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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도서관 밴쿠버 학교도서관 체험기]과정 중시하는 삶과 교육이 아이들을 꽃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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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1-05 14:57 조회 10,20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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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익숙해’ 실망스럽던 학교도서관의 첫인상
올해 열세 살인 아들과 함께 우리 가족은 지난 1년 동안 캐나다 밴쿠버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는 아빠의 워킹비자 덕분에 단기 체류임에도 일반 유학생들처럼 학비를 지불하지 않고 공립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지난 1년은 아이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그동안 익숙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값진 시간이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대학 주변으로 기혼자 학생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푸른 녹지와 편의시설, 안전한 치안 덕분에 유독 아시아계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많은 곳이다. 그러다보니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가 많았고, 일부러 이곳에 정착하여 아이들을 유학시키는 부모들도 많이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일곱 살부터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우리 동네는 몇 년 전부터 기존의 학교에서 더 이상 학생 수용이 어려워 새로운 공립학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당 교육청은 아이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학교를 배정하는데, 아이는 2013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아카디아 학교(Acadia Road School)에 다니게 되었다. 교실 10여 칸이 고작인 작은 컨테이너 가건물에 학생 수는 겨우 50여 명인 아카디아는 당분간 바로 옆에 위치한 퀸엘리자베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아카디아 학교의 공동 책임을 맡게 되어 퀸엘리자베스의 모든 시설과 장비를 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

퀸엘리자베스 초등학교(Queen Elizabeth elementary school) 학교도서관에 처음 갔던 날.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학교도서관은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모습이었다. 교실 한 칸 크기의 작은 공간,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과 책꽂이들, 책상 위에 올려진 의자들, 떠드는 아이 하나 없는 조용한 분위기… 순간 당황스러웠다. 적어도 우열과 경쟁에 갇혀 있지 않고 개성 넘치는 아이들과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와 더불어 이곳의 학교도서관은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던 마음 때문이었는지 너무 익숙한 도서관의 모습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마음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학교도서관에 대한 수치적인 평가(장서 수, 이용자 수, 최신식 장비와 시설 구비 정도 등)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협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과 가까운 아이들, 책을 즐기는 사람들
밴쿠버의 모든 초·중·고는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마친다.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에 대한 보호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기 어려운 부모의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중·고등학교 아이들의 경우 방과 후 시간은 전적으로 아이들의 몫이 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오후 4~5시면 퇴근을 하고, 주5일 근무가 일반화되어 부모세대의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이 철저히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역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알 수도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부모들은 일터에서 죽도록 일하고, 아이들은 학교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와 비교해 볼 때, 평일 저녁 가족 단위의 여유로운 산책과 주말과 공휴일에 이웃들과의 친교 모임이 많은 캐나다가 OECD 회원국 중 국가 행복지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자기 스스로의 시간을 관리하고 즐기는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나라! 밴쿠버에 온갖 레저, 스포츠가 발달하고 문학, 예술 분야에서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서 남녀 구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자전거도 타고 축구, 소프트볼, 원반던지기 등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사계절 내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 등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모든 문학 작품이 교재가 된다는 국어는 교과서가 따로 없었다. 특이한 점은 수업 시간표에 ‘책 읽어주는 시간(Read aloud)’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교사를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점심시간 이후 약 30분 가량 조용히 ‘책 읽는 시간(Silent reading)’을 갖는 것이다. 책 읽는 시간에 읽는 책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이니 영어가 익숙치 않았던 아이는 처음 한동안 집에 있는 한글 책을 열심히 들고 다니기도 하고, 학급문고에 있는 낮은 단계의 영어 책을 읽기도 했단다. 학급문고 운영은 학급 내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학교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만큼 대출 및 반납이 가능하고 연체 및 파손 등에 대한 철저한 책임이 부과된다.



아이는 언어 장벽에 부딪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주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예전에 번역본으로 읽었던 『샬롯의 거미줄』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곤 했다. 고학년인 5,6,7학년으로 구성된 학급에서 선생님이 읽어주는 책은 주로 중·장편의 문학 작품들이었는데, 읽어준 책과 수업을 연결시키는 어떠한 독후활동도 없는 이 소중한 시간이 수업 중 시간 날 때가 아니라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그러나 밴쿠버에서 책을 읽어주는 일, 또는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다운타운 중심가에 있는 중앙도서관과 각 지역의 마을도서관 들에서는 아기 때부터 이제 막 책 읽기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이 있다. 물론 이 시간 이외에도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일을 즐긴다. 아이들은 책 읽기와 읽어주기에 대해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있고, 그곳이 여행지든 잔디밭이든 길거리 벤치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사람들은 책을 펼친다.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없는 책들을 모아서 필요한 곳에 기부를 하거나, 싼값에 사고파는 장터가 종종 열린다는 것이다. 다른 물가에 비해 책값이 유난히 비싼 까닭도 있겠지만, 집 가까이 있는 도서관에서 언제든 필요한 책을 볼 수 있고(원하는 책은 어느 도서관에 비치된 책이든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서 예약하고 대출, 반납이 가능하다), 책을 소유하기보다는 책 읽는 일을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과에 대한 압박 없이, 과정 속에서 스스로!
좌충우돌하면서도 새로운 문화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난 학기 내내 이루어진 프로젝트 수업이었다. 열두 명인 반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My favorite ABC Book’. A부터 Z까지 첫 글자를 시작으로 내용을 채워 넣어 나만의 책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 스스로 주제를 잡는 순간부터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무슨 내용으로 채울 것인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소설, 이야기, 나라, 패션, 동물 등등 현재 자신의 관심 있는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아이가 선택한 주제는 ‘Korea’.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더니 우리 아들이 딱 그 짝이다. 캐나다에서 새롭게 대한민국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학기 내내 인터넷을 검색하고 얼마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 대한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글을 쓴다. 2780 Acadia road처럼 도로 이름에 붙여진 번지수로 주소가 확인되는 캐나다와 달리 시, 군, 구, 읍, 면, 동, 리로 세분화되는 우리나라의 주소 (Address) 이야기부터 동물학(Zoology)에 이르기까지 알파벳으로 엮어내기 어려워 K로 또는 W로 시작되는 우리나라 관련 단어는 무엇인지 몇 번씩 묻곤 했다. 그중에서 아이가 가장 관심 있게 그리고 애써서 채워 넣은 페이지는 독도(Dokdo)와 경복궁(Gyeongbokgung Palace). 구글 지도에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어이없는 상황에 살짝 분노하기도 하고, 경복궁의 역사와 구석구석 이야기를 엮어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귀뜸해주기도 하였다.

어느 수업 시간에 책만들기 프로젝트를 주로 하고 있는지 물었다. 따로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반별로 이루어지는 학교도서관 이용 시간이나 컴퓨터 시간에 주로 자료 찾는 일을 한단다. 그렇지만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하교 시간 등 시간이 날 때마다 각자가 필요한 자료를 찾고 정리하기 때문에 아이들마다 진행 속도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아이는 학교도서관과 학급문고에서 Korea에 관한 자료를 빌려와 열심히 읽어보기도 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후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기도 하였다. 학교에서는 책 읽는 시간에 필요한 책들을 읽었고, 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자료를 프린트하고 자르고 오려붙이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정성 드리는 모습이었다.


학기를 마칠 때쯤 겨우 아이의 ABC Book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표지를 만들고 색을 입히고… 방학하는 날까지 아직 완성되지 못한 나만의 책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어릴 때 많이 해본 방식의 나만의 책 만들기에 자신감을 보였다. 앞으로 커서 요리사가 되겠다며 대형 마트에서 제공하는 요리 레시피들을 모아서 『가은이의 요리책』을 만들던 실력으로 이번 프로젝트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요리사가 된 기분으로 요리책을 만들던 그때처럼, 결과물을 검사받고 평가받을 필요 없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던 프로젝트.

한 학기 내내 이루어지는 프로젝트 수업의 특징상 평가를 한다 하더라도 결과물에 치우진 평가를 하기보다는 진행 과정 자체에서 평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주체는 아이들 자신일 수밖에 없고, 담임교사나 도서관 사서는 결국 도우미일 뿐 필요한 자료를 스스로 찾고 소화해서 정리하는 일이 이 수업의 최대 관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번 학기 프로젝트 주제가 ‘내가 좋아하는 ○○’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이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시간이 허락되고, 각각의 아이들이 필요한 순간에 학교도서관과 사서교사가 그리고 학급문고가 또 공공도서관이 자료를 찾고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 역시 결과물에 대한 압박이 없으니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과정에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고, 그 과정 속에서 지식 습득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고, 도서관이 어떤 곳인지 자연스레 몸으로 익히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떠나던 날까지 다양한 아이들의 색다른 ABC Book을 구경할 수 없어 조금 아쉬웠다. 도서관에도 학급에서도 그리고 학부모와 아이들이 모두 모여 1년을 정리하는 시간에도 아이들의 결과물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이들이 어떻게 즐겁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해왔는지 아이들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결과물로서 학교와 교사, 학생 간 교육의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아이들 자신이 좋아하는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스스로 찾아낸 정보들과 그것들의 조합들이 오롯이 아이들 속에 스며들도록 하는 교육 방식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학교도서관이 기쁨과 희망의 공간이 되려면…
학급별 학교도서관 수업이 없는 날 도서관을 다시 찾았다. 아카디아 학교 학생의 학부모라고 소개하면서 학교도서관을 둘러볼 수 있는지 물었다. 사서교사는 픽션과 논픽션, 문학, 예술, 과학 등 자세한 장서 배치를 설명하면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책들이 있다고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책 읽기가 아직 서투른 아이들을 위한 책들을 모아 놓은 곳을 소개하면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아늑한 자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모든 학교도서관이 그렇진 않겠지만 최신식 컴퓨터와 알록달록한 예쁜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아이들의 독후활동 작품이 진열된 우리의 학교도서관을 생각해보면, 바닥에 펼쳐진 책바구니며 가지런하지 못한 서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이 비좁은 공간이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에서 이곳은 작고 초라한 곳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배우는 기쁨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에너지 충만한 공간이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정된 공간을 볼 수밖에 없었다. 넉넉한 예산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러 학교도서관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 학교도서관의 현실과 그리 나아보이지 않는 작은 학교도서관의 모습 속에서 새삼스런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쾌적한 공간으로서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순간 학교도서관, 학급문고, 공공도서관, 교사나 부모 그것이 무엇이든 아이들의 필요에 도움이 될 때 공간을 넘어 그것이 곧 최고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서교사의 배치, 형식적인 도서관 운영, 장서의 관리, 부족한 예산 등 여전히 우리나라 학교도서관의 현실적인 문제들은 쌓여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학교도서관이 아이들에게 기쁨의 공간, 희망의 공간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시간’을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적절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학교도서관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고, 자유롭고 꿈꾸는 책 읽기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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