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존재의 기술자로, 존재의 미학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8-10 14:43 조회 7,297회 댓글 0건본문
김준산 홍천 매산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1. 관상은 시대상이다?
군대 시절 관상을 잘 보는 후임병이 있었습니다. 신기가 충만하다는 소문이 옆 부대까지 번졌지요. 그의 능력은 신비했습니다. 저 또한 제 얼굴에 쓰인 운명을 알고 싶었지만, 당시 계급장엔 막대기가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막대기가 4개쯤 달릴 무렵, 당당하게 부탁했습니다. “내 관상도 봐줘.”
군인에게 막대기는 관상을 볼 수 있는 자격증이었습니다. 권력이란 욕망 앞에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20대는 불량합니다. 운명이란 단어 앞에 속절없이 흥분되는 나이입니다. ‘나는 과연 영화처럼 살 수 있는 운명일까’, ‘예쁜 여자와 알콩달콩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몹시 궁금하고 설렜습니다.
후임병은 다른 병사들의 관상을 볼 때와 달리 신중하게 제 얼굴 이모저모를 살폈습니다. 보지 못했던 상이고, 희귀한 상이라는 말도 곁붙였지요. 그는 며칠 뒤, 제 얼굴이 평범하게 생긴 듯하지만,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상이라고 하며 운명에 맞서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부모 복이 없었던 것만큼 자식 복도 없을 것이며, 40대가 되면 아주 조금 재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40대가 다가옵니다. 그 친구가 본 제 관상은 딱 거꾸로 맞고 있습니다. 자식을 둘이나 낳아 잘 키우고 있고 일흔 넘은 어머니는 아직 정정하시며, 외할머니는 내 후 년이면 100세를 채우십니다. 하지만, 돈은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로 많이 늘었습니다. 후임병의 신기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낸 자극제 정도였겠지요. 흔들리는 20대를 견디기 버거워 운명이란 꼿꼿함을 잡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는 보지 못했소.” 영화 <관상>의 주인공인 내경(송강호)의 최종 고백입니다. 내경의 뛰어난 관상술만으로 대세를 잡을 순 없었습니다. 외려 그의 뛰어난 관상술은 한명회에게 이용당하며 새 시대를 여는 촉진제가 됩니다. 관상만 잘 본다고 해서 시대를 잘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개인의 얼굴은 개인만의 얼굴이 아닙니다. 개인의 얼굴은 개인사를 넘어 시대와 닿아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얼굴은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불변하는 관상이란 없지요. 개인이 시대를 만들 수도 있지만, 시대가 개인을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관상은 시대 구속적입니다.
우리는 시대에 물듭니다. 시대는 우리의 얼굴에 새긴 주름이고 흔적이지요. 관상은 그 주름들의 기록입니다. 주름의 깊이와 무늬는 시대를 읽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관상>의 주인공인 내경(송강호)은 관상에 내재된 이중적인 역사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리’가 필요한 시대에 ‘호랑이’ 편을 든 꼴입니다. ‘호랑이’ 시대가 있고 ‘이리’ 시대가 있습니다. 시대의 파도에 따라 필요한 ‘얼굴’도 달라지지요. 내경은 존재의 이유인 아들(진형)이 죽고 난 후에 깨닫게 됩니다. “관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 개인사를 시대사와 동일시해 버리는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문제를 시대의 문제로 희석해 버리는 손쉬운 버릇.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냘픈 버릇에 굴복 하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삽니다. ‘내가 모르는 것 이 내가 아는 것보다 많다’는 간단한 규칙을 무시해 버리는 습관이지요. 해석하기 전에 판단해 버리는 행위. 이해하기 전에 편을 가르는 싸구려 편파성. 이러한 근거 잃은 자기 합리화 속에 삶은 속절없이 가난해집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나 뒤늦은 아픔을 깨닫게 되기도 하지요. 내경의 아들이 죽고 난 후 알게 된 “관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 라는 허기처럼 말입니다.
2.얼굴을 규정하는 틀, 에피스테메
흔히 관상은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관상 전문가들은 관상을 ‘자세히 보는 것’이라고 합 니다.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고 신체 전반적인 것은 물론 걸음걸이, 목소리, 행동, 습관, 심지어 몸에서 나는 체취도 관상의 범위지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상인 ‘심상’입니다. 얼굴이라는 신체 속에 살고 있는 ‘얼’을 읽어 내야 합니다. ‘얼’ 이란 사회가 지닌 사회적 무의식 혹은 사회상과 관계 합니다. ‘겨레의 얼’, ‘국가의 얼’이란 상투적인 말들은 시대와 개인의 상호관계를 표상하는 것이지요. 사회의 ‘얼’은 개인의 얼굴에 침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관상은 개인의 흔적으로 운명과 시대를 읽어 내는 기술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시대마다 내재된 ‘사회상’ 혹은 사회적 규정을 ‘에피스테메’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인식소’라지요. 인식소는 “시대의 주류 담론이 되기 위해 건너야 할 경계이며, 구조적인 법칙”입니다. 인식소는 시대마다 다릅니다. 인식소는 인간과 모든 사물을 이식하고 훈육하고 통제하는 ‘존재의 법칙’이니까요. 관상을 관상이게끔 하는 로고스(logos). 보이지 않는 ‘시대 약속’이 에피스테메입니다. 에피스테메에 따라 관상이 달라지고, 관상으로 규정하는 규칙과 선들도 달라집니다. 심지어 푸코는 인간도 “마치 바닷가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지워진다.”라고 했습니다. 관상은 그대로지만, 관상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 달라지면 관상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인식의 틀을 규정하는 힘이 바로 권력입니다. 권력은 거대한 정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구석구석 매우 작은 차원에까지 힘을 미치는 미시적 영향력입니다.
개인은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호랑이’의 시대가 있고 ‘이리’의 시대가 있듯, 좋은 상 과 나쁜 상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작용합니다. 늘 변함없는 선상도, 악상도 없습니다. 선과 악은 역사와 사회에 구속됩니다. 우리가 개인의 문제와 동시에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지요. 개인이 열심히 잘 산다고 해서 이 사회가 자동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과 사물은 개인만이 아닌 사회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개인은 시대의 발명품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은 다릅니다. 생김새가 다른 것이 아니라 얼굴이란 개념이 다른 것이지요. 조선시대 얼굴은 은밀한 신체였습니다. 특히 여자의 얼굴은 감추고 아껴야 할 금기였지요. 금기는 시대의 법률입니다. 법률이란, ‘할 수 있는 것’의 정의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의 총합을 ‘권력’이라고 부릅니다. 권력은 자유보다 구속을 욕망합니다. 자유를 금지하는 곳에 강렬한 권력욕이 기생하지요. 권력이란 바로 이러한 ‘구속화 욕망’을 뜻합니다. ‘내가 못하는 걸 남도 못하게 하는 욕망’이 바로 권력입니다. 내가 사지 못한 땅을 사돈도 사지 못하게 했을 때 기쁨은 내가 땅을 샀을 때의 기쁨만큼 자극적입니다.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란 이러한 금기된 권력의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우리가 시대에 구속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지요.
3. 시대의 얼굴, 인식소
포털 사이트에 ‘얼굴’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디밴드 ‘장기하의 얼굴들’이 세 번째로 포진 해 있네요. 반가웠습니다. 나머지 결과는 이 시대가 바라는 ‘얼굴’이란 낱말의 핵심을 명확하게 나타내 주 는 듯했습니다. 대략 두 가지로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성형외과’적 코드입니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광고합니다. 대표 키워드는 ‘작다’와 ‘하얗다’입니다. 이 시대가 바라는 얼굴에 대한 에피스테메입니다. ‘작고 하얀’ 얼굴. 황 색 비너스보다 하얀색 오리지널 비너스를 선호하는 경향입니다. 어느새 우린 황인종에서 백인종으로 진 화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도태되는 ‘선택 진화’ 방식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로 극복하는 ‘인공 진화 방식’을 통해서 말이지요. 황색인종에게 금기된 하얀 얼굴을 소유하려는 쾌락적 도전. 그것이 이 시대에 내재된 얼굴에 대한 첫 번째 인식소입니다.
두 번째 도식은 ‘내면의 얼굴’입니다. 내면의 얼굴이 란, 얼굴 메시지를 말합니다. 얼굴로 표현되는 언어의 중요성이지요. ‘표정의 언어’ 혹은 ‘전달의 기술’ 같은 것입니다. ‘미소로 사람의 마음 움직이기’, ‘훌륭한 첫 인상 만들기’ 등이 포진해 있습니다. ‘호감 가는 방법’ 과 ‘웃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자료들도 많네요. 훈련을 통해 내 운명 또한 바꿀 수 있다고 꾀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우리 시대의 얼굴은 ‘작고 하얀, 호감 가는 미소’ 정도가 되겠습니다. 모든 기준이 타인에게 맞춰진 것이지요. 타인을 의식하는 얼굴, 타인이 좋아하는 얼굴입니다. 나의 만족은 타인의 만족에 기대 있습니다. 내 얼굴은 이미 ‘타인을 위한 얼굴’인 셈이 지요. 그러나 이 타인을 위한 얼굴은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열린 얼굴은 아닙니다. 타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고, 피동적으로 개조해야 할 의무의 얼굴이지요. 얼굴은 하나의 상품입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에피스테메는 잘 팔리는 인간이니 까요. 호감은 상품의 가치를 덧붙여 줍니다. 잘 팔리기 위해선 자존감이란 무게를 살짝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타인의 인정이 자기 내면의 이유가 되는 빈약한 존재 방식. 이 시대가 추구하는 우 리들의 얼굴이지요.
자기만족을 위한 쾌락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자유의지라고 말한 이 쾌락의 저변엔