인적인 경험이나 간접 경험이 반영된 건가요?
추정경 제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저희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어요. 『내 이름은 망고』의 수아와 비슷한 경우죠. 저는 부도가 나서 저희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는 걸 다 보면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책으로 도망갔어요. 수아에게 도피처가 캄보디아였다면 저에게 도피처는 책이었어요. 아주 열심히 책으로 도망을 다녔어요. 자존감에 금이 가고 상처를 받았어요. 그때는 이런 얘기를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죠. 상처랄까 이런 것들이 곪으려면 곪았을 텐데 주변에서 마법의 가루를 많이 뿌려 주신 것 같아요. 마법의 가루 중 하나가 책이었고요. 그런 힘든 순간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글로 나오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아픔을 그대로 놔뒀으면 열등감으로 커졌을 텐데 책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니 자기 인식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때의 열등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열등감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나한테 부족한 부분이고, 내가 보충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인식을 하는 순간에는 내가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한테나 만나는 사람들한테 열등감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라는 말을 해주는 편이에요.
예주영 열등감을 극복하게 한 것이 책이라고 했는데, 작가님은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의 성품과 교육 방침 등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추정경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자산은 뭐든지 할 수 있게 한 자유라고 생각해요. 별로 억압을 안 하셨어요. 예전에 사람들과 얘기할 때, 100억이 생기면 뭐 할 거냐고 물었는데, 대부분 돈으로 뭘 한다는 얘기, 세계 여행을 갈 거라든지, 누구에게도 얘기 안하고 저축을 한 다음 돈을 조금씩 찾아서 알뜰하게 살 거라든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한테 그 질문이 왔을 때 저는 싫은데도 돈 때문에 해야 하는 모든일을 안 할 거라고 대답을 했어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만큼 하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20대 중반에 잠깐 대필을 했었는데 작가를 지향하면서 대필을 하는 것이 영혼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였어요. 어쨌든 돈이 생기면 하기 싫은 일을 당장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자양분이 됐던 것이 어릴 때 가정환경이었고요.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라고 항상 주지를 시켜주셨어요. 엄마도 강요를 안 하셨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이 자유를 가르쳐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뭔가 할 수 있는 자유, 하기 싫은 걸 안 할 선택권을 주는 거요. 물질적인 유복함을 떠나서 자기 삶의 주체적인 선택권은 자신한테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만약 지금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으세요? 추정경 돌아간다면 작가가 되려는 목표는 변함이 없을 테고, 신나게 놀 것 같아요. 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서 연극도 해 보고 싶고, 연극 연출도 해 보고 싶고, 극작가로서 대본도 써 보고, 조명팀에서 목장갑 끼고 조명도 잡아 보고 싶어요. 주연뿐만 아니라 단역의 삶 곳곳에 내려가 모든 배역의 삶을 살아 보고 싶은 욕심이겠죠.
소설을 향한 완행버스의 여정
김광재 작가가 되기 위해 보통 문예창작과를 나오거나 어문 계열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작가님은 무역학을 전공하셨더라고요. 이런 점이 작가로서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추정경 완행버스를 탔다고 생각해요. 여행을 떠날 때, 여행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잖아요. 완행버스 타고 돌면서 많이 봤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해야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좀 덜 수 있을까 싶어서요. (웃음) 20대 중반까지는 왜 나를 상대에 보내서 빙빙 돌아가게 했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거든요.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 길과 먼 전공을 택하는 건 좋은 답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흔치 않고, 또 중간에 그 길을 벗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되길 원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김광재 다른 걸 공부하면서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꿈과 롤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추정경 좋은 롤모델은 아닌 것 같아요. 가끔씩 방송작가를 하다가 이렇게 등단해서 글을 쓸 수도 있냐고 물어보는데 방송 글과 순수문학은 단거리와 장거리 달리기 선수만큼이나 다른 분야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되도록 정석대로 가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강애라 작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려요.
추정경 보통 작가가 되려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이중에서 특히 다독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거꾸로였어요. 다독이 먼저가 아니라 다상량이 먼저였어요. 공상이 나쁜 말로 하면 멍 때리고 있는 건데, 저는 어릴 때부터 엉뚱한 상상을 많이 했었어요. 아이들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게 생각하는 힘을 키워 줘야 하는데 부모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하고 책이나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게 왜 그런지 생각해 보고, 거기
서 엉뚱한 생각을 이끌어내야 독서할 때 더 큰 시너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끌어 준 다음에 책 읽자는 얘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제일끝이 다작이에요. 책을 읽을 때 꼭 독후감 쓸 걸 염두에 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글 쓰는 건 한참 뒤의 일일수도 있고, 오히려 견문을 넓히거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원래 되고 싶었던 게 소설가인가요? 추정경 전방위적인 글을 쓰고 싶었어요. 제가 라디오 작가를 시작했던 것도 그게 가능할 것 같아서였어요. 라디오는 특히 프로듀서의 힘이 크거든요. 프로듀서가 원고의 방향도 잡고 큐시트도 만들고 때로는 오프닝을 같이 쓸 때도 있어요. 그래서 방송 작가를 택했는데 쓰다 보니까 내 글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스크립트가 남지 않거든요. 물론 보관은 하지만 작가의 이름은 남지 않고 내 작품이라고 모을 수도 없어요.
거기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소설 쪽에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라디오,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글을 썼던 게 제가 지금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광재 계속 혼자 쓰셨나요?
추정경 드라마 작가를 할 때는 작가 선생님 문하생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선생님이 아침드라마 쓰실 때 보조 작가로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너는 구어체를 쓰라고 던져 놨더니 문어체를 쓰고 있냐?” 이러시는 거예요. 제 스스로도 저는 방송 쪽보다는 순수문학 쪽이 더 잘 맞았던 걸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지적해 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은 주로 저한테 대본이 아니라 기획안을 쓰라고 주셨어요. 기획안은 문학 쪽 능력을 발휘해야 하거든요. 경력이 많은 작가들도 대본은 잘 쓰는데 기획안을 잘 못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대사는 못 쓰면서 기획안만 잘 만드는 거예요. 기획 의도라든가 줄거리라든가 그런 거죠.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강 건너편인데 왜 여기 와서 낑낑대고 있나 싶으셨겠죠. 그래서 하직을하고 본격적으로 제 글을 썼어요.
예주영 작품을 구상하고 취재하는 작업이 꽤 걸리시나 봐요?
추정경 그게 작가마다 달라요. 작가 모임에서 보니까 어떤 작가는 초고를 쓰는 데 1년 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대개 초고가 오래 걸린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출발점이 방송작가여서 그런지 초고보다 자료 조사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편이에요. 자조사하고 얼개를 만들 때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쓰기 때문에 모든 인물과 배경을 꿰뚫고 나서야 한 번에 쓰지, 머릿속에 다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초고를 쓰지는 못해요. 자료 입력을 해 놓고 그 다음에 출발하는 게 제 특성인 것 같아요.
김광재 다른 작품도 많이 읽으실 것 같은데,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시거나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추정경 이옥수 선생님을 좋아해요.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낮은 부분, 빈민가나 탄광촌 등 소외된 지역에 찾아가서 그곳의 이야기를 글로 형상화시키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옥수 선생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빈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참 좋아요.
강애라 책의 앞쪽 ‘작가 소개’ 부분을 보면 “수십 년을 자란 나무를 베어 그 종이를 취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는데요,‘가치가 있는 글’이 어떤 글인가요?
추정경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것보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가 보리출판사의 슬로건인데, 저역시 그 가치를 제 신념으로 삼고 있어요.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건 울림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책이 나오기까지 한 작가의 영혼이 그 속에 들락날락한거잖아요. 그렇게 작가의 영혼이 녹아 있는 책이라면 읽는 사람의 영혼에 울림을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크건 작건 울림이 있는 책이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해요.
김광재 다음 작품이 궁금한데요, 살짝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추정경 최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무한 경쟁으로 가다 보니 너무 대안이 없는 삶을 살고 있고, 환경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세대에게 있는데 우리는 다음 세대의 환경에 대한 권리까지 박탈해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 다음 세대한테 건강한 사회를 물려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다가 건강하게 상생하는 사회에 대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들이 건강한 사회가 있다는 대안을 던져주고, 아이들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게끔 하면 좋겠어요. 저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읽는 사람이 찾았으면 좋겠어요.
예주영 작가님은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으신 것 같아요.
추정경 사회문제나 기득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내가 과연 기득권을 가지고, 그런 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가에 대해서요. 저는 이옥수 선생님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김광재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써 주시길 바라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작가님의 소설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정경
울산에서 태어났다. 답답한 학교 안에서 책을 출구로 삼았고 그러다 소설 쓰기를 꿈꾸었다. 소설을 향한 완행
버스의 여정은 길고 힘들었지만, 하늘은 쓰지 않는 재주를 거두어 간다는 말에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처음 소
설가를 꿈꾸었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 세대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수십 년을 자란
나무를 베어 그 종이를 취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첫 장편소설 『내 이름은 망고』
로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인터뷰 강애라 서울 대치중 국어교사
김광재 학교 밖 독서지도
예주영 서울 숙명여고 사서교사
사진・정리 서정원 기자
벙커, 마음을 형상화하다
예주영 『벙커』는 어떤 정보도 없이 만난 책이었는데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존에 나온 책과 많이 달라서 신선하기도 했고요. 이 책을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쓰셨는지 궁금해요.
추정경 인간의 본성 안에는 내재된 폭력성이 조금씩있고, 환경에 의해 그 본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폭력성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를테면 부모님이라든지, 형제나 친구들이요. 그 폭력성이 어릴 때는 잘 모르는 상태로 숨겨져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이 되는데 제가 끄집어 낸 것은 학교 안에서의 폭력인 셈이죠. 사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은 내재된 폭력이 분출되는 과정일 뿐이고, 그 길의 출발점은 가정 안에서의 폭력이라고 봐요. 스스로가 그 폭력에 대해 인지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죠. 가정 안에서의 폭력이 대물림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마음을 형상화한 것은 우연이었어요. 작품 속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어야 된다고 항상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강철교 위에서 신호대기에 걸려 버린 거예요. 그 맞은편에 한강대교가 있는데, 그 밑에 아치형 교각이 벽돌식으로 쌓여 있었어요. 한강에 저런 다리가 있나 싶게 이국적이고, 노들섬이 중간에 기착지처럼 있는 것도 눈에 두드러지더라고요. 그 순간 저기다가 아이들을 던져 놓고 아이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래서 바로 다음날 그곳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심지어 다리에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 위에서 직접 보고 프레임을 잡아야 작품에서 아이가 올라갔을 때의 모습이나 작품에 대해 구상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다리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거예요. 저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건 아닌가 싶었나 봐요.
어쨌든 주제는 이미 만들어졌고,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정말 좋은 장소를 찾은 셈이었죠.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노들섬 주변 자료조사를 한 다음에 초고를 썼어요.
김광재 『벙커』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나요?
추정경 가제가 ‘십대를 증오한 아이들’이었어요. 대한민국의 십대와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 대부분에게 가혹한 시절이니까요. 하지만 왜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 시절을 우리는 다 증오하면서 견뎌왔지, 왜 견디라고만 하지 싶은 마음이 반영된 제목이었어요. 저는 항상 주제랑 결부시켜서 제목을 쓰려고 해요. 근데 ‘십대를 증오한 아이들’은 너무 강하지 않나 싶어서 두 번째로 낸 가제가 ‘벙커, 마음을 숨기는 곳’이었어요. ‘마음을 숨기는 곳’은 도마뱀의 꼬리처럼 사라져 버리고 벙커만 남았죠.
예주영 원래 판타지나 모험소설 같은 걸 좋아하시나요?
추정경 예. 좋아해요. 저는 요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가독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은 아무래도 스마트폰이나 영상에 익숙한 미디어세대다 보니까 활자를 접했을 때 가독성이 없으면, 손에서 쉽게 놓거든요.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한 번에 쭉 읽어 갈 수 있는 가독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복선과 반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죠. 판타지나 모험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참고가 돼요.
김광재 저도 복선과 반전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어야 아이들이 끝까지 읽을 수 있으니까요. 작가님이 읽으신 책 중에서 가독성이 있고 정말 재미있어서 청소년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 있을까요?
추정경 미셸 깽이라는 프랑스 작가의 『처절한 정원』이요.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인데 전 유럽 비평가상을 거의 다 휩쓸다시피 한 책이에요. 100페이지 안팎의 짧은 책인데 가독성이 좋기도 하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가 내려놓을 때는 가슴이 뻐근한 느낌이 드는 책이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굵직한 역사적 메시지를 던져 주면서 한 개인의 아픈 개인사와 역사의 아픔이 같이 맞물려 읽는 내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어요.
김광재 저는 『벙커』가 그랬어요. 읽고 나서 2~3일 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근데 이 책을 읽은 몇몇 중학생은 굉장히 재밌었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세대가 읽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
김광재 『내 이름은 망고』의 배경이 좀 독특해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추정경 앙코르와트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책도 여러 권 읽고, 자료조사도 많이 하고 갔는데, 가기 전에는 생각을 못했다가 막상 유적지를 방문해 보니 너무 관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일반에 공개되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글을 써서 우리한테도 우리 아이들한테도 유적에 대한 얘기를 이끌어내면 어떨까 싶었죠. 또한 그 나이 때의 고민들도 같이 접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됐어요.
예주영 『내 이름은 망고』와 『벙커』를 보면 청소년이 부모님을 떠나서 홀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하는 자립의 시기를 겪더라고요. 그런 건 성장에 필요한 요소로서 의도적으로 넣으신 건지 궁금해요.
추정경 실상을 돌아보면,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부모님 말 안 듣잖아요.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의지는 많으나 일상에 묶여 있죠. 그런데 그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뭔가 할 수 있는 나이가 됐거든요. 몸만 부모님 밑에 묶여 있을 뿐이지, 자기 삶은 자기가 영위하고 있잖아요. 저는 아이한테 선택권을 좀 줬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두 책 다 아이가 부모님 곁을 떠나 있는 상태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이런 설정을 통해 청소년들이 부모님 밑에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나이에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그게 제가 전하려는 유일한 메시지였어요. 사실 저는 책에 작위적인 메시지, 교화적인 메시지를 담는 걸 많이 배제하려고 해요. 근데 쓰다 보면 들어가 있어서 다시 빼요. 그렇게 빼려고 하는데 유일하게 넣고 싶었던 게 그런 주체적인 삶에 대한 것이었어요
.
예주영 그런 내용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 같아요.
강애라 『내 이름은 망고』가 첫 작품인데, 그 전부터 청소년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요?
추정경 습작을 꽤 오래 했어요.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25살 때부터 글을 전문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실은 그 전에 1년 반 정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제가 무역학과를 나왔거든요. 국문과를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상대에 보내셨어요. 그땐 고분고분하게 부모님 의견을 받아들이는 딸이었죠. 어쨌든 IMF세대여서 취직이 쉽지 않았기에 친구들도 단번에 취직된 저를 무척 부러워했는데, 정작 전 그 회사를 다니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회사에 8시 출근인데 7시 반에 지하철을 탈 때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국 라디오작가 시험에 응시했죠. 그때 이제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10년만 참고 열심히 해 보자고 결심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까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어요. 그 결심 이후 8년 만에 등단했으니까요.
청소년소설은 의도하고 썼다기보다 쓰고 나면 청소년소설이었다는 게 더 정확해요. 저랑 코드가 맞았다고 할 수 있겠죠. 더 구체적으로 얘길 하자면 그 대상이 꼭 청소년이 아닌 다음 세대라고 생각해요.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글이라면, 성인이 읽어도 그 작품을 통해 문학의 저변이 확대된다면,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김광재 저도 동의해요. 지금 부모 세대들은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지 못하고 자랐어요. 그런데 지금의 십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이런 책을 더 읽지 않을까 싶어요. 굳이 청소년문학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소설을 쓸 때 어떤 층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게 있었나요?
추정경 제가 중학생 시절엔 학교에서 권장도서를 서른 권 정도 정했었어요. 거기에 한국대표단편집이 많았는데, 현진건, 김동리, 김동인 선생님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권장도서라고 하기에 언니 오빠가 읽던 그 책을 끄집어내서 읽었어요. 어린 나이에 현진건의 「불」이라든지, 나도향의 「뽕」이라든지, 김동인의「감자」를 읽고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아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나의 어린 세계가 깨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 다음 작품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을 일정하게 가두고 싶진 않아요.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차이도 많이 날 뿐더러, 성인소설이나 아주 과격한 문학을 제외한 모든 가치 있는 책들은 청소년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굳이 어떤 나이대나 계층을 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작가를 만든 자유, 열등감 그리고 책
강애라 『내 이름은 망고』나 『벙커』를 보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있잖아요. 그런 상처에 대해 쓸 수 있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작가님이 개인적인 경험이나 간접 경험이 반영된 건가요?
추정경 제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저희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어요. 『내 이름은 망고』의 수아와 비슷한 경우죠. 저는 부도가 나서 저희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는 걸 다 보면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책으로 도망갔어요. 수아에게 도피처가 캄보디아였다면 저에게 도피처는 책이었어요. 아주 열심히 책으로 도망을 다녔어요. 자존감에 금이 가고 상처를 받았어요. 그때는 이런 얘기를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죠. 상처랄까 이런 것들이 곪으려면 곪았을 텐데 주변에서 마법의 가루를 많이 뿌려 주신 것 같아요. 마법의 가루 중 하나가 책이었고요. 그런 힘든 순간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글로 나오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아픔을 그대로 놔뒀으면 열등감으로 커졌을 텐데 책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니 자기 인식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때의 열등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열등감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나한테 부족한 부분이고, 내가 보충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인식을 하는 순간에는 내가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한테나 만나는 사람들한테 열등감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자신에게 열등감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라는 말을 해주는 편이에요.
예주영 열등감을 극복하게 한 것이 책이라고 했는데, 작가님은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의 성품과 교육 방침 등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추정경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자산은 뭐든지 할 수 있게 한 자유라고 생각해요. 별로 억압을 안 하셨어요. 예전에 사람들과 얘기할 때, 100억이 생기면 뭐 할 거냐고 물었는데, 대부분 돈으로 뭘 한다는 얘기, 세계 여행을 갈 거라든지, 누구에게도 얘기 안하고 저축을 한 다음 돈을 조금씩 찾아서 알뜰하게 살 거라든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한테 그 질문이 왔을 때 저는 싫은데도 돈 때문에 해야 하는 모든일을 안 할 거라고 대답을 했어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만큼 하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20대 중반에 잠깐 대필을 했었는데 작가를 지향하면서 대필을 하는 것이 영혼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였어요. 어쨌든 돈이 생기면 하기 싫은 일을 당장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자양분이 됐던 것이 어릴 때 가정환경이었고요.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라고 항상 주지를 시켜주셨어요. 엄마도 강요를 안 하셨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이 자유를 가르쳐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뭔가 할 수 있는 자유, 하기 싫은 걸 안 할 선택권을 주는 거요. 물질적인 유복함을 떠나서 자기 삶의 주체적인 선택권은 자신한테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만약 지금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으세요? 추정경 돌아간다면 작가가 되려는 목표는 변함이 없을 테고, 신나게 놀 것 같아요. 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서 연극도 해 보고 싶고, 연극 연출도 해 보고 싶고, 극작가로서 대본도 써 보고, 조명팀에서 목장갑 끼고 조명도 잡아 보고 싶어요. 주연뿐만 아니라 단역의 삶 곳곳에 내려가 모든 배역의 삶을 살아 보고 싶은 욕심이겠죠.
소설을 향한 완행버스의 여정
김광재 작가가 되기 위해 보통 문예창작과를 나오거나 어문 계열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작가님은 무역학을 전공하셨더라고요. 이런 점이 작가로서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추정경 완행버스를 탔다고 생각해요. 여행을 떠날 때, 여행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잖아요. 완행버스 타고 돌면서 많이 봤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해야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좀 덜 수 있을까 싶어서요. (웃음) 20대 중반까지는 왜 나를 상대에 보내서 빙빙 돌아가게 했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거든요.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 길과 먼 전공을 택하는 건 좋은 답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흔치 않고, 또 중간에 그 길을 벗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되길 원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김광재 다른 걸 공부하면서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꿈과 롤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추정경 좋은 롤모델은 아닌 것 같아요. 가끔씩 방송작가를 하다가 이렇게 등단해서 글을 쓸 수도 있냐고 물어보는데 방송 글과 순수문학은 단거리와 장거리 달리기 선수만큼이나 다른 분야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되도록 정석대로 가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강애라 작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려요.
추정경 보통 작가가 되려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이중에서 특히 다독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거꾸로였어요. 다독이 먼저가 아니라 다상량이 먼저였어요. 공상이 나쁜 말로 하면 멍 때리고 있는 건데, 저는 어릴 때부터 엉뚱한 상상을 많이 했었어요. 아이들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게 생각하는 힘을 키워 줘야 하는데 부모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하고 책이나 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게 왜 그런지 생각해 보고, 거기
서 엉뚱한 생각을 이끌어내야 독서할 때 더 큰 시너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끌어 준 다음에 책 읽자는 얘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제일끝이 다작이에요. 책을 읽을 때 꼭 독후감 쓸 걸 염두에 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글 쓰는 건 한참 뒤의 일일수도 있고, 오히려 견문을 넓히거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강애라 원래 되고 싶었던 게 소설가인가요? 추정경 전방위적인 글을 쓰고 싶었어요. 제가 라디오 작가를 시작했던 것도 그게 가능할 것 같아서였어요. 라디오는 특히 프로듀서의 힘이 크거든요. 프로듀서가 원고의 방향도 잡고 큐시트도 만들고 때로는 오프닝을 같이 쓸 때도 있어요. 그래서 방송 작가를 택했는데 쓰다 보니까 내 글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스크립트가 남지 않거든요. 물론 보관은 하지만 작가의 이름은 남지 않고 내 작품이라고 모을 수도 없어요.
거기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소설 쪽에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라디오,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글을 썼던 게 제가 지금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광재 계속 혼자 쓰셨나요?
추정경 드라마 작가를 할 때는 작가 선생님 문하생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선생님이 아침드라마 쓰실 때 보조 작가로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너는 구어체를 쓰라고 던져 놨더니 문어체를 쓰고 있냐?” 이러시는 거예요. 제 스스로도 저는 방송 쪽보다는 순수문학 쪽이 더 잘 맞았던 걸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지적해 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은 주로 저한테 대본이 아니라 기획안을 쓰라고 주셨어요. 기획안은 문학 쪽 능력을 발휘해야 하거든요. 경력이 많은 작가들도 대본은 잘 쓰는데 기획안을 잘 못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대사는 못 쓰면서 기획안만 잘 만드는 거예요. 기획 의도라든가 줄거리라든가 그런 거죠.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강 건너편인데 왜 여기 와서 낑낑대고 있나 싶으셨겠죠. 그래서 하직을하고 본격적으로 제 글을 썼어요.
예주영 작품을 구상하고 취재하는 작업이 꽤 걸리시나 봐요?
추정경 그게 작가마다 달라요. 작가 모임에서 보니까 어떤 작가는 초고를 쓰는 데 1년 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대개 초고가 오래 걸린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출발점이 방송작가여서 그런지 초고보다 자료 조사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편이에요. 자조사하고 얼개를 만들 때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쓰기 때문에 모든 인물과 배경을 꿰뚫고 나서야 한 번에 쓰지, 머릿속에 다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초고를 쓰지는 못해요. 자료 입력을 해 놓고 그 다음에 출발하는 게 제 특성인 것 같아요.
김광재 다른 작품도 많이 읽으실 것 같은데,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시거나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추정경 이옥수 선생님을 좋아해요.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낮은 부분, 빈민가나 탄광촌 등 소외된 지역에 찾아가서 그곳의 이야기를 글로 형상화시키시는 것 같아요. 저는 이옥수 선생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빈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참 좋아요.
강애라 책의 앞쪽 ‘작가 소개’ 부분을 보면 “수십 년을 자란 나무를 베어 그 종이를 취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는데요,‘가치가 있는 글’이 어떤 글인가요?
추정경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것보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가 보리출판사의 슬로건인데, 저역시 그 가치를 제 신념으로 삼고 있어요.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건 울림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책이 나오기까지 한 작가의 영혼이 그 속에 들락날락한거잖아요. 그렇게 작가의 영혼이 녹아 있는 책이라면 읽는 사람의 영혼에 울림을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크건 작건 울림이 있는 책이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해요.
김광재 다음 작품이 궁금한데요, 살짝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추정경 최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무한 경쟁으로 가다 보니 너무 대안이 없는 삶을 살고 있고, 환경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세대에게 있는데 우리는 다음 세대의 환경에 대한 권리까지 박탈해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 다음 세대한테 건강한 사회를 물려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다가 건강하게 상생하는 사회에 대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들이 건강한 사회가 있다는 대안을 던져주고, 아이들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게끔 하면 좋겠어요. 저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읽는 사람이 찾았으면 좋겠어요.
예주영 작가님은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으신 것 같아요.
추정경 사회문제나 기득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내가 과연 기득권을 가지고, 그런 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가에 대해서요. 저는 이옥수 선생님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김광재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써 주시길 바라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작가님의 소설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정경
울산에서 태어났다. 답답한 학교 안에서 책을 출구로 삼았고 그러다 소설 쓰기를 꿈꾸었다. 소설을 향한 완행
버스의 여정은 길고 힘들었지만, 하늘은 쓰지 않는 재주를 거두어 간다는 말에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처음 소
설가를 꿈꾸었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 세대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다. 수십 년을 자란
나무를 베어 그 종이를 취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첫 장편소설 『내 이름은 망고』
로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