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으로 말 걸기] 다른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한 승연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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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26 16:42 조회 9,450회 댓글 0건본문
고정원 대안학교 말과글 교사
“청록파? 그 애들은 어느 동네 살아요?”
박두진의 시에 대해 설명하다가 청록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승연이에게 질문을 받았다. 인터넷 유머에서 본 적이 있는 일을 내가 직접 겪을 줄 몰랐다.
“그럼 박두진, 그 애 말고 또 누구 있어요?”
게다가 이런 어이가 없는 질문까지 받다니…
“박목월, 조지훈, 박목월 이렇게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하는데…”
승연이의 농담에 끌려가면 수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승연이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선생님, 거기서 조지훈이 짱이죠? 왠지 이름이 그래요.”
결국은 웃고 말았다. 승연이의 귀여움이 무식함을 이겼다.
승연이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아이이다. 길 가다가 만나면 살짝 피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승연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본다면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고 싶을 정도로 해맑아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승연이가 아무리 수업 시간을 방해해도 “귀여워서 참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뻐하기는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화가 난 줄 알았다. 자기는 글자 자체를 싫어한다며 투덜거렸다. 시를 읽어주자 엎드렸고, 아이들과 웹툰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은 글이 들어가 있어서 웹툰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두 번째 시간은 달랐다. 수업 시간에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이 그곳에서 전학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실인 줄 알고 좋았겠다며 북경에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북경은 아니고 베이징에 있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웃었고, 승연이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나는 승연이의 거짓말이 싫지 않았다. 승연이의 거짓말은 마치 여섯 살 난 유치원생이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거짓말 같았다. 그냥 웃어주니 좋아했다. 쉬는 시간까지 따라 나와 말을 붙였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자기도 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승연이와는 편해졌다.
오늘은 승연이의 얼굴이 많이 어두웠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엎드렸다. 승연이의 상태를 보니 항상 하던 농담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엎드려 있는데 살짝 보이는 팔뚝에 멍이 들어있었다. 밤새 아이들이랑 놀다가 싸우고 온 것은 아닐까? 여자 친구랑 헤어졌나? 그것도 아니면 할머니에게 혼났을까? 승연이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도 같이 산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지방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오늘 수업은 시였다. 일산 호수 공원에 있는 정지용 시비 사진을 보여주고 시비에 담긴 「호수」란 시를 읽어주었다. 승연이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 호수공원 가봤어요. 외할머니네 집이 그 근처에요.”
승연이네 엄마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지 8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나무도 별로 없고 더워요. 거기 별로예요.”
아무래도 8년 전에 다녀온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호수공원이 나무가 무성해져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승연이가 이 이야기를 하고 나더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바로 앉았다. 그리고 내가 팔뚝의 멍을 보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던지 어제 집에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싸워서 이겼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승연이 담임선생님께서 살짝 불러서 승연이가 수업 시간에 괜찮았는지를 물었다. 좀 전에 할머니와 통화했는데 어제 승연이 아버지가 오셔서 밤새 술 마시며 아이를 때리고 혼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주 집에 오지 않는데 오면 꼭 그렇게 애를 잡는다고 하며 할머니는 승연이가 화가 나서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어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다시 수업에 들어와서 보니 승연이는 다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친구들을 웃게 만들며 내게도 살짝 웃어주었다.
2교시는 「호수」 시를 모방해서 써보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은 쉽게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승연이가 쓱쓱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고민하더니 다시 고치기도 했다. 시를 쓰는 모습이 제법 진지해보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끝내서 말을 걸어보았다.
“작가님! 이렇게 훌륭한 시를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승연이는 활짝 웃어 보이며 팔짱을 끼어 보이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잘 쓴 것 같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리움이 끔찍하면 시를 쓰게 한다고요. 저도 그래요. 담배 피는 것이 너무 절실하거든요. 짧은 시가 마음에 드는데요. 시집 좀 볼래요.”
마침 아이들이 시를 쓰고 있는 중이라 함께 짧은 시를 찾아 읽었다.
“신기하지? 이렇게 짧은 글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니 말이지.”
승연이는 조금씩 시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 저는 원래 두 번째에 한강이라고 안 쓰고 당현천이라고 썼거든요. 그런데 담배 피고 싶은 마음이 아무래도 당현천보다 큰 것 같아서 한강이라고 고쳤어요.”
담배
–승연
담배 하나야
손바닥 하나로
폭 가리지만
피고픈 마음
한강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일반 중학교에 다니던 승연이는 심각한 학습결손에 학교폭력을 일삼는 문제아였다. 하지만 대안학교에 와서 승연이는 선생님들께 애교 부리는 귀여운 학생이었다. 이곳에서 선생님들은 승연이의 농담을 즐겁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같이 웃어주었다. 그렇게 하니 6살 승연이가 조금씩 크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금한 것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승연이는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웃게 했다.
“사람들이 장래 희망 물어보잖아요. 전 20살에 결혼하고 30살에 이혼하고 40살에 결혼하고, 50살에 이혼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이 같은 거 안 낳고 계속 예쁜 여자들 만나서 살면 좋겠죠? 저 사실 이제까지 한 명도 안 사귀어봤어요.”
얼마 전까지 사귀었던 여자 친구를 반 친구들이 모두 알게 될 만큼 승연이의 연애는 유명하다. 어쩌면 여자 친구가 쫓아다녔고, 승연이는 만나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사귀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러면 승연이의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0권 정도 가져 온 시집 중에서 짧은 시만 골라 읽던 승연이가 한쪽에 쌓아둔 시집을 건네주며 웃는다.
“선생님, 저와 비슷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그런 시 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모아서 저도 파를 만들어야겠어요. 그런데 시인이 되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쁜 여자들이 좋아할까요?”
귀여운 승연이, 충분히 어리광 부리고 조금씩 컸으면 좋겠다. 그 가끔씩 나타나서 폭력으로 권위를 세우려는 아버지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말이다.
처음 시를 접하는 아이들과
읽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집
『국어 시간에 시 읽기 1』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휴머니스트 2012
아이들과 짧은 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들이 많았다. 제목을 보고는 바로 펼쳐보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시는 어려워하지 않았다. 다양한 형식의 시도 들어있었다.
『백석 전집』
백석 지음|김재용 엮음|실천문학사2011
백석 시 중에 형식이 생소하여 흥미 없을 줄 알았던 동화시에 제일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준치 가시』(창비) 『개구리네 한 솥 밥』(보림) 『여우난골족』(창비)을 보여주니 재미있어 했다.
『로그인 하詩겠습니까 2』
이상대 엮음|아침이슬|2010
중학생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에 중학생들이 솔직하고 감동적인 느낌 글을 적었다. 시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동시에 아이들 표현에 의하면 ‘힐링 받는 시’를 만날 수 있다.
『악어에게 물린 날』
이장근 지음|푸른책들|2011
‘청소년 시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이다. 『난 빨강』(박성우, 창비)을 보며 즐거워했던 아이들과 읽었는데 이 시집을 보면서는 누군가 ‘공부 좀 하는 평범한 애들이 읽으면 좋겠네’라고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36.4°C』
배창환, 조재도 엮음|작은숲|2012
중・고등학생이 직접 쓰고 뽑은 학생들이 쓴 시 123편이 들어있다. 아이들과 함께 보며 유명한 시보다 훨씬 마음을 울리는 시도 있고, 저것보다는 우리가 더 잘 쓰겠다고 한 시도 있었다. 자기와 같은 학년의 시부터 읽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탄광마을 아이들』
임길택 지음|정문주 그림
실천문학사|2004
동시집이지만 탄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임길택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후에 함께 읽었다. 탄광마을이 눈에 보일 듯한 현장감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시집이었다.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윤동주 지음|조경주 그림
신형건 엮음|푸른책들|2006
시를 좋아하지 않은 아이들도 쉽게 외울 수 있는 시들이 많았다. 윤동주와 일제강점기 이야기와 더불어 장면이 떠오르는 시들이 많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시집이지만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좋았다.
『내 동생』
주동민 지음|조은수 그림|창비 2003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시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시그림책’은 학생들과 시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이 시리즈 중 하나인 『길로 길로 가다가』(전래동요, 창비)도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