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활용수업 고정관념뛰어넘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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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7 13:39 조회 6,931회 댓글 0건본문
세 살 버릇만 여든 가는 게 아니다. 어린 시절에 배운 지식도 평생을 간다. 그걸 비판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따로 없으면, 그건 어느새 고정관념이 되어 그 사람의 머리를 지배한다. 다른 발상을 한다거나 보다 풍부한 진화를 하지 못한 채 화석화된 지식으로 남아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무슨 고고학적 유물처럼 남기만 하면 또 모르겠거니와 머리를 굳게 해서 시야를 좁히고, 앞뒤를 따져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제약해버린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할 때에도 이런 자세는 파괴적인 단정과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몰이해를 결과하기 일쑤이다.
고정관념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깊이 파고들면서 생각해보지 않는 습관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지식들의 대부분은 조금만 따지고 들면, 사실은 잘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도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런 걸 교정하지 못하는 교육은 편견을 지식으로 착각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가지고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줄 뿐이다.
왜 하필이면 콩밭일까?
누이와 매부 사이에는 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가령 쉬운 속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말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험과 어떻게 만나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기원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은 콩밭에 있다, 는 이야기는 겉으로는 이 일을 하면서 속으로 계속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달리 있다는 의미다. 이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구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것인지, 왜 하필이면 콩밭인지, 뭘 하면서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 얼른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지식의 발생 기원에 대한 탐구력이 기본적으로 허약한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라는 말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 속담은 어느 한쪽에만 편향된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다 괜찮은 거라는 설득을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처럼 여겨진 양쪽에게 알고 보면 둘 다 좋을 공통된 이익이 서로에게 있음을 깨우치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누이와 매부인가? 두 사람은 부부 사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이해관계가 충돌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 이야기를 하는 쪽은 누구이며, 이 이야기를 듣는 쪽은 누굴까? 설득하는 위치에 있는 이는 처남이고 그걸 듣고 있는 이는 매부인가? 아니면 제3자가 누이와 매부가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이야기일까? 과연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 누이와 매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이런 속담까지 만들어졌을까?
양의 입장에서는 기막힌 노릇 아닌가?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우화도 그런 고정관념의 운명에 처한다.
이솝의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을 주제로 가르쳐진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해보면 이 우화 속에 담긴 여러 가지 내면이 드러날 수 있다. 거짓말은 소년이 했는데 그 피해는 양들이 입게 되었다. 양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늑대가 출몰하자 소년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상태에서 그건 소용이 없는 절규가 된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두 번이나 확인한 동네 사람들은 늑대가 정말 나타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은 전혀 준비해 놓지 않았다.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에는 그렇다면 이 동네 사람들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그런 동네에 살고 있는 양들의 안전은 누가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인가? 만일 이 우화가 소년의 거짓말을 질타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무책임한 자세로 말미암은 양들의 비극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된다면?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는 또 어떤가? 남들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할 때 놀면 정작 어려운 시절이 왔을 때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를 교훈으로 포장해서 아이들을 윽박지를 때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우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날, 배가 고파 양식을 구하러 온 베짱이를 문전박대한 개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길러내려는 아이들의 미래는 이런 것인가?
쉽고 간단해 보이는 것들, 너무도 잘 알고 익숙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점검해보자. 그리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우리의 뇌를 일방적으로 지배해온 고정관념의 폭력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인간 이해와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존재로 키우는 그런 교육은 이렇게 시작해볼 수 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비롯된다. 아득히 멀어 보여도 한 발자국 내딛고 걷기 시작한 쪽이 목표에 마침내 이르게 되는 법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무슨 고고학적 유물처럼 남기만 하면 또 모르겠거니와 머리를 굳게 해서 시야를 좁히고, 앞뒤를 따져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제약해버린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할 때에도 이런 자세는 파괴적인 단정과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몰이해를 결과하기 일쑤이다.
고정관념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깊이 파고들면서 생각해보지 않는 습관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지식들의 대부분은 조금만 따지고 들면, 사실은 잘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도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런 걸 교정하지 못하는 교육은 편견을 지식으로 착각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가지고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줄 뿐이다.
왜 하필이면 콩밭일까?
누이와 매부 사이에는 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가령 쉬운 속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말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경험과 어떻게 만나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기원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은 콩밭에 있다, 는 이야기는 겉으로는 이 일을 하면서 속으로 계속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달리 있다는 의미다. 이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구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것인지, 왜 하필이면 콩밭인지, 뭘 하면서 그런 말이 생겨났는지 얼른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지식의 발생 기원에 대한 탐구력이 기본적으로 허약한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라는 말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 속담은 어느 한쪽에만 편향된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다 괜찮은 거라는 설득을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처럼 여겨진 양쪽에게 알고 보면 둘 다 좋을 공통된 이익이 서로에게 있음을 깨우치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누이와 매부인가? 두 사람은 부부 사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이해관계가 충돌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 이야기를 하는 쪽은 누구이며, 이 이야기를 듣는 쪽은 누굴까? 설득하는 위치에 있는 이는 처남이고 그걸 듣고 있는 이는 매부인가? 아니면 제3자가 누이와 매부가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이야기일까? 과연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 누이와 매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이런 속담까지 만들어졌을까?
양의 입장에서는 기막힌 노릇 아닌가?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우화도 그런 고정관념의 운명에 처한다.
이솝의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을 주제로 가르쳐진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해보면 이 우화 속에 담긴 여러 가지 내면이 드러날 수 있다. 거짓말은 소년이 했는데 그 피해는 양들이 입게 되었다. 양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늑대가 출몰하자 소년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상태에서 그건 소용이 없는 절규가 된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두 번이나 확인한 동네 사람들은 늑대가 정말 나타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은 전혀 준비해 놓지 않았다.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에는 그렇다면 이 동네 사람들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그런 동네에 살고 있는 양들의 안전은 누가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인가? 만일 이 우화가 소년의 거짓말을 질타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무책임한 자세로 말미암은 양들의 비극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된다면?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는 또 어떤가? 남들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할 때 놀면 정작 어려운 시절이 왔을 때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를 교훈으로 포장해서 아이들을 윽박지를 때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우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날, 배가 고파 양식을 구하러 온 베짱이를 문전박대한 개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길러내려는 아이들의 미래는 이런 것인가?
쉽고 간단해 보이는 것들, 너무도 잘 알고 익숙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점검해보자. 그리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우리의 뇌를 일방적으로 지배해온 고정관념의 폭력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인간 이해와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존재로 키우는 그런 교육은 이렇게 시작해볼 수 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에서 비롯된다. 아득히 멀어 보여도 한 발자국 내딛고 걷기 시작한 쪽이 목표에 마침내 이르게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