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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뜨거운 선각들, 도서관에 희망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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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21 22:15 조회 10,24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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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 근대적 의미의 학교도서관을 처음 만들다
1950년 가을 북한군이 후퇴한 직후, 박경원은 진주여자고등학교(당시 6년제 여자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심한 전재戰災를 입고 도심부의 70퍼센트가 소실된 진주의 상황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겨우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학생들 중에는 피난 갈 때 입고 나간 하복을 그대로 입고 오는 학생도 있었다. 교과서는 물론 공책 한 권 없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학교 건물도 거의 소실되어 교장 사택의 안방에서는 교직원들이 사무를 보고, 사랑방에서는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를 했다. 교사校舍를 복구하는 것도 걱정거리였으나, 박 교장은 학생들에게 읽을 책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 박 교장은 도서관을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도서관을 만든다는 말인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전쟁 중에 거의 중단됐던 검인정 교과서가 1952년 신학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하면서 업자간의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고, 중간 공급자도 상당한 정도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박 교장은 중간 공급자를 거치지 않고 교과서를 학교에서 직접 공급하여 남는 차액을 전액 도서비에 충당하기로 했다. 교과서를 배급하는 일이 당시에도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서 확보한 돈이 150만원 정도였다. 여기에다 학도호국단비에서 꽤 많은 액수를 도서비로 배정했다. 이렇게 확보한 돈으로 도서관을 개관할 때 약 천권 정도의 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절반 정도 복구된 교사에서 교실 한 칸을 도서관으로 확보하고 건축 재료의 일부를 활용하여 직접 열람대와 서가를 만들었다. 얇은 종이를 여러겹으로 붙여서 카드를 만들고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북엔드를 만들었다. 전 교직원의 노력과 협력으로 1952년 4월 하순경 ‘尙友文庫’라는 간판을 건 도서관이 진주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맞이하게 됐다. 단순한 독서시설이 아니고 교수 학습 과정을 지원하는 학습자원센터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학교도서관 효시로 기록되는 이 도서관은 애석하게도 1957년 화재로 교사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김경일, 학교도서관을 기반으로 한 교육방법을 찾다
1954년 봄에 마산여자고등학교로 옮겨 간 박 교장은 거기서도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문교부로부터 학교도서관 연구학교로 지정을 받은 것이다. 당시 문교부 장학관으로 있던 이창갑(후에인천 제물포고 교장 역임)이 마산여고를 연구학교로 지정한 것이다. 박 교장은 교사들 중 유능하고 열의가 있는 김세익 선생에게 도서관을 맡겨 운영하게 했다. 3년간의 연구학교 경험을 쌓아 1956년 11월 7일에는 연구발표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전국에서 500여 명의 장학 담당자, 교장, 교감, 교사 들이 참석했다. 이 발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학교도서관의 효용과 운영 방법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김경일이 학교도서관을 진지하게 만난 것도 이 연구발표회에서였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으로 있으면서 충무상업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김경일은 일제시대의 교육 방법이 그대로 지배하는 학교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뭔가 다른 교육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마산여고의 연구발표회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하는 교육 방법에 입각한 학교도서관을 접하고 뭔가 가능성을 느끼게 됐다. 그때부터 외국에서 나온 학교도서관 관련 책을 열심히 읽고 학교도서관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교육 방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서울로 올라온 김경일은 경기고등학교에서 김원규 교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도서관을 만들 수 있었다. 교실 일곱 칸 규모의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외국 자료를 참고하여 모든 가구와 용품을 직접 설계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이 개관한 1958년 10월 3일 ‘대통령만 안 오고 고관대작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고 한다. 경기고등학교의 도서관개관은 1959년 3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탄생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의 도서관 건립에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학교도서관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김두홍,학교도서관을 완전한 ‘개가제’로 운영하다
한편 우리나라 학교도서관 운동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기록되는 김두홍은, 군 제대 후 경남고등학교에서 지리 교사로 재직하던 중 박경원 교장과 함께 초기 학교도서관 운동에 불을 지핀 추월영 교장의 권유로 1956년부터 도서관을 맡게 됐다. 워낙 열성적인 독서가였으며 병참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군대 시절에 도서관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보임補任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도서관의 역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1957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도서관을 완전 ‘개가제’로 전환하여 운영했다. 동료 교사들은 책 분실 문제를 들어 그 결정을 강하게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개의치 않고 개가제를 단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까지는 학교도서관이라고 하는 것이 방과 후에 학생들이 가서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이나 읽는 장소로 생각되었거든요. 그런데 학교도서관은 그것보다는 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활용해서 교육 과정을 전개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말은 각 교사들이 가르치는 교과목과 도서관 자료가 연계되어서 교사도 활용하고 학생들도 활용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바꿨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하루 종일 도서관 문은 열려 있어야 된다고 생각이 차차 전환되어 갔죠. 그리고 교사들이 교안을 작성할 때는 교과내용에 관계되는 참고자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도서관 청구번호까지 명시해서 제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사가 교안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도서관 자료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다음 학생들도 그 수업을 들으면서 도서관

자료를 활용하게 되는 거지요. 돌아보면 여러 가지 여건은 불비했지만 그때가 오히려 학교도서관의 기능은 본질에 더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도서관이 완전히 개가제로 운영된 것은 아마 경남고등학교도서관이 처음일 겁니다. 학생들이 독서 취미에 따라서 그냥 책을 읽겠다고 하면 반드시 개가제가 필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내가 무슨 책을 읽겠다고 신청하면 그 책을 내주면 되는 건데, 자율학습과 연결시키다보니까 학생들 스스로 서가에 접근해서 자기가 공부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를 찾아내야 되는 거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개가제가 시행된 거지요.



박태신, 학교도서관을 활용한 수업방법에 매달리다
김두홍과 함께 경남(부산)의 학교도서관 운동을 이끈 사람은 박태신이다. 책을 유난히 좋아한 역사 교사 박태신은 사천중학교와 진주중학교를 거쳐 1957년에 진주고등학교에 부임했다. 박 선생은 무척 기뻤다. 서부 경남의 명문 고등학교에 부임해서가 아니라 그 학교에 교실 세 칸 크기의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과서 내용만 가르치고 학생은 그것을 달달 외우기만 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는, 도서관의 책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쳤다.

마산여고에서 진주고등학교로 옮겨온 박경원 교장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도서관을 맡고 있던 그는 1958년 서울에서 개최된 사서교사 연수에 참석하게 됐다. 이 연수를 통해 그는 도서관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한 엄대섭의 강의,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을 소개한 명재휘의 강의, 백린의 자료 분류론 강의등을 들으며 도서관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부심 충만한 ‘사서교사’가 된 그는 1958년과 1959년에 세 번이나 학교도서관 연구발표회를 하여 학교도서관 바람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발표 내용은 주로 도서관을 활용한 수업 방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주제의 발표회를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종성, 「학교도서관이 살아야 교육이 선다: 대담, 학교도서관운동가를 찾아서-①김두홍 선생」,<도서관문화> 39권 4호(1998.7·8), 9-10쪽
✽✽김종성, 「학교도서관이 살아야 교육이 선다: 대담, 학교도서관운동가를 찾아서-②박태신 선생」,<도서관문화> 39권 5호(1998.9·10), 22-23쪽

가령 국사 교과서다 하면 그 속에 대원군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내용을 선생이 칠판에 줄줄 쓰고 ‘이거 시험에 나온다’ 하고 잘외워 두라 하면 끝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도서관 자료와 직결시켜서 스스로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준비도 없이 연구발표회를 했습니다. (중략)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선생들이 자기 아는 지식만 가지고 참고서 한 권 베껴서 준비해 가지고 시험에 낸다 하고 학생들을 협박만 하거든요. 그게 내 양심에 안 맞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으로 연구발표회를 하게 된 겁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흘러간 옛노래에 지나지않는 것일까
5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꿈과 삶을 생각해본다. 학교도서관에 희망을 건 선각자들의 열정과 신념은 흘러간 옛 노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아이들에게 행복한 학교와 건강한 교육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우리에게 학교도서관 운동가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역사는 기록과 기억 속에서 숨죽이지 않는다. 살아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반세기전 학교도서관에 희망을 걸고 앞서 걸어갔던 그들의 육성은 절망의 시대,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더욱 또렷하고 생생하게 들려온다.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어떤 신념으로 그 길을 걸었는지.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자율학습의 방향으로 교육의 방법을 바꿔야 된다고 했지요. 자율 학습을 얘기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 수단이 되는 여러 가지 자료가 필요하게 되었죠.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의 자율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학교도서관을 만들어서 자료를 마련해줘야 된다는 인식이 생긴 겁니다. 말하자면 새 교육의 분위기가 선각자들을 움직였고, 교육을 개혁해보겠다는 의지가 결국 학교도서관이라는 방법에 집중하게 된 거지요.✽

당시 우리는 사서교사가 ‘마스터 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교과에다 통하는 열쇠라는 의미지요. 일반 교과 교사는 자기가 담당하는 과목에만 통하는데 반해 사서교사는 모든 교과목에 다 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고업무나 도서관 이용지도를 통하여 모든 교과 수업을 지원하고 수업 개혁에도 직접 참여할 수가 있다는 생각을 이미 확립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김종성, 「학교도서관이 살아야 교육이 선다: 대담, 학교도서관운동가를 찾아서-①김두홍 선생」,<도서관문화> 39권 4호(1998.7·8), 11쪽
✽✽ 김종성, 「학교도서관이 살아야교육이 선다: 대담, 학교도서관 운동가를 찾아서-③조재후 선생」,<도서관문화> 39권 6호(1998.11·12),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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