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외적으론 크게 성장했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아쉬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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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8 14:41 조회 8,540회 댓글 1건본문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 1960년대 벽두의 두 사건에 의해 학교도서관 운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혁명정부의 조치에 의해 당시 학교도서관 운영의 주요 재원이었던 사친회비, 기성회비,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분기별로 징수해오던 최저 운영비 등을 거출하지 못하게 되어 학교도서관 운영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줄기를 튼실하게 하고 잎을 무성하게 해야 하는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최근만은 1962년 전국의 학교도서관 수가 149개로 1959년의 292개에 비해 크게 감소한 것은 이런 위기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최근만, 「1962년의 학교도서관」, 《도협월보》 3권 8호(1962. 12), 10-14쪽).
그러나 이와 같은 갑작스런 위기에 쉽게 꺾일 만큼 학교도서관 운동의 기운이 미약하지는 않았다. 불모의 학교 현장에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하나의 운동으로 성장시킨 선구자들의 의지와 신념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학교도서관 운동은 강화되고 확산되어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운동 형성기의 기초 위에 가시적 성과들을 축적해가면서 한국의 학교도서관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별 강습회 통한 학교 도서관운영 역량키우기
1960년대 초기의 학교도서관 운동은 지역별로 강습회를 개최하여 학교도서관 운영의 노하우를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초기의 학교도서관 운동가(교사)들과 도서관의 사서들이 강사로 참여한 지역별 강습회는 주로 지역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학교도서관의 기본적인 운영과 자료 관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대체로 1주일 이내로 이루어진 이 강습회는 개별 학교의 도서관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본 직무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체적으로 좀 더 확대된 강습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가령 전라남도의 경우는 1963년 6월부터 1964년 1월까지 도내 각 시군별로 초등학교 도서관 담당교사들에게 1일에서 5일간의 단기 연수를 실시하였는데, 이 강습회를 통해 모두 656명의 교사들이 교육을 받았으며 강의는 광주교대 사서장이었던 김평훈과 전라남도교육청 장학사였던 박중신이 담당하였다.
이 일련의 강습은 피바디Peabody 교육사절단이 돌아간 1962년 8월부터 약 2년여간의 시기에 주로 집중되었다. 피바디 교육사절단이 활동한 기간에 학교도서관 운동의 틀이 형성되었고 그 후 10여 년 이내의 기간 동안 운동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강습회가 집중된 시기는 운동 전성기의 첫 2, 3년에 해당된다. 이로 미루어 이 기간에 개최된 강습회는 학교도서관 운동 세력의 역량 성숙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지형을 확대, 강화하는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태보고와 현안 토론의 장, 전국학교도서관 대회
1960년대에 학교도서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전국학교도서관대회이다. 1962년에 시작된 전국도서관대회가 2회 대회인 1963년부터 대학, 공공, 학교, 특수 등의 관종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하면서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전국학교도서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학교도서관이 개별 학교나 지역 수준에서 논의되는 단계를 넘어 전국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국학교도서관대회의 주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세 명에서 다섯 명에 이르는 발표자들이 각자 준비한 연구 내용을 발표하는 주제 발표이고, 다른 하나는 각 시도의 대표가 자기 지방의 학교도서관 운영 실태와 문제점을 보고하는 부분이다. 주제 발표에서 제시되고 논의된 내용들은 매우 시의성 있는 현장 문제와 관련된 것이어서 참여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각 지방의 학교도서관 운영 실태를 보고하는 순서는 무척 진지한 시간이었다. 특히 각 지방의 현황이 보고된 후에는 학교도서관의 현안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 토론을 거쳐 정리된 내용이 결의문 또는 건의문의 형식으로 도서관협회나 정부 당국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기본적제도 개선 위해 함께 부단히 노력했건만…
1960년대에는 학교도서관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학교도서관이 점점 확대되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경상남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도력을 확보하여 학교도서관을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교도서관 발전을 위해서는 제도가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학교도서관 운동가들과 도서관인들은 깊이 인식하고 제도 개선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60년대 학교도서관 운동의 다른 한 갈래는 제도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구성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전국학교도서관대회 같은 기회를 통해 학교도서관인들은 학교도서관을 포함한 도서관 전반의 제도 문제를 공감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대정부 촉구활동을 전개하였다. 가령 1962년에 개최된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도서관인들은 도서관 제도의 개선을 위해 다음과 같은 건의사항을 제안하였다(이규범, 「학교도서관의 당면한 제문제」, 《도협월보》 3권 4호[1962. 7], 68-69쪽). 도서관 전반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학교도서관 문제가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1. 도서관법의 조속한 공포를 촉구한다
2. 국민교육과 민족문화 향상에 있어서 공공 및 학교도서관의 위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여 확고한 국가의도서관 정책을 확립할 것
3. 사서직을 일반 행정공무원과 분리하여 사서 및 사서교사의 전문직 공무원제도를 정립할 것
4. 도서관 행정의 철저를 기하기 위하여 문교부 기구 내에 도서관국(혹은 과)를 독립시키고 지방에는 담당 장학관을 배치할 것
5. 공공 및 학교도서관 운영을 위한 재정적 조치를 법적으로 보장할 것
6. 도서관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공공도서관 입관료를 폐지할 것
7.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도서관의 효용을 위한 과목을 새로이 배정할 것
8. 각 시도마다 학교도서관 연구지정 학교를 수교씩 설치할 것
- 1962년 7월 22일, 전국도서관대회 전국 192개 도서관인 대표, 동대회장 민영규
1963년의 제2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에서 김두홍은 학교도서관 장학 계획에 ‘장학 체계의 확립, 사서교사의 직제화, 사서교사의 훈련 계획, 시범학교·연구학교의 육성지도 강화’의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제시하면서 중앙 교육행정 당국으로서 문교부의 적극적인 장학 활동을 강도 높게 촉구하였다.
교육행정 당국은 이 이상 더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이제는 좀 적극적이고 좀 계획적인 지도에 나설 시기입니다. 근자에 와서 충남, 경북, 경남, 전남 등 일부지방 행정 당국에서 학교도서관의 향상을 위하여 서두르고 있으며, 또 적지 않은 성과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중대한 문제를 지방 당국의 선택에 맡겨 두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학교도서관을 보급 발전시키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최고 문교행정 기관인 문교부는 학교도서관의 장학에 있어서 주도권(이니셔티브)을 장악하여야 하겠습니다. 문교부는 명확한 계획과 지도력을 가지고 명령하고 원조할 위치에 있습니다. (중략) 일이 이러함에도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근 2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최고 문교행정 당국은 학교도서관의 실태조사 한 번한 적이 없고 연간지도계획 한 번 시달한 적이 없습니다. (김두홍, 「학교도서관의 장학활동 -제2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 발표논문」, 《도협월보》 5권 1호[1964. 1·2], 20-21쪽)
이와 같은 활동의 영향으로 1963년 10월에는 오랜 숙원이던 도서관법이 공포되었다.
최초로 도서관 문제를 전적으로 규정하는 제도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1963년에 공포된 교육공무원법에 사서교사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어, 1964년 8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법에 근거한 사서교사 자격증이 교부되었다. 전국에서 25명이 사서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68년 2월에는 33명의 사서교사 정원을 배정하여 정식으로 사서교사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는 장일세 선생을 문교부의 학교도서관장학위원으로 위촉하여 정책과 현장 지도에서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체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4년부터 1967년에 걸쳐 부산, 춘천, 대전, 광주, 대구, 제주, 전주 등지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사서교사 자격증을 발급하기 위한 자격강습을 실시하여 총418명이 사서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성과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학교도서관 설치와 사서교사 배치를 의무화하고, 중앙과 지방의 교육 당국에 장학 체제를 확립하는 제도적 조치가 따르지는 못하였다. 1966년에 개최된 제5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부터 1970년에 개최된 제9회 대회까지 모두 다섯 차례 채택된 건의 사항에도 ‘문교부의 전담부서 설치, 장학체계 확립, 사서교사 정원 배정, 사서교사 자격 기준 및 보수규정 합리화, 도서구입비 증액’ 등의 내용이 변함없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도서관계의 간절한 청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제도 개선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심화되고 확대된 학교도서관 운동이 제도 개선과 확립을 통해 발전의 토대를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채 1960년대는 저물어갔다. 외적인 성장과 제도의 한계라는 불안정한 구조 속에서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교육계에 몰아닥친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갑작스런 위기에 쉽게 꺾일 만큼 학교도서관 운동의 기운이 미약하지는 않았다. 불모의 학교 현장에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하나의 운동으로 성장시킨 선구자들의 의지와 신념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학교도서관 운동은 강화되고 확산되어 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운동 형성기의 기초 위에 가시적 성과들을 축적해가면서 한국의 학교도서관 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별 강습회 통한 학교 도서관운영 역량키우기
1960년대 초기의 학교도서관 운동은 지역별로 강습회를 개최하여 학교도서관 운영의 노하우를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초기의 학교도서관 운동가(교사)들과 도서관의 사서들이 강사로 참여한 지역별 강습회는 주로 지역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학교도서관의 기본적인 운영과 자료 관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대체로 1주일 이내로 이루어진 이 강습회는 개별 학교의 도서관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본 직무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체적으로 좀 더 확대된 강습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가령 전라남도의 경우는 1963년 6월부터 1964년 1월까지 도내 각 시군별로 초등학교 도서관 담당교사들에게 1일에서 5일간의 단기 연수를 실시하였는데, 이 강습회를 통해 모두 656명의 교사들이 교육을 받았으며 강의는 광주교대 사서장이었던 김평훈과 전라남도교육청 장학사였던 박중신이 담당하였다.
이 일련의 강습은 피바디Peabody 교육사절단이 돌아간 1962년 8월부터 약 2년여간의 시기에 주로 집중되었다. 피바디 교육사절단이 활동한 기간에 학교도서관 운동의 틀이 형성되었고 그 후 10여 년 이내의 기간 동안 운동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강습회가 집중된 시기는 운동 전성기의 첫 2, 3년에 해당된다. 이로 미루어 이 기간에 개최된 강습회는 학교도서관 운동 세력의 역량 성숙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지형을 확대, 강화하는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태보고와 현안 토론의 장, 전국학교도서관 대회
1960년대에 학교도서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전국학교도서관대회이다. 1962년에 시작된 전국도서관대회가 2회 대회인 1963년부터 대학, 공공, 학교, 특수 등의 관종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하면서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전국학교도서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학교도서관이 개별 학교나 지역 수준에서 논의되는 단계를 넘어 전국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국학교도서관대회의 주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세 명에서 다섯 명에 이르는 발표자들이 각자 준비한 연구 내용을 발표하는 주제 발표이고, 다른 하나는 각 시도의 대표가 자기 지방의 학교도서관 운영 실태와 문제점을 보고하는 부분이다. 주제 발표에서 제시되고 논의된 내용들은 매우 시의성 있는 현장 문제와 관련된 것이어서 참여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각 지방의 학교도서관 운영 실태를 보고하는 순서는 무척 진지한 시간이었다. 특히 각 지방의 현황이 보고된 후에는 학교도서관의 현안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 토론을 거쳐 정리된 내용이 결의문 또는 건의문의 형식으로 도서관협회나 정부 당국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기본적제도 개선 위해 함께 부단히 노력했건만…
1960년대에는 학교도서관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학교도서관이 점점 확대되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경상남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도력을 확보하여 학교도서관을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교도서관 발전을 위해서는 제도가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학교도서관 운동가들과 도서관인들은 깊이 인식하고 제도 개선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60년대 학교도서관 운동의 다른 한 갈래는 제도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구성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전국학교도서관대회 같은 기회를 통해 학교도서관인들은 학교도서관을 포함한 도서관 전반의 제도 문제를 공감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대정부 촉구활동을 전개하였다. 가령 1962년에 개최된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도서관인들은 도서관 제도의 개선을 위해 다음과 같은 건의사항을 제안하였다(이규범, 「학교도서관의 당면한 제문제」, 《도협월보》 3권 4호[1962. 7], 68-69쪽). 도서관 전반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학교도서관 문제가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1. 도서관법의 조속한 공포를 촉구한다
2. 국민교육과 민족문화 향상에 있어서 공공 및 학교도서관의 위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여 확고한 국가의도서관 정책을 확립할 것
3. 사서직을 일반 행정공무원과 분리하여 사서 및 사서교사의 전문직 공무원제도를 정립할 것
4. 도서관 행정의 철저를 기하기 위하여 문교부 기구 내에 도서관국(혹은 과)를 독립시키고 지방에는 담당 장학관을 배치할 것
5. 공공 및 학교도서관 운영을 위한 재정적 조치를 법적으로 보장할 것
6. 도서관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공공도서관 입관료를 폐지할 것
7.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도서관의 효용을 위한 과목을 새로이 배정할 것
8. 각 시도마다 학교도서관 연구지정 학교를 수교씩 설치할 것
- 1962년 7월 22일, 전국도서관대회 전국 192개 도서관인 대표, 동대회장 민영규
1963년의 제2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에서 김두홍은 학교도서관 장학 계획에 ‘장학 체계의 확립, 사서교사의 직제화, 사서교사의 훈련 계획, 시범학교·연구학교의 육성지도 강화’의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제시하면서 중앙 교육행정 당국으로서 문교부의 적극적인 장학 활동을 강도 높게 촉구하였다.
교육행정 당국은 이 이상 더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이제는 좀 적극적이고 좀 계획적인 지도에 나설 시기입니다. 근자에 와서 충남, 경북, 경남, 전남 등 일부지방 행정 당국에서 학교도서관의 향상을 위하여 서두르고 있으며, 또 적지 않은 성과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중대한 문제를 지방 당국의 선택에 맡겨 두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학교도서관을 보급 발전시키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최고 문교행정 기관인 문교부는 학교도서관의 장학에 있어서 주도권(이니셔티브)을 장악하여야 하겠습니다. 문교부는 명확한 계획과 지도력을 가지고 명령하고 원조할 위치에 있습니다. (중략) 일이 이러함에도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근 2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최고 문교행정 당국은 학교도서관의 실태조사 한 번한 적이 없고 연간지도계획 한 번 시달한 적이 없습니다. (김두홍, 「학교도서관의 장학활동 -제2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 발표논문」, 《도협월보》 5권 1호[1964. 1·2], 20-21쪽)
이와 같은 활동의 영향으로 1963년 10월에는 오랜 숙원이던 도서관법이 공포되었다.
최초로 도서관 문제를 전적으로 규정하는 제도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1963년에 공포된 교육공무원법에 사서교사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어, 1964년 8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법에 근거한 사서교사 자격증이 교부되었다. 전국에서 25명이 사서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68년 2월에는 33명의 사서교사 정원을 배정하여 정식으로 사서교사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는 장일세 선생을 문교부의 학교도서관장학위원으로 위촉하여 정책과 현장 지도에서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체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4년부터 1967년에 걸쳐 부산, 춘천, 대전, 광주, 대구, 제주, 전주 등지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사서교사 자격증을 발급하기 위한 자격강습을 실시하여 총418명이 사서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성과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학교도서관 설치와 사서교사 배치를 의무화하고, 중앙과 지방의 교육 당국에 장학 체제를 확립하는 제도적 조치가 따르지는 못하였다. 1966년에 개최된 제5회 전국학교도서관대회부터 1970년에 개최된 제9회 대회까지 모두 다섯 차례 채택된 건의 사항에도 ‘문교부의 전담부서 설치, 장학체계 확립, 사서교사 정원 배정, 사서교사 자격 기준 및 보수규정 합리화, 도서구입비 증액’ 등의 내용이 변함없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도서관계의 간절한 청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제도 개선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심화되고 확대된 학교도서관 운동이 제도 개선과 확립을 통해 발전의 토대를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채 1960년대는 저물어갔다. 외적인 성장과 제도의 한계라는 불안정한 구조 속에서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교육계에 몰아닥친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