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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애쓰며 번역하다 배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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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5-11-06 16:29 조회 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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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며 번역하다 배우는 것들


나는 주로 그림책과 짧은 분량의 동화책을 번역한다. 그런데 번역문을 만드는 데 쓰는 시간보다 편집자와 PDF 파일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훨씬 길 때도 있다. 번역하는 시간에는 이 교정 작업 과정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신수진 어린이책 번역가

 
번역의 난제, 원작자와 번역가의 성향 차이
원저자가 왠지 나와 비슷한 성향인 것 같은 때엔 번역가로서 편집자의 질문이나 이의 제기에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편집자와 대화하는 과정에서도 ‘원저자의 의도가 과연 이게 맞을까’ 싶어 대답을 해 놓고도 내내 걱정에 휩싸여 지낸다. 여러 번 고백한 이야기인데, 내가 프리랜서 번역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준 ‘13층 나무 집’ 시리즈(전 13권, 앤디 그리피스 지음, 테리 덴톤 그림, 시공주니어)는 나와 정반대 성격을 가진 작가 두 사람이 한껏 신이 나서 만든 책이어서 작가들의 진심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책을 즐기는 독자 입장에서는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설정과 문장들이지만, 이를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번역가로서는 원문의 뜻을 직관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잘 알아들어야 하는데, 두 작가의 유머가 나로서는 영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았다. 다행히 당시 편집자님이 작가들 특유의 유머 코드를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이라서, 딱딱했던 내 문장들이 자연스럽고 재미난 한국어 번역문이 될 수 있었다. 두고두고 감사드릴 일이다. 애초에 번역을 맡을지 말지를 결정할 때 번역할 책의 저자가 나와 성향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가능하지만, 영 이해가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는 큰 걸림돌은 아니다. 오히려 ‘이거 내가 쓴 건가?’ 싶을 정도로 나랑 잘 맞는 원고는 대중성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나는 흥행작 감별을 정말 못하기 때문이다, 흑흑). 작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독자로서의 내가 보기에 재미있는가’이다. 출판사에서 신중한 검토를 거쳐서 출간을 결정한 원고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할 만한 의의는 이미 충분하겠지만, 아주 가끔은 ‘굳이 출간하셔야 할까요…?’라고 오지랖을 부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최근에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성향의 두 작품을 한꺼번에 작업하느라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번역이 열어 준 또 다른 배움
지난 9월에 출간된 『안 될 거 없지』라는 작품은 번역 원고를 넘긴 뒤 2개월 정도 만에 출간되었다. 나로서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위기에 처한 비인간 동물들이 힘을 합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강 영웅이 되는 이야기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더 나은 내일을 꿈꾸기 위해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유쾌하게 상상하고 사려 깊게 질문하는 내용이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우리 인간의 책임 의식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도 비인간 존재들의 성원권을 인정한 민주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막을 수 없어’라는 뜻의 Unstoppable인데, 우리말 제목

후보로 가장 먼저 떠올랐던 문구는 동명의 시트콤 제목인 ‘웬만해선 우리

를 막을 수 없다!’였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안 될 거 없지!’ 외에도 ‘아무도

못 말려!’ ‘못할 거 없지!’ ‘말리지 마!’ ‘굴하지 않아!’ ‘꺾이지 않아!’ 같은 제

목 후보들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다가 ‘안 될 거 없지!’를 나름 최

우수 후보(?)로 점찍어서 보냈고, 이 제목이 다행히 편집부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동물들이 모여서 서로 힘을 합칠 때마다 새로운 동물 이름을 만들어 내

는 것도 재미있는데, 맨 나중에는 대통령과 국회까지 합세해서 아주 긴 이

름을 가진 동물로 거듭난다. 원서를 검토할 때만 해도 새로운 작명을 어떻

게 할까 걱정이 많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휘리릭 떠올랐고 편집자도 만

족스러워한 덕에 편집과 교정 작업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듯했다. 다만

한국어판을 원서와 살짝 다르게 한 대목들이 좀 있다. 미국에 국한된 상

징물인 성조기나 독수리 같은 이미지를 지우거나 전 지구적인 맥락으로 바

꾸어 출간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국회의원 숫자도 정확히 미국 상하원 의

원을 합한 만큼인데 여기까지는 굳이 손댈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원서 출

판사에 수정한 이미지 파일을 보내서 문제없다는 확인을 받았고, 순조롭게

한국어판을 출간했다. 부디 우리나라 어린이 독자들도 나만큼 재미있어 해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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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단어 하나하나를 편집자와 고심하며 의논했던 작품도 있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너』는 쉽게 말하자면 ‘F 성향’ 작가의 글을 ‘대문자 고딕체 T 성향’ 번역가와 편집자가 끙끙대며 이해하려 애썼던 결과물이다. 이렇게 꼼꼼히 점검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게 된 부분도 있다. 굳이 모계 친족들만을 언급한 이유가 있을 텐데 싶어서 찾아보다가, 미토콘드리아 DNA는 아버지 쪽 DNA와 섞이지 않고 모계로부터 거의 그대로 유전되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와 이동 경로를 추적하거나 혈통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림책을 번역하다가 생물학 지식까지 얻다니, 아무래도 번역이란 정말 재미있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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