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공산당을 좋아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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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4-08 23:25 조회 7,384회 댓글 0건본문
김준산 원주 문막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1. 사랑하는 아들에게
네 탯줄을 자르던 기억이 오롯한데 새해부턴 네가 학교에 다니게 된다니 참 신기하구나. 가방을 맬 네 어깨가 사뭇 안쓰러워지기까지 한다. 그 흔한 어린이집, 유치원도 잘 보내지 않았는데, 단체생활에 고생할 네 모습이 아빠의 맘을 무겁게 하는구나. 물론 잘 이겨내겠지. 아빠는 믿는다.
고백 하나 해야겠다. 사실 아빠는 너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꿈을 꾸었단다. 아빠가 학교 선생님인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꿈을 꿔도 되냐고 묻는 분들도 계셨지. 하지만 말이다, 배움이라는 것이 비단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정신을 실천하고 싶었단다. 너를 낳을 때까지는 그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었지. 사실 아빠 또한 학교를 나오고 싶었거든. 학교 밖 드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지.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말이다. 너를 많이 다르게 키우고 싶었고 아빠 또한 다르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꿈은 실패했구나. 현실은 꿈을 잡아먹은 괴물이라지. 변명하진 않겠다. 아빠도 그 괴물에게 패배했단다. 네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빠는 상상하고 희망한다. 학교에 가지 않고 아빠와 공부하는 너의 모습을 말이야.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중학교 때부터 칸트를 읽었다는데, 너에게도 꼭 그런 기억을 선물하고 싶단다. 학교에 다녀서는 쉬이 이룰 수 없는 꿈이지. 물론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아빠는 네 뜻을 존중하겠지만, 아빠의 희망은 네가 학교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혹자는 이런 아빠의 생각을 위험한 상상이라고 타이른단다.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빠 자신의 욕심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말이다, 아빠는 네가 학교에 적응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학교에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며, 학교보다 더 큰 배움의 세상을 품었으면 좋겠구나. 이유는 지금부터 아빠가 들려주는 마르크스라는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 있단다. 잘 읽어주렴. 부탁한다.
고백 하나 해야겠다. 사실 아빠는 너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꿈을 꾸었단다. 아빠가 학교 선생님인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꿈을 꿔도 되냐고 묻는 분들도 계셨지. 하지만 말이다, 배움이라는 것이 비단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정신을 실천하고 싶었단다. 너를 낳을 때까지는 그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었지. 사실 아빠 또한 학교를 나오고 싶었거든. 학교 밖 드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지.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말이다. 너를 많이 다르게 키우고 싶었고 아빠 또한 다르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꿈은 실패했구나. 현실은 꿈을 잡아먹은 괴물이라지. 변명하진 않겠다. 아빠도 그 괴물에게 패배했단다. 네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빠는 상상하고 희망한다. 학교에 가지 않고 아빠와 공부하는 너의 모습을 말이야.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중학교 때부터 칸트를 읽었다는데, 너에게도 꼭 그런 기억을 선물하고 싶단다. 학교에 다녀서는 쉬이 이룰 수 없는 꿈이지. 물론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아빠는 네 뜻을 존중하겠지만, 아빠의 희망은 네가 학교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혹자는 이런 아빠의 생각을 위험한 상상이라고 타이른단다.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빠 자신의 욕심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말이다, 아빠는 네가 학교에 적응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학교에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며, 학교보다 더 큰 배움의 세상을 품었으면 좋겠구나. 이유는 지금부터 아빠가 들려주는 마르크스라는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 있단다. 잘 읽어주렴. 부탁한다.
2. 현실보다 이상을 사랑했던 마르크스
마르크스 할아버지는 1818년 5월 5일, 지금의 어린이날 태어났대. 우리 아들은 한글날에 태어났지. 미르라는 한글 이름을 택한 아빠의 선택이 빛나는 날이지. 우연이지만 아빠는 한글날 태어난 네가 ‘미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자랑스럽단다. 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았던 마르크스가 어린이날에 태어난 것처럼, 미르도 한글날에 태어나 한글 이름을 가졌다는 자긍심을 통해 한국인의 당찬 모습을 후대에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가 아이들 아니겠니? 아마도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이 후대에도 식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덕분에 우연찮게도 우리나라 어린이날과 마르크스의 생일이 같은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일반화고 억측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에 속했던 라인 주의 트리어란다. 마르크스의 가족은 유대인이었지. 유대인이라고 들어봤지?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해 고된 삶을 꾸려야 했던 아픈 사람들이지.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해. 심지어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었지. 성경에 쓰였다지. 세상에서 가장 저주 받은 직업은 ‘일을 하지 않고 이자를 받는 은행업’(당시엔 고리대금업이라고 했지)이라고 말이다. 유대인들은 노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 때문에 당시의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랍비(유대교의 성자)와 은행원밖엔 없었지. 요즘 세계적 은행이 유대인들의 소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단다. 마르크스 할아버지도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어.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유대교를 버리고 개신교(지금의 교회)를 택했던 이유를 알겠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안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의 아들 마르크스가 차별받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희망이 선택의 이유였겠지. 아빠가 마르크스의 아버지였더라도 같은 결정을 했을 터다. 아들만큼은 고된 현실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대. 그래서 마르크스도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호사는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높거든. 차별받는 유대인의 고통을 마르크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것이겠지. 하지만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평온하게 살지 못했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더 많았지.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매우 아꼈단다. 때문에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철학, 문학, 역사를 고루 공부할 수 있었지. 아빠가 네게 문학(특히 시)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이유를 알겠니? 문학이 없는 삶은 너무 건조하거든. 삶에 아름다움이 빠졌다고 상상해 보렴. 예쁜 꽃을 보고도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슬프지 않겠니? 여하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살았단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쓰여 있지. 하지만 마르크스 아버지는 마르크스의 가장 큰 선생님이었어. 마르크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편지를 자주 주고받곤 했지.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고, 철학을 전공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상담하기도 했지. 따라서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살았다고 하기엔 곤란하지. 추측컨대 마르크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을 거야. 마르크스 아버지는 마르크스를 가장 믿었거든. 아빠와 미르도 마르크스 부자처럼 평생 편지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마르크스가 미르만 했을 때, 당시 유럽은 지금과 많이 달랐단다. 과학적으론 증기엔진이 발명되어 교통이 발전되고, 큰 공장이 세워지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렸지. 경제적으론 지금 미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형성될 무렵이었어. 도시가 커지고 농촌은 조금씩 황폐해지고 있었단다. 정치적으론 많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지. 농촌이 붕괴되면서 도시에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받기 시작한 무렵이었단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국가가 책임져 주었으면 했었지. 부자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시작했지. 혁명이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란다. 고통이 커지고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면 출구를 찾지 못한 고통이 혁명이 되어 화산처럼 폭발한단다. 마르크스가 살던 유럽이 혁명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지.
프랑스혁명을 필두로 많은 혁명이 일어났단다. 갈등이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야.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아팠지. 마르크스는 그 혁명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았단다. 비겁하게 외면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고 싶었겠지.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대에 적응하지 않고 시대를 변화시키고 싶었을까? 아빠가 네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마르크스가 고민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단다. 마르크스는 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에 속했던 라인 주의 트리어란다. 마르크스의 가족은 유대인이었지. 유대인이라고 들어봤지?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해 고된 삶을 꾸려야 했던 아픈 사람들이지.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해. 심지어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었지. 성경에 쓰였다지. 세상에서 가장 저주 받은 직업은 ‘일을 하지 않고 이자를 받는 은행업’(당시엔 고리대금업이라고 했지)이라고 말이다. 유대인들은 노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 때문에 당시의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랍비(유대교의 성자)와 은행원밖엔 없었지. 요즘 세계적 은행이 유대인들의 소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단다. 마르크스 할아버지도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어.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유대교를 버리고 개신교(지금의 교회)를 택했던 이유를 알겠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안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의 아들 마르크스가 차별받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희망이 선택의 이유였겠지. 아빠가 마르크스의 아버지였더라도 같은 결정을 했을 터다. 아들만큼은 고된 현실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대. 그래서 마르크스도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호사는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높거든. 차별받는 유대인의 고통을 마르크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것이겠지. 하지만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평온하게 살지 못했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더 많았지.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매우 아꼈단다. 때문에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철학, 문학, 역사를 고루 공부할 수 있었지. 아빠가 네게 문학(특히 시)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이유를 알겠니? 문학이 없는 삶은 너무 건조하거든. 삶에 아름다움이 빠졌다고 상상해 보렴. 예쁜 꽃을 보고도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슬프지 않겠니? 여하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살았단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쓰여 있지. 하지만 마르크스 아버지는 마르크스의 가장 큰 선생님이었어. 마르크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편지를 자주 주고받곤 했지.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고, 철학을 전공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상담하기도 했지. 따라서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살았다고 하기엔 곤란하지. 추측컨대 마르크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을 거야. 마르크스 아버지는 마르크스를 가장 믿었거든. 아빠와 미르도 마르크스 부자처럼 평생 편지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마르크스가 미르만 했을 때, 당시 유럽은 지금과 많이 달랐단다. 과학적으론 증기엔진이 발명되어 교통이 발전되고, 큰 공장이 세워지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렸지. 경제적으론 지금 미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형성될 무렵이었어. 도시가 커지고 농촌은 조금씩 황폐해지고 있었단다. 정치적으론 많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지. 농촌이 붕괴되면서 도시에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받기 시작한 무렵이었단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국가가 책임져 주었으면 했었지. 부자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시작했지. 혁명이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란다. 고통이 커지고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면 출구를 찾지 못한 고통이 혁명이 되어 화산처럼 폭발한단다. 마르크스가 살던 유럽이 혁명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지.
프랑스혁명을 필두로 많은 혁명이 일어났단다. 갈등이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야.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아팠지. 마르크스는 그 혁명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았단다. 비겁하게 외면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고 싶었겠지.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대에 적응하지 않고 시대를 변화시키고 싶었을까? 아빠가 네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마르크스가 고민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단다. 마르크스는 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3.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마르크스
초기의 마르크스는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과 함께 싸웠단다. 『공산주의 선언』이란 작은 책은 그렇게 만들어졌지. 다행스럽게도 마르크스에겐 그를 믿어 주는 든든한 친구도 있었어. 엥겔스라는 아저씨인데 그는 매우 용감했고, 똑똑했다고 전해진단다. 마르크스를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마르크스는 그와의 우정을 눈 감는 날까지 지켰지. 아빠에게도 꼭 같은 친구가 하나 있잖니. ‘똥파리 선생님’이라고. 너도 잘 알지? 아빠와 같은 꿈을 꾸며 오랜 세월 지내 온 친구지. 네가 사는 이 집도 똥파리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지어질 수 없었단다. 아빠와 똥파리 선생님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란다.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가끔 이렇게 편지도 쓰면서 살고 싶어. 정해진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도 없고 그 흔한 야근도 없어서 시간을 아빠 의지대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삶 말이다. 미르도 그곳에서 아빠랑 희망의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늘 새로움을 향해 변신하면서 말이다.
다시 질문에 대해 말해 보자. 마르크스는 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을까?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서 변호사가 되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말이다. 아빠는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똑바로 보려고 애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해석한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관찰하고 생각하고 공부한 대로 세상을 판단하려 했지. 급변하는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는 탓에 요즘에도 사람들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세상을 보잖니? 마르크스의 시대에도 비슷했어. 요즘에도 언론에 비친 세상은 참 아름답지. 놀라운 외모의 연예인도 수두룩하고, 아빠를 닮은 아주 재미난 유재석 같은 개그맨들은 힘든 일상을 잊게 해 주는 휴식이지.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도 비슷했단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지. 언론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금빛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포장했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어. 적어도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 거짓말은 정도가 너무 지나쳤지. 때문에 마르크스는 스스로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 편집 책임자가 되기도 했단다. 그 신문의 이름은 <라인신문>이었대. 당시의 <라인신문>은 다른 언론이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을 많이 폭로하곤 했는데, 특히 노동법이 잘못된 이유와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지. 가끔은 차별의 농도가 너무 심각해 폭력 혁명만이 잘못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격한 주장 때문에 신문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신문이 폐간된 이후 마르크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구원하고 싶었던 마르크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지.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되리라 예견했던 마르크스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아 보였거든.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를 명확하게 증명하기로 마음먹었단다.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고향 영국으로 망명해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기 시작했지. 약 10년 동안 대영박물관에서 마르크스는 홀로 고민하고 글을 쓰고 연구하고 생각했단다. 고통의 시간이었지. 이때 쓴 책이 그 유명한 『자본론』이란 책이야. 연구가 갈무리될 무렵, 마르크스의 몸은 많이 망가졌다고 전해지는데,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타인에 고통’에 대한 사랑이었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란다. 여전히 마르크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지.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3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불평등하고 모순된 그 사회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단다. 혹자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곤 하지. 어렵겠지만 읽어 보자.
다시 질문에 대해 말해 보자. 마르크스는 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을까?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서 변호사가 되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말이다. 아빠는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똑바로 보려고 애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해석한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관찰하고 생각하고 공부한 대로 세상을 판단하려 했지. 급변하는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는 탓에 요즘에도 사람들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세상을 보잖니? 마르크스의 시대에도 비슷했어. 요즘에도 언론에 비친 세상은 참 아름답지. 놀라운 외모의 연예인도 수두룩하고, 아빠를 닮은 아주 재미난 유재석 같은 개그맨들은 힘든 일상을 잊게 해 주는 휴식이지.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도 비슷했단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지. 언론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금빛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포장했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어. 적어도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 거짓말은 정도가 너무 지나쳤지. 때문에 마르크스는 스스로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 편집 책임자가 되기도 했단다. 그 신문의 이름은 <라인신문>이었대. 당시의 <라인신문>은 다른 언론이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을 많이 폭로하곤 했는데, 특히 노동법이 잘못된 이유와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지. 가끔은 차별의 농도가 너무 심각해 폭력 혁명만이 잘못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격한 주장 때문에 신문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신문이 폐간된 이후 마르크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구원하고 싶었던 마르크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지.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되리라 예견했던 마르크스의 생각이 틀린 것 같아 보였거든.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를 명확하게 증명하기로 마음먹었단다.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고향 영국으로 망명해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기 시작했지. 약 10년 동안 대영박물관에서 마르크스는 홀로 고민하고 글을 쓰고 연구하고 생각했단다. 고통의 시간이었지. 이때 쓴 책이 그 유명한 『자본론』이란 책이야. 연구가 갈무리될 무렵, 마르크스의 몸은 많이 망가졌다고 전해지는데,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타인에 고통’에 대한 사랑이었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란다. 여전히 마르크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지.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3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불평등하고 모순된 그 사회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단다. 혹자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곤 하지. 어렵겠지만 읽어 보자.
우리는 이 19세기 유럽의 사상가를 19세기 유럽에 가두어둔 채 만날 수가 없다. 그를 연구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많은 이들이 실토하듯 우리는 그를 현재 시제로 대면한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동시대인이고, 항상 우리 당대의 동지이거나 적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독해하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 시대를 독해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현재 나의 입장, 나의 당파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공안 당국의 서슬 퍼런 감시가 많이 무뎌지긴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를 읽는 일은 아직도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쪽은 공안 당국이 아니라 마르크스다.
–『How to Read 마르크스』 216~217쪽
–『How to Read 마르크스』 216~217쪽
마르크스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를 알겠니? 그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입장을 밝히는 일이란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만의 삶에 충실한 삶이냐, 다른 사람과 더불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삶이냐의 문제지. 아빠는 마르크스가 아빠와 미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친구라고 생각한단다. 그의 말이 우리 삶의 문제를 정확하게 판단하게 해 주니까 말이다.
4. ‘사랑’과‘저항’을 위해 살아라!
마르크스는 사랑의 파수꾼이었어. 마르크스가 죽기 1년 전 마르크스의 어린 딸 엘리노어(Eleanor)는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지.
“무어인(마르크스의 별명)은 다시금 자기의 병을 이겨냈다. 그가 혼자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건강하게 느꼈던 그날 아침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함께 있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젊어졌다. 늙고 병든 남자와 늙고 죽어가는 여자가 영원히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젊은 처녀이고 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청년으로서, 둘 다 인생의 문턱에 서 있는 듯했다.”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152쪽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152쪽
흔히 마르크스를 과격한 혁명가로 기억하곤 하지만, 사실은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단다. 그는 틈만 나면 아이들과 해변을 산책했고, 장난하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유머 감각이 뛰어났지(아빠처럼 말이다 ㅋ). 그는 세계 혁명을 바랐지만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단다. 마르크스는 사회 혁명을 개인의 삶보다 우위에 두는 맹목적 사회운동가와는 달랐지. 마르크스에게 ‘저항’과 ‘사랑’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랑은 비단 자신의 가족 안에 머물지 않았지. 그의 사랑은 그 주변은 물론 인류 전체로 확장되길 원했고, 보편적인 사랑을 위해 스스로 희생했단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것은 굴복”이라고 말한 마르크스는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낯설지 않다.”(『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154쪽)는 명언과 함께 모든 인간을 품안에 품는 훈련을 지속했지. 이 훈련들은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창조적인 훈련이었어. 참된 인간은 변화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지.
생산적인 훈련은 개인적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단다. 사랑이 저항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이 타인의 고통이 사랑의 무게로 충만할 때 사회적 저항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지. 사회적 저항의식은 보편적 사랑의 훈련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란다. 마르크스에게 ‘저항’은 ‘사랑’에 대한 실천이었지. 내 이웃, 내 국가, 내 인류를 품고 싶은 욕망이기도 했단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현실에 ‘저항’했고, 타인의 고통을 ‘사랑’하며 살았지.
마르크스는 “인간적인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했단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결벽이 마르크스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중심이야.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성이란, 낡은 것에 대한 ‘저항’이며, 아프고 약한 것에 대한 ‘사랑’이었지. 저항과 사랑은 인간성 회복의 뿌리라고 볼 수 있어. 이를 위해 인간은 진지해야 한단다. 진지한 태도가 없는 인간은 인간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척하는 인간인 셈이지. 왜냐하면 ‘저항’하고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아마도 마르크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면, “인생 뭐 있어?”가 되겠지. 똑바로 보면 인생은 모두 다르며 무엇인가 강력한 끌림이 가득하거든. 삶은 진실로 진지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단다.
미르가 학교에 오래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아빠의 바람이 이해가 되니?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고 현실적으로 쉽게 타협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선택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의 반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은, 타협과 만족이라는 내 안의 습관(관성)에 저항하는 길이거든. 보다 큰 사랑을 위해선 나부터 나를 유혹하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하거든. 그것을 극복할 때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이 사랑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란다. 더 많은 사람, 더 약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이지. 아빠는 말이다, 미르가 위대한 사람은 못 돼도 위대한 사람처럼 살았으면 하거든. 위대한 사람은 애써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란다. 힘든 길인지 알아도 우회하거나 비겁하게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뚜벅뚜벅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지. 때문에 아빠는 네가 누구나 가는 학교라는 공간이 아닌 쉽게 가지 않는 세상의 학교로 진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단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공산주의 선언』을 읽고, 『자본론』을 해석하고, 보다 나은 아빠 자신을 만들 생각이야. 네가 커서 아빠와 같은 꿈을 꾸었으면 하는 희망과 함께 말이다. 부디 용기 있게 자라 주렴. 마르크스에 반해 공산당을 재건한다고 해도 아빠는 네 편이란다. 아빠가 못한 길을 가는 네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야. 공산당을 좋아해도 되는 세상을 위해 미르가 건강하게 자라 주었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랑은 비단 자신의 가족 안에 머물지 않았지. 그의 사랑은 그 주변은 물론 인류 전체로 확장되길 원했고, 보편적인 사랑을 위해 스스로 희생했단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것은 굴복”이라고 말한 마르크스는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낯설지 않다.”(『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154쪽)는 명언과 함께 모든 인간을 품안에 품는 훈련을 지속했지. 이 훈련들은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창조적인 훈련이었어. 참된 인간은 변화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지.
생산적인 훈련은 개인적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단다. 사랑이 저항이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이 타인의 고통이 사랑의 무게로 충만할 때 사회적 저항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지. 사회적 저항의식은 보편적 사랑의 훈련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란다. 마르크스에게 ‘저항’은 ‘사랑’에 대한 실천이었지. 내 이웃, 내 국가, 내 인류를 품고 싶은 욕망이기도 했단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현실에 ‘저항’했고, 타인의 고통을 ‘사랑’하며 살았지.
마르크스는 “인간적인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했단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결벽이 마르크스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중심이야.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성이란, 낡은 것에 대한 ‘저항’이며, 아프고 약한 것에 대한 ‘사랑’이었지. 저항과 사랑은 인간성 회복의 뿌리라고 볼 수 있어. 이를 위해 인간은 진지해야 한단다. 진지한 태도가 없는 인간은 인간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척하는 인간인 셈이지. 왜냐하면 ‘저항’하고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아마도 마르크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면, “인생 뭐 있어?”가 되겠지. 똑바로 보면 인생은 모두 다르며 무엇인가 강력한 끌림이 가득하거든. 삶은 진실로 진지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단다.
미르가 학교에 오래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아빠의 바람이 이해가 되니?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고 현실적으로 쉽게 타협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선택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의 반대 방향으로 산다는 것은, 타협과 만족이라는 내 안의 습관(관성)에 저항하는 길이거든. 보다 큰 사랑을 위해선 나부터 나를 유혹하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하거든. 그것을 극복할 때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이 사랑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란다. 더 많은 사람, 더 약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이지. 아빠는 말이다, 미르가 위대한 사람은 못 돼도 위대한 사람처럼 살았으면 하거든. 위대한 사람은 애써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란다. 힘든 길인지 알아도 우회하거나 비겁하게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뚜벅뚜벅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지. 때문에 아빠는 네가 누구나 가는 학교라는 공간이 아닌 쉽게 가지 않는 세상의 학교로 진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단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공산주의 선언』을 읽고, 『자본론』을 해석하고, 보다 나은 아빠 자신을 만들 생각이야. 네가 커서 아빠와 같은 꿈을 꾸었으면 하는 희망과 함께 말이다. 부디 용기 있게 자라 주렴. 마르크스에 반해 공산당을 재건한다고 해도 아빠는 네 편이란다. 아빠가 못한 길을 가는 네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야. 공산당을 좋아해도 되는 세상을 위해 미르가 건강하게 자라 주었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