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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활용수업 [책으로 말 걸기] 이번 가을을 잘 넘기고 있는 예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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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1-22 02:46 조회 7,766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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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원 대안학교 말과글 교사


비오는 날만큼이나 가을은 비상이다! 마음이 예민한 아이들은 오고 가는 날씨의 변화에 너무나도 민감하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웃고 뛰어다니던 아이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깨를 떨어트리고 다닌다. 한숨도 점점 늘어간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다시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다.
작년 가을, 예지는 무척이나 힘들게 가을을 버텨 왔다. 중학교 2학년, 모든 친구들이 말리는 남자와 연애도 시작했고, 친한 친구에게 절교 통보도 받았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점점 심해졌으며, 고등학교 3학년인 언니의 귀가 시간은 점점 더 늦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났고, 또 어느 날은 손목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다.
그냥 죽고 싶다고 했다.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그 다음에도 좋아질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특히 겨울을 맞이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겨울이 오는 것이 너무도 무섭다고 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한숨이었다. 그리고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밤 12시쯤 문자가 왔다.
“선생님!”
바로 “넵!”이라는 답장을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다. 그 시간에 한참 에니어그램에 대한 책을 보고 있던 중이라 예지의 성향이랑 비슷한 예술가형이라는 ‘에니어그램 4번’을 설명하는 블로그 내용을 링크 걸어 문자로 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 다시 문자가 왔다.
“딱 저예요. 제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거였군요. 책 있으면 빌려 주세요!”


함께 시작한 에니어그램 공부
그렇게 예지와 에니어그램 공부를 같이 했다. 『나를 찾는 에니어그램 상대를 아는 에니어그램』이라는 책이었다. 그림과 다른 번호와의 비교 자료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아이들과 쉽게 보며 이야기하기 좋았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에니어그램 번호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에니어그램 연수를 받을 때 강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해서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지만, 뒷담화 하듯이 즐거웠다. 특히 특정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보며 한참 웃었는데 4번인 예지는 8번이 절대 못할 일인 “낯선 사람들만 있는 자리에서 불안을 느껴서 동료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하기”를 왜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8번 친구가 “그럼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약한 것처럼 보이잖아. 무시당하면 어떻게 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해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함께 보고 나눈 이야기들이었다.

학생1 나무가 너무 불쌍해서 옆에 다른 나무를 심어 주어야 해요. 말년에 외롭지 않게…
학생2 그 나무 이제는 정신 차렸을 거예요. 그 나무가 바보예요.
학생3 사과나무로 배를 만들어갔다는 건 과학적이지 않아요. 사과나무는 휘면서 자라서 목재로 적합하지 않거든요.
예지 결국 소년은 쉬었다 다시 떠나고 돌아오지 않겠죠? 나무는 평생 소년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잖아요. 이렇게 슬픈 이야기인 줄 몰랐어요.

예지는 아이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예지가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이들도 그런 예지에게 편하게 대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보게 된 나!
한동안 아이들과 에니어그램 이야기만 했다.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부모님 번호를 알아오기도 하고 수업시간에 교과 선생님을 관찰하며 번호를 찾아보기도 했다. 예지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말을 걸면 예전처럼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지 않고 성의 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예지와 비슷한 성격의 언니를 둔 희영이가 자주 예지에게 상의하러 왔다.

희영 정말 언니랑 같은 방에서 못살겠어. 마루에 나가 살든지 해야지. 예지야 좀 들어봐. 언니가 왜 그러는지 말이지. 어제는 자기가 이상한 사람 같다고 혼자 이야기하기에, 내가 “언니 같은 사람들은…”이라고 말을 했더니 언니가 자기를 판단하지 말라며 난리를 부리는 거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지. 친구랑 뭔가 안 좋은 거 같아서 방법을 쉽게 알려 주려고 해도 듣지도 않더라고, 말이나 하지 말지.
예지 그 말은 네게 대답을 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닐 거야. 나도 사람들이 나를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게 싫어. 하긴 누가 도와준다는 이야기도 잘 안 듣는 것 같네.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은 나와 같은 성격인 사람들은 정말 싫어하는 일이야. 그리고 언니가 고민할 때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말고 공감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둘은 제법 심각하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상황에 대해 이해했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 둘 다 표정이 밝아보였다. 아이들은 내게 오더니 희영이는 예지 덕분에 언니가 왜 그러는지 알게 되었고, 예지는 희영이 덕분에 엄마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희영이가 소문을 낸 것인지 아이들이 예지를 많이 찾았다. 예지는 마치 또래상담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면서 예지는 좀 더 열심히 에니어그램 책을 읽었고, 내게 다른 심리학책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아픔에 민감한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
아이들 속에서 예지는 가을을 잘 넘기고 있었다. 옆에서 보아도 예지는 훌륭한 상담사였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카톡으로 상담을 해주었다고 했다.
“저 하고 싶은 것이 생겼어요!”
예지가 수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술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예지는 아이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공감을 바랄 것이 아니라 공감을 해주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것을 알았다.
“전 제가 예민한 것이 너무 싫었어요. 엄마도 항상 제게 언니는 그냥 넘어가는데 하며 비교했거든요. 제가 이렇게 태어났으니 이제는 그것을 제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나는 예지가 지금도 누구보다 훌륭한 상담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우리 훌륭한 예지는 가을을 잘 넘기고 있다. 나는 예지의 고객(?)을 위한 정보만 찾아주면 되었다. 그렇게 자기의 감정에 빠져서 위태롭게 서 있던 예지의 가을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조심조심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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