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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억투쟁’으로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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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9:44 조회 6,39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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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차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방문하였는데, 그곳 벽에 걸린 액자에 다음과 같은 사업관 설립의 취지문이 적혀 있었다.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분명히 민주화운동을 ‘역사’로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박제화된 역사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속에서 화해를 통해 희망한 미래를 창출하는 현재적 투쟁’, 즉 ‘기억투쟁’ 속에서 살아있는 ‘역사적 현재’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201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지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자연사적自然史的인 시간으로도 이미한 세대의 마디를 꺾은 셈이 된다. 특정한 역사를 망각으로부터 구제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의 감각기관에 직접 호소하는 각종 기념건축이나 기록물을 제작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한 역사보존 노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교육의 존립 근거는 부단한 ‘기억투쟁’을 통하여 미래의 ‘집단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교육의 불가피한 부작용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전체주의적이고 반反인륜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한 불행한 역사적사례가 그것이다. 집단적 정체성이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다면, 역사교육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집단 정체성을 확립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럽 국가들이 민족적 정체성 확보를 위해 역사적기록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철두철미하다. 특히 유쾌하지 않은 현대사를 경험한 독일에서 이는 매우 예민한 사안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수많은 천재 인문학자들에 의하여 고유한 독일적 교양敎養・Bildung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독일 민족주의 흐름이다. 20세기 나치즘이라는 반인륜적 범죄의 전사前史에는 독일적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18세기 이래 독일 낭만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낭만주의 유산이 20세기 나치즘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이 독일(인들)의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화사학자인 아스만Aleida Assman은, “독일에서의 교양 개념의 성립은 흩어져 있던 독일인들에게 문화적 기억을 수단으로 집단적 주체Volk를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라고 평하기도 한 것이다.

기억의 효과를 증진시키면서 예기치 않은 민족주의와 같은 집단적 가치가 산출되는 것은 모든 역사 보존노력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다. 그래서 다원적가치 및 세계시민적 차원을 포괄해야 하는 현 시대적상황에서 역사적 기억 보존은 섬세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속한다. 앞서 인용한 아스만의 말을 약간 수정한다면, ‘역사 기록의 시도는 유토피아적 이상과 정치적 프로그램 사이를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역사 인식이 민족적 문화와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기록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한편 21세기 우리의 상황에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쩍 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특정한 정파의 등장이 이러한 분위기를 은연중에 혹은 전략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혐의도 없진 않다. 만일 그러한 움직임이 우리의 현대사를 올바르게 복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자랑스러운 우리의 민주주의 투쟁사로 적극 보존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현 정부가 모든 국가적 과제를 경제로 환원하고자 한다면, 광주민주화운동을 적극적인 문화적 상품으로 발굴하여 해외에 수출하는 것도 적극 제안한다. 그러나 지나친 억측일지 모르지만, 20세기 우리의 독립 투쟁사와 민주화 투쟁사를 대한민국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집단적 기록에서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미 거행된 대한민국 건국 기념사업과 대한민국 건국 기념 전시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흔적이 적지 않게 보인다.

여기서 주제는 ‘건국’이고 항일독립운동은 슬쩍 빠져 있다. 각종건국 전시 자료를 보면, 건국 시기의 국가를 상징하는 자료, 당시 의식주 생활 자료가 대부분이다. 아울러 산업화와 민주화시기로 구분되는 전시 구성에서 무게중심은 산업화에 쏠려있다. 혹여 특정 정파에게 5·18은 기억하기 싫은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기억에 대한 역겨움은 문명인의 속성이긴하다. 하지만 수치스러워서 감추고 싶은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교훈을 위한 ‘에토스’로 정화되기 마련이다. 지난 민주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는 ‘역사적 5·18’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을 이미 극복하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역사적 5·18’이 자아내는 피비린내 나는 불쾌감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수호 의지로 요약되는 역사적 교훈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기록하는 진정한 의미이다.

수치스런 현대사를 가진 독일이 수도 베를린한복판에 유태인 학살 기념관을 설치한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단지 승리자들만의 기록으로서 기념비적인 역사도 아니며, 단순히 보존에만 가치를 두는 골동품으로서 역사기록도 아닌, 현재적 시점에서 과거를 생산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이 참된 역사기록이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1980년대 중반 5월 대학 교정에 전시된, 이른바 ‘광주학살’의 사진전은 지금도 여전히 커다란 충격으로 남아있다. 붉은 피가 낭자한 시신屍身과 난폭한 폭력 장면. 당시 대학 초년생인 나에게 ‘광주’는 19금禁 폭력영화의 소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역겨움과 분노, 복수심, 증오감……. 폭력의 순환이 가능할 수도 있는 출발점이 바로 이러한 반문명적 경험이리라. 하지만 점차 민주주의 투쟁의 가치와 그 숭고함이 증오의 파토스를 제압하고 있음을 성장과 함께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역사적5·18’을 차분하게 되새기는 단계에 와 있다. 우리 후손에겐 다시는 이러한 상처를 안겨다 주지 말자. 역사적이념은 반복될지언정, 불행한 역사적 실제를 반복하지 말자. 5·18 영령들께 고개 숙여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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