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활용수업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아해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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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1-22 02:36 조회 8,430회 댓글 0건본문
김준산 원주 문막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1. 숭고한 스승(?)을 꿈꾸던 무렵입니다. 저는 ‘아해사랑’이란 말을 참 좋아했었지요. 순우리말이라 어감도 고왔습니다. 꼭 실천하고 싶은 소명의식이 있었지요. 학교에서 ‘아해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당찬 목표도 세웠습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을 더 사랑하겠노라’고 당차게 다짐했었지요. 새내기 교사 시절 학년 희망 신청서에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꺼려하는 학년을 주세요.”
하지만 독자적인 포부와는 다르게 가슴 뛰는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1급 정교사가 되고 경력이 쌓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권태가 몰려왔지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숭고한 아름다움은 현실이란 지루함으로 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사랑’은 유효기간이 짧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CF의 카피라이터처럼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었습니다.” 연인 관계뿐 아니라 아이들과의 만남에도 ‘격렬한 사랑’은 이리도 빨리 식는 감정이었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찾기로 했습니다. 마침 결혼을 앞둔 시기였던 터라 두루두루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교육의 이성적인 작용을 옹호하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를 통해 근대성의 극복을 탐구하던 시기였지요. 에리히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멤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의 전통적인 작용을 비판적으로 이론화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감성의 사랑 노래를 부른 철학자가 있었네요. 반가웠습니다. 그것도 노쇠해 가는 사랑을 복원하고픈 제 욕망이 정확하게 구현된 책을 썼네요. 바로 『사랑의 기술』입니다. 신기했습니다. 단숨에 책을 읽었습니다. 문제집을 풀 듯 세네 번 꼼꼼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에게도 선물하고 벗들에게도 독서를 종용했습니다.
‘사랑’을 감성이 아니라 일종의 공부로서(이성)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제게 ‘아해사랑’을 위한 ‘사랑학’ 탐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 ‘아해사랑’의 탐구를 위해 조사를 하나 해 봅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학년은 몇 학년일까요?”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범 답안은 거의 같습니다. 1위는 2학년입니다. 2위는 3학년, 3위는 4학년, 4위는 5학년, 5위는 1학년, 꼴찌는 6학년입니다. 다만 1위와 2위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이 바뀌는 해엔 3학년의 인기가 2학년의 인기를 추월하기도 합니다. 중등의 경우엔 저학년일수록 인기가 좋겠지요. 중 3이나 고 3 담임을 하겠다고 다투는 경우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인차나 지역 차는 있습니다.)
‘필’이 통하는 상대를 기다리는 이 시대의 연애통론처럼, 교사들 또한 궁합 좋은 학년을 선호합니다. 오죽하면 김용택 시인은 “2학년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스펀지”라고 했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그랬습니다. 6학년만 10년 맡아보면 압니다. 2학년 아이들의 순수한 눈매가 부럽고, 3학년 아이들의 학습 욕구가 매력적이란 사실을 말이지요. 마치 백마 탄 왕자와 착한 공주를 기다리는 사회 풍토처럼, 교사들 또한 ‘아해사랑’을 위한 학년에 집착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특정 학년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은 학년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학교를 옮기는 젊은 교사들이 대부분 6학년을 맡는 이유입니다. 볼멘소리로 ‘1년만 꾹 참자’고 다짐하고 참습니다. 버릇없고, 말 안 듣고 까다로운 6학년 아이들과의 사랑은 이처럼 불행합니다. 요즘 6학년은 솔직히 쉽지 않거든요. 모 교육청의 경우 6학년을 맡으면 이동점수를 준다고 하네요. 그만큼 초등학교에서 6학년은 피하고 싶은 ‘아해사랑’의 상대입니다. 쉬이 사랑할 수 없는 주체들이지요. 때문에 ‘사랑’에 서툰 교사들에게 6학년은 사랑하기 싫은, 혹은 매우 사랑하기 까다로운 대상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아해사랑’에 실패하고 또 실패합니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조금 더 사랑하기 편한(편안하다고 느끼는) 대상을 원하지요. 그것은 쉽고 평온한 삶이 좋다는 이 시대의 잘못된 상식이 반영된 탓입니다. 사랑이 쾌락의 질량과 비례한다는 상식 덕분입니다. 즐거운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지요.
하지만 까다로운 사랑이야말로 가치 있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쉽지 않은 노래며, 쌉싸래한 맛이지요. 사랑을 달콤한 초콜릿으로만 이해하면 사랑은 세속적인 쾌락이 됩니다. 무능력한 ‘사랑’은 조건을 따집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사들에게 ‘아해사랑’의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사랑’을 피동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풋사랑에서 멈추는 이유도 비슷하겠지요. 조건 없는 사랑을 겪고 배우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주는 사랑을 희생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는 잘 받을 수 있는 상대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 이혼의 이유 중 1위는 ‘성격차’(성 격차라고 하시면 곤란)라고 한다지요. 자기와 라이프스타일이 맞지 않는 상대를 실수로 잘못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탓은 아닙니다. 상대 탓도 아니지요. 다만 그 상대와 나는 서로 맞지 않는 상대였고,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나와 그녀(그)는 운이 없었습니다. 자기와 꼭 맞는 상대를 한 번에 찾지 못했으니까요.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쇼핑과 유사합니다. 일종의 교환 관계지요.
하지만, 사랑은 그러한 교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교환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사랑은 만들어진 사랑이고 어느 정도 조작된 사랑입니다. 자본주의가 삶을 탐욕스럽게 조작하듯 말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들의 사랑은 사기 치는 사랑입니다. 본질은 없고 껍질만을 집착합니다. 사랑에 대한 그의 거친 소리는 ‘사랑’의 정의를 새로 쓰기 위한 시도입니다.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자아 성찰’을 위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말입니다.
4. 사랑도 기술인가요?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혹은 사랑은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일까요? 그렇다면 사랑은 운명이고 본능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후자 쪽입니다. 사랑은 생의 동기를 마련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사랑을 기다리고 경험하고 후회합니다. 많은 경험이 훌륭한 동기를 만들어 준다는 상식에서 말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축복의 감정’이 아니라 공부하고 연마해야 하는 ‘기술’입니다. 사랑을 실천적으로 실험(? … 여러번 결혼)하였던, 프롬은 사랑을 생을 위한 기술이라고 설명합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몸소 증명하며 썼습니다. 그가 말한 기술은 그가 산 삶의 궤적입니다. ‘사랑의 기술’이 특별한 이유는 프롬의 삶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맞습니다. 프롬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단독성’이야말로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근간입니다. 그의 사랑은 남녀 간에 나누는 애증의 격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은 프롬에게 ‘사랑’은, 삶을 다르게 살게 하는 훌륭한 기술이며 공부였습니다. 그가 그의 생을 사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사랑의 본질을 스스로 탐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생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게지요. 사랑의 능력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생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아해사랑’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능력은 만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할 수 없다면, 나와 맞는 사람들만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맞지 않는 아이들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위대한 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주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극복하는 ‘의지’라고 쓰면 너무 무거울까요? 어쩌면 무거움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은 아닐까요?
프롬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는 것”이 사랑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란 상식을 배반합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이유는 사랑의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준비뿐 아니라 사랑에도 중요합니다. 사랑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사랑의 기술’은 삶을 위한 기술이고 자기를 위한 기술이기도 합니다.
5. 프롬에 의하면 기술 습득의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이론을 습득해야 합니다. 훌륭한 기술자는 박식한 이론가니까요. 이론 없는 기술은 한계가 빠릅니다. 이론은 이성의 연마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이 사랑도 잘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실천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세밀한 이론이라고 해도 실천적 경험이 없다면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공부했다면, 그 이론이 실천적으로 합당한지 실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속된 심리학처럼 많이 만나 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훌륭한 과학자는 단 한 번의 실험으로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니까요. 서툰 사랑일수록 숫자에 집착합니다.
마지막 조건은 ‘관심도’입니다. 특정한 관념에 대한 애증의 정도지요. 사랑을 잘 하려면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해사랑’을 하고 싶다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관심은 적고 아이들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의 성숙도가 사랑의 강밀도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프롬은 기술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근본적인 사랑의 조건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그것이지요. 일반적인 사랑의 공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조건은 호감, 외모, 집안, 돈 같은 조건이니까요. 프롬에게 ‘사랑‘은 조건을 맞춘 상대를 향한 열망이 아닙니다. 파라켈수스를 인용하며 프롬은 사랑이 기술이 돼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파라켈수스
사랑은 본능이지만 본능만은 아닙니다. 사랑은 본능을 포월(包越)하고 극복합니다. 삶에 대한 의지와 강한 자기 극복의 경험이 사랑을 불태우고 삶을 아름답게 주목하도록 돕습니다.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낳은 때 갖는 각오(보호)며, 사랑하는 상대에게 희생하는 책임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를 존중하는 존경이며, 그 보호와 책임과 존경을 이어가려는 지식의 훈련입니다.
때문에 사랑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무사도의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무모한 것들에 가능성을 찾는 이성적인 용기며,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배타적 의지가 아니라 남의 삶을 배려하려는 포용적인 의지입니다. 특별한 사랑은 특별한 삶 속에 있습니다.
‘아해사랑의 기술’도 사랑의 상대(만나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의 문제입니다. 누구와 만나도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고 숙련된 기술입니다. 어쩌면 교사들에게 ‘아해사랑의 기술’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 어떤 조건 하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니까요.
남을 위한 삶은 ‘사랑’하는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하는 능력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교사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6. 사랑의 여신 에로스는 생산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생산적 사랑’만이 사랑인 이유입니다. 생산이란 진보적 가치입니다. 뒤로 가려는 관성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려는 원심력입니다. 때때로 사랑이 급진적인 까닭은 사랑이 낡은 것들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안락과 관성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틀린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날로 사랑은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붕괴는 생산적인 삶의 붕괴입니다. 생산적 사랑이 소모적 쾌락으로 변질되고 우리의 삶은 남루하고 비루해집니다. 개성이 상실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개성은 생산의 전제니까요. 참된 개성을 위해 나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7. 돌아가 봅시다. 『사랑의 기술』을 통해 배운 ‘아해사랑의 기술’은 무엇일까요? 반복컨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피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능력입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격동이 아니라 기술입니다.
따라서 ‘아해사랑의 기술’은 삶을 성숙하게 가꾸는 능력과 유사합니다. 프롬이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분리된 자아의 고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고독을 이겨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안아줄 수 있습니다. ‘아해사랑의 기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사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극복할 수 있어야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사가 느끼는 고통의 더께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능력의 수준을 말해 줍니다.
이를 위해 교사는 진정으로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투적인 세상의 상식을 배반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전념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적 통념을 가능의 조건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무모한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을 위해 처절한 공부가 필요하듯, ‘아해사랑’의 궁극을 위해 기술을 연마해야 합니다. 갈고 닦고 기름 치고 어루만져야 합니다. 한눈에 반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해서 그 유명한 CF 카피는 틀렸습니다.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긴” 것이 아니라 “사랑은 영원하고 생활 자체가 사랑의 기술”입니다. 새 학기에 새로 쓸 ‘아해사랑’은 꼭 생활의 관성이 아닌 사랑의 혁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 숭고한 스승(?)을 꿈꾸던 무렵입니다. 저는 ‘아해사랑’이란 말을 참 좋아했었지요. 순우리말이라 어감도 고왔습니다. 꼭 실천하고 싶은 소명의식이 있었지요. 학교에서 ‘아해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당찬 목표도 세웠습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을 더 사랑하겠노라’고 당차게 다짐했었지요. 새내기 교사 시절 학년 희망 신청서에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꺼려하는 학년을 주세요.”
하지만 독자적인 포부와는 다르게 가슴 뛰는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1급 정교사가 되고 경력이 쌓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권태가 몰려왔지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숭고한 아름다움은 현실이란 지루함으로 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사랑’은 유효기간이 짧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CF의 카피라이터처럼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길었습니다.” 연인 관계뿐 아니라 아이들과의 만남에도 ‘격렬한 사랑’은 이리도 빨리 식는 감정이었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찾기로 했습니다. 마침 결혼을 앞둔 시기였던 터라 두루두루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교육의 이성적인 작용을 옹호하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를 통해 근대성의 극복을 탐구하던 시기였지요. 에리히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멤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의 전통적인 작용을 비판적으로 이론화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감성의 사랑 노래를 부른 철학자가 있었네요. 반가웠습니다. 그것도 노쇠해 가는 사랑을 복원하고픈 제 욕망이 정확하게 구현된 책을 썼네요. 바로 『사랑의 기술』입니다. 신기했습니다. 단숨에 책을 읽었습니다. 문제집을 풀 듯 세네 번 꼼꼼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에게도 선물하고 벗들에게도 독서를 종용했습니다.
‘사랑’을 감성이 아니라 일종의 공부로서(이성)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제게 ‘아해사랑’을 위한 ‘사랑학’ 탐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 ‘아해사랑’의 탐구를 위해 조사를 하나 해 봅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학년은 몇 학년일까요?”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범 답안은 거의 같습니다. 1위는 2학년입니다. 2위는 3학년, 3위는 4학년, 4위는 5학년, 5위는 1학년, 꼴찌는 6학년입니다. 다만 1위와 2위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이 바뀌는 해엔 3학년의 인기가 2학년의 인기를 추월하기도 합니다. 중등의 경우엔 저학년일수록 인기가 좋겠지요. 중 3이나 고 3 담임을 하겠다고 다투는 경우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인차나 지역 차는 있습니다.)
‘필’이 통하는 상대를 기다리는 이 시대의 연애통론처럼, 교사들 또한 궁합 좋은 학년을 선호합니다. 오죽하면 김용택 시인은 “2학년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스펀지”라고 했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그랬습니다. 6학년만 10년 맡아보면 압니다. 2학년 아이들의 순수한 눈매가 부럽고, 3학년 아이들의 학습 욕구가 매력적이란 사실을 말이지요. 마치 백마 탄 왕자와 착한 공주를 기다리는 사회 풍토처럼, 교사들 또한 ‘아해사랑’을 위한 학년에 집착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특정 학년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은 학년은 경쟁이 치열합니다. 학교를 옮기는 젊은 교사들이 대부분 6학년을 맡는 이유입니다. 볼멘소리로 ‘1년만 꾹 참자’고 다짐하고 참습니다. 버릇없고, 말 안 듣고 까다로운 6학년 아이들과의 사랑은 이처럼 불행합니다. 요즘 6학년은 솔직히 쉽지 않거든요. 모 교육청의 경우 6학년을 맡으면 이동점수를 준다고 하네요. 그만큼 초등학교에서 6학년은 피하고 싶은 ‘아해사랑’의 상대입니다. 쉬이 사랑할 수 없는 주체들이지요. 때문에 ‘사랑’에 서툰 교사들에게 6학년은 사랑하기 싫은, 혹은 매우 사랑하기 까다로운 대상입니다.
많은 교사들이 ‘아해사랑’에 실패하고 또 실패합니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조금 더 사랑하기 편한(편안하다고 느끼는) 대상을 원하지요. 그것은 쉽고 평온한 삶이 좋다는 이 시대의 잘못된 상식이 반영된 탓입니다. 사랑이 쾌락의 질량과 비례한다는 상식 덕분입니다. 즐거운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지요.
하지만 까다로운 사랑이야말로 가치 있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쉽지 않은 노래며, 쌉싸래한 맛이지요. 사랑을 달콤한 초콜릿으로만 이해하면 사랑은 세속적인 쾌락이 됩니다. 무능력한 ‘사랑’은 조건을 따집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사들에게 ‘아해사랑’의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사랑’을 피동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풋사랑에서 멈추는 이유도 비슷하겠지요. 조건 없는 사랑을 겪고 배우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주는 사랑을 희생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는 잘 받을 수 있는 상대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 이혼의 이유 중 1위는 ‘성격차’(성 격차라고 하시면 곤란)라고 한다지요. 자기와 라이프스타일이 맞지 않는 상대를 실수로 잘못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탓은 아닙니다. 상대 탓도 아니지요. 다만 그 상대와 나는 서로 맞지 않는 상대였고,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나와 그녀(그)는 운이 없었습니다. 자기와 꼭 맞는 상대를 한 번에 찾지 못했으니까요.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쇼핑과 유사합니다. 일종의 교환 관계지요.
하지만, 사랑은 그러한 교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교환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사랑은 만들어진 사랑이고 어느 정도 조작된 사랑입니다. 자본주의가 삶을 탐욕스럽게 조작하듯 말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들의 사랑은 사기 치는 사랑입니다. 본질은 없고 껍질만을 집착합니다. 사랑에 대한 그의 거친 소리는 ‘사랑’의 정의를 새로 쓰기 위한 시도입니다.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자아 성찰’을 위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말입니다.
4. 사랑도 기술인가요?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혹은 사랑은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일까요? 그렇다면 사랑은 운명이고 본능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후자 쪽입니다. 사랑은 생의 동기를 마련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사랑을 기다리고 경험하고 후회합니다. 많은 경험이 훌륭한 동기를 만들어 준다는 상식에서 말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축복의 감정’이 아니라 공부하고 연마해야 하는 ‘기술’입니다. 사랑을 실천적으로 실험(? … 여러번 결혼)하였던, 프롬은 사랑을 생을 위한 기술이라고 설명합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몸소 증명하며 썼습니다. 그가 말한 기술은 그가 산 삶의 궤적입니다. ‘사랑의 기술’이 특별한 이유는 프롬의 삶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맞습니다. 프롬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단독성’이야말로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근간입니다. 그의 사랑은 남녀 간에 나누는 애증의 격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은 프롬에게 ‘사랑’은, 삶을 다르게 살게 하는 훌륭한 기술이며 공부였습니다. 그가 그의 생을 사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사랑의 본질을 스스로 탐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생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게지요. 사랑의 능력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생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아해사랑’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능력은 만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할 수 없다면, 나와 맞는 사람들만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맞지 않는 아이들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위대한 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주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극복하는 ‘의지’라고 쓰면 너무 무거울까요? 어쩌면 무거움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은 아닐까요?
프롬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는 것”이 사랑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란 상식을 배반합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이유는 사랑의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준비뿐 아니라 사랑에도 중요합니다. 사랑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사랑의 기술’은 삶을 위한 기술이고 자기를 위한 기술이기도 합니다.
5. 프롬에 의하면 기술 습득의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이론을 습득해야 합니다. 훌륭한 기술자는 박식한 이론가니까요. 이론 없는 기술은 한계가 빠릅니다. 이론은 이성의 연마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이 사랑도 잘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실천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세밀한 이론이라고 해도 실천적 경험이 없다면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공부했다면, 그 이론이 실천적으로 합당한지 실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속된 심리학처럼 많이 만나 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훌륭한 과학자는 단 한 번의 실험으로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니까요. 서툰 사랑일수록 숫자에 집착합니다.
마지막 조건은 ‘관심도’입니다. 특정한 관념에 대한 애증의 정도지요. 사랑을 잘 하려면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해사랑’을 하고 싶다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관심은 적고 아이들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의 성숙도가 사랑의 강밀도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프롬은 기술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근본적인 사랑의 조건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그것이지요. 일반적인 사랑의 공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조건은 호감, 외모, 집안, 돈 같은 조건이니까요. 프롬에게 ‘사랑‘은 조건을 맞춘 상대를 향한 열망이 아닙니다. 파라켈수스를 인용하며 프롬은 사랑이 기술이 돼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파라켈수스
사랑은 본능이지만 본능만은 아닙니다. 사랑은 본능을 포월(包越)하고 극복합니다. 삶에 대한 의지와 강한 자기 극복의 경험이 사랑을 불태우고 삶을 아름답게 주목하도록 돕습니다.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낳은 때 갖는 각오(보호)며, 사랑하는 상대에게 희생하는 책임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를 존중하는 존경이며, 그 보호와 책임과 존경을 이어가려는 지식의 훈련입니다.
때문에 사랑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무사도의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무모한 것들에 가능성을 찾는 이성적인 용기며,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배타적 의지가 아니라 남의 삶을 배려하려는 포용적인 의지입니다. 특별한 사랑은 특별한 삶 속에 있습니다.
‘아해사랑의 기술’도 사랑의 상대(만나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의 문제입니다. 누구와 만나도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고 숙련된 기술입니다. 어쩌면 교사들에게 ‘아해사랑의 기술’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 어떤 조건 하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니까요.
남을 위한 삶은 ‘사랑’하는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하는 능력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교사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6. 사랑의 여신 에로스는 생산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생산적 사랑’만이 사랑인 이유입니다. 생산이란 진보적 가치입니다. 뒤로 가려는 관성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려는 원심력입니다. 때때로 사랑이 급진적인 까닭은 사랑이 낡은 것들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안락과 관성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틀린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날로 사랑은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붕괴는 생산적인 삶의 붕괴입니다. 생산적 사랑이 소모적 쾌락으로 변질되고 우리의 삶은 남루하고 비루해집니다. 개성이 상실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개성은 생산의 전제니까요. 참된 개성을 위해 나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7. 돌아가 봅시다. 『사랑의 기술』을 통해 배운 ‘아해사랑의 기술’은 무엇일까요? 반복컨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피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능력입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격동이 아니라 기술입니다.
따라서 ‘아해사랑의 기술’은 삶을 성숙하게 가꾸는 능력과 유사합니다. 프롬이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분리된 자아의 고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고독을 이겨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안아줄 수 있습니다. ‘아해사랑의 기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사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극복할 수 있어야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사가 느끼는 고통의 더께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능력의 수준을 말해 줍니다.
이를 위해 교사는 진정으로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투적인 세상의 상식을 배반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전념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적 통념을 가능의 조건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무모한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을 위해 처절한 공부가 필요하듯, ‘아해사랑’의 궁극을 위해 기술을 연마해야 합니다. 갈고 닦고 기름 치고 어루만져야 합니다. 한눈에 반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해서 그 유명한 CF 카피는 틀렸습니다. “사랑은 짧고 생활은 긴” 것이 아니라 “사랑은 영원하고 생활 자체가 사랑의 기술”입니다. 새 학기에 새로 쓸 ‘아해사랑’은 꼭 생활의 관성이 아닌 사랑의 혁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