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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8:21 조회 8,208회 댓글 0건본문
스스로 어린이는 혼자서도 잘해요
비 내리는 오후. 날씨 탓에 방과 후 아이들이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용한 본관과 달리 별관의 도서관에는 활기가 넘친다. 책장 사이를 오가며 책을 찾는 아이, 여기저기 모여 책을 읽는 아이, 비록 만화책이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아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검색하는 아이. 그리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시는 이미경 선생님이 계셨다.
안산 석호초등학교 샘골도서관은 1999년 12월에 개관하여 2008년 3월 19일 교실 세 칸 반의 규모로 리모델링한 후 재개관하였다. 장서 18,000여 권을 갖춘 지금의 도서관은 전교생이 1,400여 명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장서의 양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3월에 오신 이미경 선생님은 올해 10년 된 샘골도서관의 터줏대감이시다. 사서 선생님이 한 학교에 오래 계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이미경 선생님이 계신 10년의 시간 동안 샘골도서관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이미경 선생님은 도서관의 분위기를 첫째로 꼽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변화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에서 겸손하지만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달이 벌어지는 작은 행사보다는 큰 행사를 통해 도서관을 알리고, 도서관 안 작은 이벤트로 아이들이 도서관과 친해지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므로 서로 배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가르친다. 초등학생이다 보니 무조건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둘러봐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작은 소리로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시끄러운 듯 조용하고 부산한 듯 질서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샘골도서관의 특징이었다. 다른학교 사서 선생님이 와서 보시고는 시끄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것이 참 신기하다며 부러워했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흔히 생각하는 도서관 특유의 정적 대신 따뜻함과 생기가 느껴졌다. 사서 선생님이 오랫동안 아이들과 교류하면서 분위기를 잡아 준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도서관에 와서 아이들 스스로 깨친다는 것이다.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도서 검색 방법을 가르치는데, 어느 날 1학년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을 하더라는 것이다. 가르친 적 없는 저학년들이 도서의 등록번호를 적어오는 모습에서 이미경 선생님은 ‘내가 의식하지 못했지만, 우리 학교 아이들은 도서관에 오면 저렇게 한다는 걸 본인도 모르게 어깨 너머로 배워 익히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고학년들이 도서관활용수업 때 배운 것이 자연스럽게 도서관 분위기를 만들만큼 환경이 되어 이제는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야단칠 일이 없다. 긴 말 필요 없이 책상을 두드리며 주의만 줘도 아이들 스스로 알아서 고치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여하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2002년 안산교육청에서 처음 시도했던 사이버토론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일 년에 두 번 진행하였으나, 지금은 1학기의 사이버 독서토론과 2학기의 책축제가 대표 행사다.
책을 세 권 읽고 한 달에 한 권씩 석 달에 걸쳐 하고 있는 사이버 독서토론은 수업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 동안 열린다. 토론 게시판에 책과 관련된 주제를 올려놓으면 제시글을 읽고 책 내용을 바탕으로 아이들끼리 댓글 토론을 시작한다. 얼굴이 안 보이니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가끔 심한 말이 오가고 토론이 과열될 때에는 선생님이 조절해 준다. 자신의 생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댓글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주제에 따라 2시간이 모자랄 때도 있다. 댓글이 천천히 올라오거나 공백시간이 길어지면 참여하는 아이들 집으로 전화를 걸어‘뭐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만큼 선생님의 내공도 쌓였다.
큰 행사를 학기마다 치르는 가운데 도서관 내부에서는 사서 선생님과 어린이 사서의 알콩달콩한 일들이 일어난다. 해마다 4, 5학년 어린이 사서를 뽑는데 일 년의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졸업할 때까지 3년을 활동한다. 누구나 신청할 수 있지만 한 달의 수습 기간을 거쳐 성실성을 보고 뽑으며 단순히 도서관 뒷정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도록 도와준다.
학교 마치면 더욱 바쁠 아이들이 3년 동안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것이 고마워 이미경 선생님은 어린이 사서를 대상으로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예전에는 방학마다 박물관이나 다른 학교 도서관, 체험관으로 견학만 갔으나 2008년 도서관 리모델링 후 좌식공간이 생겨 여름 방학 때는 ‘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추억을 만든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모여 간식도 나눠 먹으며 토론하는 ‘방과 후 독서모임’을 지도해 주는 것도 어린이 사서들을 위한 이미경 선생님의 작은 선물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한번해 보면 어떨까요?’
샘골도서관에는 어린이 사서뿐만 아니라 어머니 사서도 있다. 명예 사서로서 공식 명칭은 ‘도서관 도움 어머니회’이다.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 1명으로 한 달에 한 번 다과회를 하며 학년 관리를 의논한다. 현재 43명의 어머니들이 지원하셔서 하루에 두 명씩 한 달에 한번 꼴로 도서관에 오셔서 책정리를 한다.
어머니들의 적극성을 본 후 이미경 선생님은 “~하자”, “~해 주세요”, “~하세요”라는 말 대신 “~해 보면 어떨까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머니들의 아이디어가가지를 치며 확대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저 한 마디로 시작된다. “인형극 어때요?”라는 말이 나온 2003년의 첫인형극은 두꺼운 종이를 이용하여 소박하게 했지만 2004년부터는 제대로 배워 2006년까지 했었다. 이런 열정이 있어서 교육부에서 지원하는 학부모 동아리 모임으로 선정되어 2009년 9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예산도 받는다.
올해도 늦게까지 도서관을 열어 학생들과 가족들을 초대하는 야간 행사를 계획하다가 “빛그림자 인형극은 어떨까요?”라고 꺼낸 것이 일을 점점 키우고 있다며 웃는다. 부평 ‘기적의 도서관’에서 달마다 두 번 상영하는 인형극 정보를 접하고는, 극단을 찾아가 직접 배우고 공연도 여러 차례 보고 오는 어머니 사서들의 열정 앞에서 장소와 기구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도 만들었고 이제 설치를 계획하고 있는 5월의 ‘빛그림자 인형극’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선생님 혼자 아이들을 지도했던 ‘방학 독서 교실’도 이제는 독서지도사 자격증과 경력 있는 어머니들의 도움과 참여로 진행된다. 지난 겨울방학 때는 60~70명의 학생들이 어머니 사서 15명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프로그램이 더욱 풍성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08년 봄에 만들어진 ‘보짱’(순우리말 : 꿋꿋하게 가지는 생각. 당당함)도 어머니들의 적극성을 보여준다. 이름부터 어머니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진‘보짱’은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에 역사 체험을 하는 소모임이다. 그해 여름방학 독서교실과 맞물려서 일종의 박물관 학교로 진행되었다. 첫날의 이론 공부와 둘째 날의 움집 짓기, 빗살무늬토기 만들기 등의 체험 후 마지막 날 송파구 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머니 사서들의 자녀뿐만 아니라 신청한 아이들 60명과 함께 지하철로 이동한 큰 행사였는데 한 어머니가 5~6명을 맡아 관리를 하다 보니 세 번의 행사를 모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잠시 중단했지만 학교와 교육청의 지원이 이어질 수 있는 ‘방과후 역사체험학교’를 계획 중이라는 말에 새로운 ‘보짱’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아이들에게는 미래를, 학부모에게는 희망을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2007년과 2008년 어머니 사서의 회장직을 맡았던 이영임 어머니가 잠깐 도서관에 들리셔서 얘기를 나눴다.
“도서관 활동은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 참여를 하면서, 본인도 책을 보며 활동을 하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삶을 발전시킵니다. 학부모들이 학교에 자주 가지만 도서관 활동은 다른 봉사활동과 다르다는 평을 주변에서 많이 듣습니다. 학부모 활동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공부를 시키는 어머니에서 공부하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이영임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어머니 사서가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 토론만 하다가 본인의 부족함을 느끼고 독서지도사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취득한 어머니도 있다. 특히 올해는 현재 회장을 포함하여 총 여섯 명의 어머니가 방송통신대에 입학했다. 한 명은 3학년에 재학 중이며 이영임 어머니 역시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여덟 명의 어머니가 배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도서관 일을 하다 보니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고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는 것을 보며 앞으로 자신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고 한다. 봉사 활동으로 시작한 도서관 활동이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자녀들이 석호초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어머니들의 도서관 활동은 중학교에 가서도 이어진다. 기반이 없을 경우에는 그 노하우를 가지고 마을문고로 진출하기도 한다며 사서 어머니의 활동을 학교에 한정시키지 않고 지역 사회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도서관은 유기체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이미경 선생님이 생각한 것은 ‘정보의 공유’다. 학부모 대상 프로그램이나 강좌를 개발해서 안산 지역 다른 학교들과 공유하고 도서관 행사를 연합해서 진행한다면 적은 예산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산 지역 사서들과의 연계 방안을 생각 중이다.
현재 ‘안산 지역 사서 협의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미경 선생님은 이 부분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예전부터 이어오던 안산 지역의 사서 모임이 정규 모임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7월 교육청을 통해 각 학교에 공문을 보내면서다.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 수요일에 모여학교 도서관의 발전을 의논한다. 각 학교의 도서관에서 그 학교 도서관만의 특징과 도서관 사서로서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서로 돌아가며 강의도 하고 정보도 나눈다. 올해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서로에게 자극을 줄계획도 있다. 모임은 방학에도 이어진다. ‘종일 연수’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도서관이나 배울 점이 있는 학교 도서관을 탐방해서 관장님과 관계자의 얘기도 들어보고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사서라는 일은 제한된 공간에서 혼자 하는 일이라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가장 힘들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변함없는 자리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유혹도 크다. 힘들다고 혼자 상처받기보다는 안산지역의 다른 학교 사서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며 같이 성장하는 도서관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단순히 책만 읽는 도서관은 예전의 모습이다. 대출·반납은 동네 도서대여점에서도 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도서관이 아이들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사서선생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힘들다. 학교의 관심과 학부모들의 참여가 있어야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도서관 안에 사서 선생님의 활동을 가두기보다 어머니와 학교의 손을 잡고 지역으로까지 뻗어나가는 도서관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협회의 성격이 자발적이라 강요할 수도 없고 늘 오던 사람만 오는 모임이지만 올해는 열 명의 신입회원이 생겼다며 기뻐하는 이미경 선생님. “도서관의 분위기는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새로운 책이 많아도 그 곳의 따뜻함과 생동감은 이용자와 관리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도서관은 유기체입니다. 누군가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10년이라는 시간과 학부모들의 참여가 샘골도서관과 지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