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육 책으로 말 걸기]엄마에게서 조금씩 독립하고 있는 희경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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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4-21 18:10 조회 7,834회 댓글 0건본문
“경찰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희경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을 섞어서 대답한다. 이미 수십 번 같은 질문을 들었고 대답도 해보았다는 식이다.
“넌 몇 살까지 살 건데?”
이번 질문에는 얼굴을 들어 나를 본다. 다음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것이었을까?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을 한다.
“한 팔십 정도까지 살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네 꿈은 20대 중반에 이룰 수 있는 꿈이잖아. 경찰시험에 합격하면 꿈이 이루어진 것일 테니 말이야.”
북아트 시간이었다. 북아트는 시간이 좀 여유로울 때 중학교 아이들과 꼭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다. 만들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고 생각보다 깊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희경이는 북아트에 그다지 관심이 있지 않았지만 친구가 한다고 해서 따라온 아이였다.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 외에 이 아이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 아이들과 만든 북아트는 계단이었고 그 계단을 입체로 만들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희경이처럼 되고 싶은 직업을 이야기하였다.
“희경아! 경찰도 종류가 많아.”
희경이가 고민에 빠졌다. 계단을 만들기 위해 칼질을 하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행정직 경찰이면 좋겠어요.”
“공무원이라면 정년이 62세인데 경찰이 되는 것은 25세 정도에 이룰 수 있을 테고 그 다음에는 어떤 경찰이 되어 정년을 맞고 싶은지 생각해봐야겠네.”
희경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나이 들어서까지 경찰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엄마가 공무원이 좋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공무원은 안정적이라고 하니 그중에 좀 힘이 있어 보이는 경찰이 되고 싶은 거라며 투덜거렸다.
학교에서도 자꾸 꿈이 뭐냐고 물어보고, 집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엄마가 이야기하던 공무원을 이야기했다. 아직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구체적인 고민은 시작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 곁에 가서 장래희망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아이들이 20대에 가지게 될 직업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에게 희경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그 이후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해보라고 했다. 그런 후 다시 희경이 옆으로 갔다.
“그런데요 선생님,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는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어요?”
조심스럽게 왜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희경이의 질문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어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제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숙사에 가 있으면 제가 보고 싶지 않을까요?”
희경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조심조심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다른 아이들은 자신들의 작품들을 만들고 의견을 나누느라 살짝 소란스러웠다.
희경이는 아빠 얼굴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 엄마한테 “너가 생기는 바람에…”란 소리만 듣고 살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잘하고 싶었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짜증이 나면 엄마도, 자신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살 기도를 한 것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손목도 그어보고, 수면제도 먹어보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된 적은 한두 번 정도라고 했다. 아직도 그다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아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살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고 했다. 경찰이 된 자신의 모습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구체적인 정보가 있으면 그려질 수 있다고 안내하고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찾아도 된다고 하자 희경이는 계단 하나하나에 표시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이루어야 할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쓰다가 ‘첫 월급은 엄마 드림’이라고 쓰고는 쓰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선생님, 오늘까지 엄마랑 이틀째 한마디도 안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엄마가 혼내면 그냥 대꾸하지 않고 흘려버렸다. 그러면서 엄마가 100% 잘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생각해보니 엄마도 50%, 자신도 50%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틀 전에는 처음으로 엄마가 오락한다고 혼낼 때 자신이 잘못한 것과 엄마가 잘못한 것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엄마는 막 화를 내면서 늦은 밤에 집을 나가버렸는데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 것을 희경이는 알고 있다. 너무 화가 나서 자신도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마음이 더 답답하다며 내게 도움을 청했다.
“어른들은 잘잘못을 가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아이들은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어른들은 태도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 그건 부모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그렇지. 혹시 네가 엄마가 잘못한 것을 이야기할 때 짜증내면서 이야기하지 않았니? 만약 그렇게 했고, 엄마랑 화해하고 싶다면 먼저 엄마한테는 네 태도에 대해 사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희경이는 울면서, 화내면서 이야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어른들은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 이야기 이후 희경이는 자료를 찾으며 자신의 계단을 차곡차곡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내게 엄마랑 화해했고, 자신이 만든 계단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모두 5차시에 걸쳐 북아트 수업을 했다. 그러면서 희경이는 자신이 너무나 밀착되어 있는 엄마와의 관계를 깨달았다. 그렇게 자신과 주변사람, 자신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가면서 엄마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도 자신의 탓이 아님을 이해했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던 희경이는 자기를 닮은 귀여운 아들과 딸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남자친구도 인정하기로 했다고 수줍게 이야기했다.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 자신도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한 딸이 아닌 건강한 사회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때보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더 쉽게 무장해제(?)가 되는 것 같다. 짧은 시간은 짧은 시간대로, 긴 시간은 긴 시간대로 아이들은 만들면서 무언가를 만들면서 그 안에 다양한 방법들로 자신의 생각들로 채워간다. 수업 시간에 수행평가를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친구 생일 카드를 위해, 자기 인생의 포트폴리오를 위해 만들 때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풍성해짐이 느껴진다. 적은 노력으로 신기한 작품이 나오는 팝업북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아이들이 만든 것으로 작품 전시회를 했다. 다른 아이들이 신기해하고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니 아이들은 생각보다 쉽다며 정성껏 다른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이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항상 내가 가르쳐 준 것보다 훨씬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아이들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